제 얘기 들리시나요, 들리시면 say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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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만큼 신묘한 게 없다. 90년대 초까지는 엄마 손잡고 나가면 “즈그 어마이 쏙 뺐다”는 말을 듣고, 아빠 손잡고 나가면 “영판 즈그 아부지네” 소리를 듣던 어린 syo가 살았다. 심지어 우리 엄마랑 아빠는 입심 드러운 상놈과 세상물정 모르는 훈장님 네 막내딸처럼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 부부는 닮아간다는 속설에 빅엿을 멕이고, 끝까지 다른 얼굴로, 스무 몇 해를 사실상 남남 같은 부부와 사실상 부부 같은 남남으로 살았던 우리 엄마 아빠. 그런 그들이었기에 syo와 syo의 동생은 그들이 부부라는 최소한의 미학적 증거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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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만큼 신묘한 게 없다. 어린 날에는 엄마와 아빠 사이의 기막힌 그라데이션과도 같았던 자식의 얼굴은, 어느 시점부터 급속도로 균형이 붕괴하여 누구 한 사람 쪽으로 대차게 수렴한다. syo와 syo의 동생은 어느덧 아빠를 닮아있다. 아, 아빠를 닮은 얼굴을 한 syo의 동생은 아빠를 닮은 syo를 오빠라고 부른다. 망했구나. 어흑, 불쌍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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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망했기로 치면 syo도 크게 꿇리진 않는다. 사내놈이 아버지 닮는 게 뭐 별일 아닐 수 있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 닮은 syo보다 엄마 닮은 syo에게 훨씬 더 호의적인 시공간이다. 엄마가 아빠한테 늘 져줬듯이 엄마 유전자가 아빠 유전자한테 져주는 바람에 syo는 세상으로부터 다정한 대접을 받기 위해 별도의 이런저런 기술들을 익혀야 했다. 노멀 상태의 눈매가 굉장히 싸가지 없어 보이는 편이라 평상시에도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닌다. 이미 똥그래져 있다 보니 어지간히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도 표정의 변화가 미미해서, 뜻밖에 사이코패스 같다고 빈축을 사기도 한다. 좀 더 선량해 보이기 위해 눈웃음 웃는 연습을 오래 했는데, 그러다 젠장, 눈으로 안 웃는 법을 까먹어 버린 거라. 이십 대의 언젠가, 너 닭갈비집 이모한테 눈웃음 살살 치더라? 그래서 그 이모가 계산할 때 사이다 빼 준거 아니야? 하는 말을 여친에게 들은 후 다시 오랫동안 눈은 안 웃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걸로 끝도 아니다. 중3때 별명은 비버였다. 범인은 앞니. 친구들이 자꾸만 댐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중3이 고입 준비하기 바빠 죽겠는데 댐 만들 시간이 어딨어. 비버는 입을 닫고 웃는 법을 연습했고, 고등학교 때쯤은 그야말로 불교학교 학생 답게 자비로운 미소 스킬을 마스터, 밀려드는 건축 의뢰를 은은한 입웃음으로 원천봉쇄하고 정석 풀이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syo비버 이제 장사 안한대. 입 닫았대. 운운. 어쨌든 후천적인 노력으로 얼굴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아빠발 실점 포인트들을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솎아낼 수 있었다. 이제 딱 하나, 최고의 적수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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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의 수염은 정말 최악의 형태로 자란다. 일단 수염이 하루 종일 균일한 속도로 자라는 게 아니다. 얘네가 기지개를 쎄게 펴는 타이밍이 있다. 이게 10시에서 11시 사이다. 3시간만 일렀어도 아침 세면시 면도로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을. syo가 10시 반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면도 안했냐?”다. 했다, 했어! 열라 열심히 했다고! 9시 55분에 면도를 해도 10시를 통과하면 이렇다고! 내가 진짜 면도를 안 하고 나왔으면 “면도 안했냐?”가 아니라 “면도 안하냐?”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걸! 이라고 내면의 아우성을 지르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수염이 되게 폼나게 자라는 것도 아니다. 고시원 생활 하던 시절 눈 딱 감고 한 번 일주일을 길러보았는데, 이틀에서 사흘째 되는 지점에서 더 자라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자라주면 일부러 기른다는 느낌을 주는 길이가 되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살짝 다듬구 나서 "취존 좀요" 이러면서 우겨 볼 수도 있겠는데, 아, 이건 정말 누가 봐도 귀찮아서 면도 안한 거지 절대로 뜻을 품고서 이따위 기장으로 길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딱 그런 조잡한 길이까지만 수염이 자라더라.....
게다가 이놈의 수염이 굵어서 안 밀어주면 모공에 꽉 들어차 피지의 자연스러운 배출을 억압하는 것 같다. 자꾸 뭐가 난다. 나면 면도할 때 긁힌다. 아프고 입주변이 너구리처럼 얼룩덜룩해진다. 수염을 기르면 검게 얼룩덜룩, 수염을 깎으면 붉게 얼룩덜룩이다. 단순히 내 취향이 빨강색이라서 면도하는 수준이다. 어차피 하나 안하나 내 입가는 화개장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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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수염만큼은 A/S 받고 싶다. 불효아들놈 엿 먹으라고 이런 걸 주고 가셨나요. 차라리 똥을 남기셨다면 냉큼 치워버리기라도 하지...... 가만히 계시지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시라구요......
한 줄 요약.
모공에 자꾸 뾰루지가 나서 아팠쪄요, 징징징.
--- 읽은 ---


+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 김겨울 : 133 ~ 244
+ 위험하지 않은 몰락 / 강상중, 우치다 타츠루 : 110 ~ 303
--- 읽는 ---


= 쾌락독서 / 문유석 : ~ 108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엄기호 : ~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