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내일 - 1차세계대전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아이들의 전쟁 일기
즐라타 필리포빅 지음, 멜라니 첼린저 엮음, 정미영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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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아이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더 꿈꿔야 할 나이에 아이들은 공포를 느끼고, 절망과 슬픔을 맛본다.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꿈꾸고 즐거워야 할 나이에 가족을 잃고, 굶주림과 상처에 감정이 메말라간다. 모든 것을 누려야 할 나이에 불행과 아픔을 먼저 알아버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빼앗긴 내일>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유태인 대학살,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라크 전쟁 속에 살았던 아이들의 일기를 묶은 책이다. 순진한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적의 죽음도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죽음의 위험이 눈앞에 도사리는데도 희망을 품는 이유는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안네의 일기를 읽었지만, 그때는 숨어 산다는 의미도 몰랐다. 또한, 전쟁과 학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가슴으로 느끼지도 못할 때였다. 그녀가 쓴 일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경악했던가? 하지만, 알면서도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던가.

우리가 단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전쟁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산다는 것은 더 끔찍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 정보화 시대, 물질이 풍족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구 어디에선가는 끔찍하게 살해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꿈을 꾸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계속 되풀이되고, 끝날 줄 모르며 어디선가 시작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일상을 폭탄 테러의 공포에 빼앗겨 버린 시란 젤리코비치, 그녀는 이스라엘인이다. 팔레스타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공포와 누군가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메리 해즈보운 그녀는 팔레스타인이다. 두 나라가 벌이는 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 분쟁 속에서 공포에 떨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공포에 못 이겨 나라를 등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이들이 있다. 개개인에게는 조국과 국가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조국과 국가가 없다는 것은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황당한 상태가 된다. 또한 뿌리에 대한, 나를 형성한 모든 것에 대한 부재. 내 존재가 흔들린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내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일까? 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전쟁을 하면 배부른 이들은 무기상, 검은 거래를 하는 정치인, 권력자들. 전쟁을 하면 배고프고 고통받는 이들은 아이들, 국민, 군인들. 다수의 고통과 소수의 이익을 아무렇지 않게 맞바꾸는 것도 전쟁이다.

클라라 슈왈츠는 2차세계대전 동안 홀로코스트(대학살)가 횡횡했던 그때, 살아남기 위해서 지하실에 숨어 지낸다. 다행히 독일인 벡 씨의 도움으로 그의 집 지하에 다른 유태인들과 숨어 살 수 있었던 그녀는 하루하루 공포에 시달린다. 머리카락이라도 들켰다가는 어디로 끌려가 죽을지 모른다. 히틀러 친위대는 그들의 독재자 히틀러의 뜻을 받들어, 유태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했다. 같은 인간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린 아이의 일기장에는 '사는 게 완전히 지옥이다', '요즘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어서 빨리 자유의 몸이 되게 해 달라고. 이 고통이 막을 내리게 해 달라고. 모두 울었다.', '사람들이 백 살까지 산다 해도 결코 우리가 하루에 겪은 시련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글들이 적혀 있다. 아이의 절망이 뼛속까지 사묻힌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지하실에 숨어 살며 겪어야 했던 것들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에게는 미래를 꿈꿀 여유도 미래를 설계할 생각도 없다. 단지, 그곳에서 탈출해 나가기만을, 전쟁이 끝나서 맑은 공기만을 마실 수 있기만을 바란다.

전쟁은 많은 이에게 고통을 낳는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아무렇지 않게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은 길을 걷다 죽기도 하고, 물을 마시다가 죽기도 한다. 공부하다가도 죽는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이 예정되었다는 듯이. 우리는 안다. 알면서도 또 전쟁을 시작한다. 그 웃기지도 않은 평화의 이유로 말이다. 평화롭게 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은 겪어본 자만이 안다. 제3자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꿈꿀 수 있는 내일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은 소중한 것이다.

