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신간이 나오면 읽고 싶어 못 견디는 성질을 가진 독자입니다. 그래서 늘 책 읽는 속도가 책을 구입하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곤 합니다. 구입한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 다음 책을 사자고 마음먹어 보지만 그 결심은 번번히 실패하곤 맙니다. 왜냐 하면 신간을 사는 족족 지난 번에 놓치고 간 옛날 책 역시 구입하기 때문이지요. 가득가득 쌓여있는 책을 보면 한숨이 나오기보다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한 동안 이 버릇은 고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읽고 싶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마구마구 담다 우연히 발견한 책입니다. 책값이 만만치 않은 저에게 반값 세일이라는 매력적인 광고문구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죠. 물론 가격만 보고 살 수는 없기에 리뷰 역시 참고했습니다. 꽤나 많은 이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기에 그 열기에 동참하고자 저 역시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저의 평가는 솔직히 추천한 님들이 받은 감동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첫 부분은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로 저를 사로잡았으나 기대가 컸던 탓인지 잊지 못할 목록에 넣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독자로 살아가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취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영 꽝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서평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결론은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더라면 더욱 재미있었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소립니다. 게다가 가슴 뭉클한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한동안 쉬이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성장하는 ‘다니엘’이라는 한 소년의 성장기입니다. 책의 저자와 주인공의 삶이 묘하게 겹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환타지 소설 같기도 한 몽환적인 느낌과 추리소설 같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첫 장면은 ‘다니엘’의 아버지 ‘샘페레’가 자신의 아들을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흥미롭고도 매력적인 장소에 데려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샘페레는 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권p14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사고 있지. 가게에서 우리는 책들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주인 없는 책을 읽고 있는 나로서는 책이, 서점이, 도서관이 가진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구절이었습니다.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한 요즘의 책들이, 모두 인정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나라에는 경험과 지혜가 가득한 노인이 한 분 돌아가시는 것은 도서관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과 책의 의미가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는 요즘, 우리가 되새겨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에서 고른 책 한 권이 결국 다니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람과의 만남이든 책과의 만남이든 다른 세계가 만난다는 사실은 정말 굉장한 일인 모양입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책을 골라주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부모, 어떤가요? 정말 책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요? 너도나도 ‘부자 아빠 되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부자 아빠 찾기’에 혈안이 된 이 시대에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샘페레처럼 ‘좋은 부모 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은 혹시 좋은 부모의 모습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이들을 위해 철학자처럼 심오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사회학자처럼 냉철한 생각을 가진 ‘페르민’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1권p298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덧붙여 대한민국 1%가 되기 위해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에게 자본주의의 맹점을 콕 찝어준 부분은 명쾌하다 못해 가슴이 아리게까지 만듭니다.

   
 

1권 p319

“그래, 때때로 이런 명문 학교들은 정원사나 구두닦이의 아이들에게 한두 개의 장학금을 제공한단다. 단지 자기들의 훌륭한 정신과 기독교적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야.” 페르민이 말했다. “가난한 이들이 자기들을 해코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부자들을 본받고 싶도록 만드는 거지. 그것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독인데…….”

 
   

 

이렇게도 현명한 남자 ‘페르민’은 주인공 ‘다니엘’에게 여자를 대하는 방법 또한 너무나도 명쾌(?)하게 들려줍니다.

   
 

1권 p214

여자 엉덩이에 손을 대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여자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얼뜨기들이 있지. 초보들이야. 여자의 마음은 속임수를 쓰는 남자의 버릇없는 정신에 도전하는 섬세한 미로지. 만일 네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여자처럼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얻는 게 우선이지. 나머지 것들, 즉 사람으로 하여금 감각과 미덕을 잃게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장은 보너스로 오는 거야.

 
   

 

이는 비단 남자들이 여자들을 사냥할 때만 적용되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만은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저 구절을 꼭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자식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식들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고, 부모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부모처럼, 친구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친구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은 외면한 채,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소유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살이 아무리 복잡해졌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갈등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부대껴 일어나는 것이고 보면은 저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진리를 실천할 수만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제 사회에 나와 조직 생활에 하면서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상을 가지고 꿈을 꾸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 뼈져리게 느끼는 요즈음 이상하게도 원망의 화살을 사회가 아닌 자신에게 쏟아 붓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기를 할퀴는 일이 얼마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무익한 일인지 알면서도 곧잘 자책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민이 다니엘에게 들려준 이 말이 꼭 나를 위한 말같이 들렸습니다.

   
 

2권 p135

“비웃는 게 아냐, 다니엘. 네가 자책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누구라도 네가 힘들 거라고 말할 거야. 넌 아무런 잘못도 안 했어. 인생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질책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단다.”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인생은 자책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니 이왕이면 나를 보듬어주고, 주위 사람들 위로해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꿈만 꾸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꿈마저 없다면 삶은 더욱 초라해지고 삭막해질 것임을 이제야 알 듯도 합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작가 훌리안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작가들이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라면 독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책을 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슴에 절절한 명작으로 기억되진 않을지라도 책 곳곳에 나온 대사들만으로도 오래 기억될 작품일 듯 합니다. 등장 인물들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다들 한 번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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