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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윤대녕을 처음 알게 된 건 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프로에서 구효서와 윤대녕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그때 나는 내 무식함을 탓하며 메모를 했었다. 그리고 바로 서점에 가서 두 작가의 책을 찾아봤다. 그 중 내 맘에 든 건 윤대녕이었다.
나의 게으름 탓에 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읽은 게 뭔진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홍대 근처에 살던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과 상호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곳은 홍대앞, 광화문, 인사동. 나중에 마음에 여유가 많아지면 그의 소설 속 상호와 길거리를 목록을 뽑아 찾아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윤대녕을 읽는 눈이 부족해 감상은 마치 한밤에 허공에 내젓는 손짓처럼 막연하지만, 그의 소설은 내게 막역한 친구다. 2001년인가 그 이듬해인가 마지막으로 '미란'을 읽은 후, 다음 작품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외수도 좋아하는 작가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에 조금은 질려 윤대녕을 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 관심은 소설에서 非소설로 옮겨가 작년 초 '누가 걸어간다'가 나왔지만, 구입을 미루고 있다가 시야에서 멀어져 있던 여행산문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을 지난 연말 구입했다. 반신욕을 하며, 혹은 읽고 싶을 때 한두편씩 읽었다. 읽다 보면 이게 허구인가, 아님 진짜 여행산문인가 싶은 대목도 있다. 일본 관련정보가 참 흥미로웠으며, 청년 시절의 관심사도 재미있다. 어떤 책을 좋아하며, 일상생활은 어떠한지, 책을 어떻게 읽으며, 어떤 마음일 때 여행을 떠나는지...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게 아깝다. 윤대녕의 글 속 풍경에 그대로 머물고 싶어진다. 윤대녕을 한 10년째 좋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건 책에 나와있는 프로필이 전부였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에 대해 알게 되어 가슴이 벅차다. 몇 년 전 낮에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청취자들에게 지령을 내렸었는데 길거리를 걸어가며 아무나 찍어서 미행을 해보라고 했었다. 그 사람이 어디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아니면 그 사람도 누군가를 미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참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 지령이었는데, 이 책은 내게 딱 그런 느낌이다. 나는 윤대녕을 미행하고 있고-때론 그의 일기장까지 훔쳐보고- 윤대녕은 스튜어디스와 데이트하고...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을 다시 새로운 눈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나의 목적불분명의 충성심-하긴 충성심에 무슨 목적을 실을까마는-에 제동을 걸만한 그의 작품이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꽤 착해 보이는 윤대녕의 글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