이 아이들의 일기 속에는, 전쟁을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며 이미 일어난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의 죽음도 슬퍼하는 아이들의 눈이 있다. 결국, 적은 적이 아니어도 될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모두가 적을 만들 뿐이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일기가 왜 세상에 퍼지고 있는가? 그것은 전쟁을 막으려는 그들의 바람이며,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들의 아우성이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전쟁 속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온전히 행복할 내일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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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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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생님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우유를 다 마셨으면 차례대로 자기 번호가 적힌 케이스에 종이팩을 갖다놓고 자리에 앉아요. 다들 마신 것 같군요. '종업식 날까지 우유야?' 라는 소리도 들리던데 우유 시간도 오늘로 끝입니다. 고생 많았어요. '내년에는 없나?' 없습니다. ....(후략).....' 으로 시작되며, 교사직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사건은 이미 일어났다. 그리고 범인도 알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일이 전개된다는 것일까? 범인을 찾아가던 추리 방법은 이미 식상해진지 오래다. 작가들은 그 이상을 이야기하려 한다.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전도자.
성직자는 선생님의 독백, 순교자는 학생 B를 좋아했던 학급 반장, 자애자는 학생 B의 엄마, 구도자는 학생 B의 이야기, 신봉자는 학생 A의 이야기, 전도자는 다시 선생님.
각각의 이야기에 주체가 바뀐다. 그 주체를 기준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삶의 과정 등 인물에 대한 이해를 이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사건이 있고, 또 다른 변수가 작용한다. 

선생님의 고백으로 모두가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겪는다. 의도한 고백으로 모두가 상처를 받는다. 사건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아이를 잃은 선생님의 복수는 심리전을 방불케 한다. 범인 학생 A와 B. 죽어버린 선생님의 딸, 사라져버린 선생님. 담임 선생님 아이를 죽게 한 사람이 같은 반에 있다는 걸 알게 된 학생들은 동요한다. 잔인하고 냉정한 성격의 A는 태연하게 학교를 나오고, B는 집에 틀어박혀 또 다른 증오를 키운다. 그들은 하나의 사건에 이리저리 얽혀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한 학급의 아이들을 가장 큰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선생님이 고백 시작 전 아이들에게 먹였던 '우유'였다. 그 우유에는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고, 자신의 아이가 죽게 된 이야기와 범인들에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으로 범인들에게 먹인 우유에 '아주 특별한' 것이 들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으로 또 다른 사건들이 일어난다.

새로운 담임이 오게 되고, 명석하고 차갑고 잔인한 A는 여전히 우등생으로 제 자리를 지키며, 아무일 없다는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B는 학교에서 자취를 감춘다. A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학급 반장은 선생님과 함께 매주 B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A는 아이들에게 심한 따돌림을 받게 되고, 집단 따돌림에 관여하지 않았던 반장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받게 된다. 반장과 A는 친구가 된다.

B는 정신적으로 병약해져 간다. 진짜가 아닐지도 모르는 진실에 몰두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 찾아오는 새로운 담임도 싫고, 반장도 부담스럽다. 엄마의 행동도 싫다. 엄마는 자신을 이해하는 척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느낀다. 학교에서 B가 두드러지지 않고, 다른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학교에 항의를 하는 건 B의 엄마다. 그 때문에 B는 고통스러웠다. 이번에 일어난 의도된 살인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고 있지만, 덮고 넘어가려는 것은 엄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대하는 엄마가 B는 무겁다. B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엄마를 죽게 한다.

B의 엄마의 죽음 뒤에는 감추어진 것이 있다. 그것은 B의 엄마 일기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B의 엄마의 죽음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녀의 뒤틀린 자애가 낱낱이 드러난다.

명석하고 잔인한 A. 그는 엄마를 신봉한다. 엄마의 명석한 두뇌, 유명한 대학에 교수로 살 수도 있었던 엄마. 엄마는 그녀의 신세를 한탄하며 A를 매질했고, A에게 자신의 뇌를 물려받았으니 똑똑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신봉하고 살았던 A는 엄마에게 주목받고 싶어 잔인한 계획을 세운다. 엄마는 자신 곁을 떠났지만, 언제든 A가 필요할 때 나타나겠다고 했다. A는 엄마가 나타나게 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결국 살인을 엄마와 만날 수 있는 무대로 삼는다.

스토리 사이사이 흔적들을 잘 뒤져야 한다. 어디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선생님의 고백으로 작은 진동이 길고 넓게 퍼져 나간다. 한 아이가 계획했던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너무 큰 사건이 되어버리고, 자취를 감추고 떠났던 선생님은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내내 어떤 조종을 하고 있었다. 자식이 죽었다는 상실감, 깨끗하게 떠난 듯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복수는 계속 되고 있었다. A에게 불쑥 나타난 선생님은 다시 고백을 시작한다. 그 고백은 첫 번째 고백보다 더 잔인하다.

누구의 탓일까? 과연 선생님의 복수는 정당한 것일까? 부모의 맹목적인 관심과 사랑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부모의 방치와 학대는 또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고백>은 끝나고도 많은 의문을 남긴다. A의 잔인함, B의 소심함,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과 잔혹함, 학생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의무를 중시하는 선생님, 무조건 자기 아이가 잘났으면 하는 부모의 사랑, 자식이 잘못해도 모든 걸 감싸주려 하는 부모의 사랑, 자신이 선택한 삶을 아이 탓으로 돌리는 부모, 선생님의 의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유기적으로 얽혀있고, 꼬여있으나 그 출발점은 찾을 수 없다. 이 살인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각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지만, 하지만 과연? 이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물은 <고백>을 시작한다. 자신의 입장에 서서 고백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의 입장에만 서서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도, 어른도, 고백을 하지만 자신의 입장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자신의 입장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고백들. <고백>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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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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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서경식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었다. 그리고 다시 서경식이다.
7월 9일 울산 출장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이 그림 한 장이 <고뇌의 원근법>을 쓴 작가와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심정을 다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내 몸으로 전해졌다.


오토 딕스, 여성반신상, 1926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은 이미 그의 다른 책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다루고 있다. <고뇌의 원근법>에서는 그들을 깊이, 더 깊게 다루고 있다. 그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는 그림에 담긴 고뇌와 슬픔과 아픔을 읽어내려 했다. 아니,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다.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서경식은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을 누구도 아닌 한국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그 이유는 이랬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본 미술 - 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
왜 내가 본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2년이라는 짧은 한국 체류기간 중에 내가 볼 수 있었던 작품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단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문제 제기 차원에서 굳이 말한다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일부는 예외라 할 수 있으나, 내가 본 한에서 민중미술운동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미 역사화되었으며, 그 맥락이 현재도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미술에서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그것도 미술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미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대다수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공유하고 있던 통념으로서 미의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미의식을 개척해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 대 서양'이라는 안이한 도식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이 그런 것처럼 한국의 근대미술도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라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한 사보에 한 유명한 작가의 미술 칼럼이 실린다. 마감이 되어 글을 받았는데 <다비드 상>에 관한 글이었다. 담당자는 나체 상태의 <다비드 상>을 보고 기겁을 한 후, 원고 수정을 요구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강경했다. 나는 비굴하게 이해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한 후 다른 원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쾌하셨는지, 한 달만 쉬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지만 결국 내가 딱했던지 다른 원고를 보내주셨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강세황의 자화상>이었다. 담당자가 또 다른 말로 나의 혈압을 올렸다. 그림이 너무 칙칙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좋으나, 그림이 칙칙하니 알록달록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수정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어찌 보면 이 작은 사건이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기 '예쁜' 작품을 원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작가들은 피와 땀을 녹여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대중들은 피와 땀을 알 리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고, 눈에 좋은 것만 흡수하려 한다. 그게 문제다. 회피가 결국, 한국의 근대미술에 서경식이 말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고 자살을 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가 그린 아이리스나 해바라기, 자화상, 예쁘고 사건과 맞닿은 그림들은 많은 화제가 된다. 그의 붓 터치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글을 쓴 화가 고흐, 그가 느꼈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동생에게 부렸던 투정, 뻔뻔함, 고뇌, 상처, 고통.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긴 그림.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 가는 그의 그림 속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내려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냥 천재라고만 부르고 싶고 알고 싶은 고흐만 있다. 우리에겐. 

당신들은 고흐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빈곤 속에서 무명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당신들은 타인의 고뇌에 흥미를 갖지만,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 장 콕토 

이 말은 비단 고흐에게만 적용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고흐가 될 수 있다. 대중에 의해서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서경식은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철저히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역사와 상황 그들이 처했던 개인적인 문제들도 모조리 다 이해하려 한다. 그래야 온전히 그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좋다는 것, 보고 예쁘면 된다는 것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그림들은 겉보기에 예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다. 그냥 아플 뿐이다.
 
전쟁의 잔인함, 폭력, 학살, 고립, 분쟁, 망명. 그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중첩된 그들의 삶을 쫓으며 외면당하고 고통받는 그림 속의 인물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낀다. 
학살과 예술,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의 잔인함을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유대인 학살 장면의 사진이나 여수, 캄보디아 학살 사진은 예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진실이 있다.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그들이 남겼다. 작가들이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떠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맹점이다.

 원근법. 작품을 보는 우리의 눈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시야는 어디까지 일까?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 것일까? 눈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 눈과 작품과의 거리를 넓혀야 한다. 

서경식, 그가 자꾸 깊게 깊게 전하려 한다. 다시 말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게 아니다. 더 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 학살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그림과 이야기는 형태가 달라졌을 뿐,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갖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자연도 되돌아 봐야 한다. 방관이 문제일까? 외면이 문제일까?


결국, "예쁜" 것만 보려 하는 우리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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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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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던가?
알록달록 화려한 서양화보다 먹 끝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게 더 좋아진 것이. 하지만, 확실히 나에게 동양화는 어렵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없으며, 알려 해도 어렵고, 보고 있어도 어렵다. 하지만, 선과 먹, 여백, 공간, 해학이 느껴지는 그림 앞에서는 감동이 느껴진다.
같은 그림도 누가 설명하느냐에 따라 알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 이해하는 것이 달라진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김홍도의 그림을 누군가에게 설명해도, 내가 아는 지식은 짧고 깊지 못하다.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공은 한순간 쌓이는 것은 아니다.


획 하나를 잘 그으면 열 획, 백 획이 다 뛰어나다.
그 일 획속에 바람이 있고 계절이 있고 말로는 다 못 할 사람의 진정이 있다.


 

글도 그렇다. 첫 문장을 잘 써내면 두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 다 뛰어나다. 그 문장 속에는 말로는 다 못 할 사람의 진정이 있다. 오주석 선생님이 바로 그런 글을 쓰신 것 같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은 오주석 선생의 유고 간행위원회에서 발간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잡지 북새통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정리하에 발간한 책이다. 그의 글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나 보다. 그가 죽고도, 그의 책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의 대부분은 알고 있는 그림이었고, 어디에선가 다른 칼럼니스트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 그림들이었다. 알던 그림도 그의 설명을 읽으니 또 다른 눈으로 찬찬히 보게 된다. A4 한 장 분량은 되는 글들일까? 짧은 글 속에 할 이야기만 한다. 그렇다고, 빼거나 쓸데없이 더하는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자신의 상상력까지 동원한다.

 





 

 

 

 

 

 

 

 

 

 

 

 

 

 

 

 

변상벽, <모계영자도>


이 그림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다. 나도 어미여서일까? 암탉과 병아리들의 모습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여쁘기만 하다. 그림에 나타난 병아리들에 대한 설명이나, 암탉에 대한 이야기, 불쑥 솟은 괴석에 숨겨진 장치 등을 이야기하다가 오주석 선생은 그림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다.
  
세상에 닭 그림이 많아도 이렇듯 정감 어린 작품이 또 어디 있으랴? 화가 변상벽은 어쩌면 이토록 살갑게 어머니 사랑을 그렸을까? 나는 상상한다. 이것은 닭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느 집 정 많은 친정 부모가 시집 간 딸을 위해 정성껏 주문해 보낸 그림이라면……. 그 딸아이가 늘 건강하고 병아리처럼 예쁜 자손도 많기를 기원하였다면…….
  
이런 따뜻한 견해를 덧붙이는 것이 그의 글의 묘미다. 그가 받은 감동이, 애잔함이 나에게도 전해져온다. 좋은 작품에는 영혼의 울림이 있다고 말하는 오주석 선생. 그의 글에서도 영혼의 울림이 느껴진다.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그림을 설명해야 했으니, 대충대충 빨리빨리 쓸 수 없었을 터. 온 힘을 다해 영혼을 설명하고자 안간힘을 쓴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해박하고 폭 넓은 설명은 <금강전도>나 <송하맹호도>에서 크게 다가온다. 그림을 그림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림을 숨겨진 지식의 장으로 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크나큰 책임이 뒤따른다. 그 설명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그 정보가 여기저기 퍼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주석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많이 고민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성품과 무게가 느껴지는 책. 우리의 동양화를 맛깔나게 설명한 책.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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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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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슴 속에는 자기만의 '별의 바다'가 있다. 그 '별의 바다'를 찾기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별의 바다'가 아니었고, 못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별의 바다' 속에 있었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계속되는 의문이고 싸움일지 모른다.

무의식에 갇힌 의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과부하가 걸리는 게 정신병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이 있다. 그것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식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은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고, 상처는 있다.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정신'을 피로하게 한다. 이길 수 없는 '정신'을 극복한다면, 세상 속에서 들어오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꿈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 291p 중에서
 
 
정유정의 다른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도 상처받은 아이들의 탈출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상처로부터 탈출을 원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이 여행이라는 명목하에 탈출이 진행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의 탈출은 결국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감당할 수 없기에, 어떤 사실과 어떤 상황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기에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다. 도망가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했을 뿐이다. '고래'를 목격한 그들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 희망을 토대로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기억의 한 조각에서 탈출하고 싶은 수명이와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은 승민이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의식에 갇힌 무의식에서 탈출하고 싶은 수명은 결국 병원에 갇힌다. 아버지에 의한 것이지만, 거부하지는 않는다. 순응한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가위'는 그의 무의식을 깨우는 두려운 물체다. 그 물체에 담긴 그의 기억은 격렬하다. 그것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몸이 갇혀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승민은 가족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갇힌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재산 때문에 갇히게 된다. 필사적으로 탈출을 원한다. 병원으로부터의 탈출. 번번이 좌절되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한다. 깨지고, 갇히고, 약물이 투여되지만 끊임없다.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 그리고 날고 싶다. 

그들의 만남. 수명이가 승민을 바라보는 시선.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탈출. 수명이는 승민이를 통해서 자신을 본다.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는 왜 탈출을 하려고 할까?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의식 속에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그들의 이상한 동거는 결국, 병원 밖의 탈출로 이어진다. 함께, 손을 잡는다.

눈이 어두워지고 있는 승민. 그는 자신의 통로가 닫히기 전에 '별의 바다'로 가고 싶어한다. 수명은 자신이 가고 싶은 '별의 바다'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어렴풋하게 자신도 '별의 바다'로 가고 싶어한다.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계속 이렇게 있는 게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제 진짜로 평생 병원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탈출'을 꿈꿔본다. 그것은 아직도 알 속에 갇혀 괴로워하는 자신을 깨부수고 나가려는 진짜 '탈출'이 된다.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가는 게 두려웠던 수명. 자신의 의식에 갇힌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수명.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게 된 수명.
승민의 날갯짓은 수명의 날갯짓이었고, 승민의 탈출은 수명의 탈출이 되었다. 
수명의 진짜 '탈출'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별의 바다'를 찾기 위해 노력해 보는 것.
"왜 너는 탈출하려고 하지 않느냐?"라는 우울한 수험생의 물음이, 아버지의 죽음이, 승민이 끊임없이 탈출하려는 노력이, 그의 자발적인 행동을 이끌어 냈다.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은 거부와 강제의 공간이다. 억압과 강요 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규칙대로 행동하는 '환자'들은 진짜 '환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들어 앉으려는 노력을 다른 방법으로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게 특출날지도 모르지만, 그게 폐쇄되어 버릴만한 행동은 아니다. 사회에서 어울릴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꿈꿀 수 있을까? 창가에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이, 때때로 주는 약을 받아먹으며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그들의 의식적인 무의식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겨내는 방법을 찾은 두 명의 청춘, 사라져 버린 듯 사라지지 않은 희망.
그들의 '탈출'을 도와준 '갇힌 사람들'
수명과 승민은 그들의 희망이 되었고, 수명은 삶의 희망을 찾았다.

외로움의 벽을 깨고 홀로 설 수 있었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사람들처럼. 수명은 탈출하려 했던 세상으로 돌아왔고, 벗어나려 했던 진실 속에 안착했다. 승민은 하늘 어딘가에서 희망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고 싶어했고, 찾고 싶어했던 '별들의 바다' .
우리가 꿈꾸는 그곳, 내 심장에 박힌 그곳은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는 나의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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