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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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아니, 고쳐 말하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죽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년간 수많은 뉴스가 폭포처럼 넘친다. 그 뉴스 중에는 정말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잔인하고 악독하고 추악스러운 일들도 많다.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고 우리에게 기어이 알리려고 하는 매체들을 이길 수는 없다. 산 속에서 들어가 살지 않는 한 말이다.

  어제는 백명도 넘는 여자들을 성폭행 한 발바리가 잡혔다. 백명도 넘는 여자라, 발바리는 미친 개이며 변태 중에 변태라 할 수있다. 물론, 여자의 입장에서 그런 놈은 죽어도 마땅하다. 아니 백명도 넘는 남자에게 성폭행 당하게 하고 싶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한 남자와 사는 것 자체가 매일 사형 당하는 기분이라는 한 여자.

  강간, 살인으로 잡혀들어와 사형을 선고 받은 한 남자와 유부남이였던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하고 치유 될 수 없는 상처를 갖게 된 한 여자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니 도대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 나를 강간하고도 버젓이 자기 가정 속에서 승승장구 날개 단 듯 살아가는 사촌을 경멸하다 못해 자신을 놓아 버릴 정도로 끔찍히 외로워 자살 시도를 세번이나 했건만. 심지어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인간은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칼로 몇번이나 찔러 죽였다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마음을 보듬는단 말인가.

  말이 될 수 없다.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말이 되지 않는 일도 말이 되곤하고, 성립 되지 않는 일도 성립 되곤 한다.

  사형수가 남기고 간 블루노트를 읽게 될 때쯤 이미 그녀는 그를 마음으로 보듬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으니.

  사실 사람들은 어두운 곳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음지를 알게 되면 내가 음지가 될까봐 피하는 것이고, 어두운 곳에서 오래 서 있다보면 내가 더 어두워 질까봐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사형수가 독방에 갇히면 두손을 뒤로 묶고 입만 대고 개처럼 밥을 먹는 다는 것도 몰랐고, 똥 오줌을 바지에 싼 채로 몇 날 며칠을 견뎌야 하는 것도 몰랐다. 인간적인 삶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비인간적인 사람이 비인간적으로 사는 것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 생각밖 속에 있는 사람들, 존재하지만 존재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보듬어주고 회개하게 하는 것, 그런 무의미한 일들을 왜 하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옳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사람이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듯이, 그들이 그렇게 되는데 이유가 있었을 텐데도 우린 그 이유 따위는 관심이 없고 결과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매일 매일 죽도록 맞는 건만 보고 자란 아이가 길을 가는 아이가 참 행복해 보인다고 찔러 죽였다는데 아이가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만 이슈화되고 떠드는 게 우리다. 그런 우리에게는 아무 잘못 없다는 듯 뻔뻔하게 잘도 조잘대는 게 바로 우리이다.

  과정없는 결과는 없다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게 당연하다면서도 누군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 잘못만 가지고 따지는 게 우리이다. 이렇게 모순된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씩씩하고 즐거운 우리이다.

  공지영이 말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것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들에게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를 용서하게 된 그녀는 정녕 행복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비교우위이다. 내가 만드는 비교적 우위에 있는 행복감. 그는 돈이 많고 괜찮은 지위일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도 모른채 그렇게 믿는 것.

  정녕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존재하는 것일까? 얼토당토 않는 일이 자행되어지는 이 세상에서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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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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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문학상 최연소 수상자'라는 문구가 대단하다는 듯 강조되어 있었고 의심반, 호기심반 미리보기를 클릭해 짧게 읽은 소설에선 이상야릇한 문체의 냄새를 풍기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구입하고 나서 제일 먼저 읽게 되었는데 단편 하나하나 마다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일상을 꽤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히 담아내고 있었고 가끔은 소설속 에피소드가 내가 겪었던 일처럼 아주 친근했다. 낯선 듯 친근한.

그게 바로 그녀의 소설들이 입고있는 옷이었던 것 같다. 복잡한 스토리도 아니다.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에 등장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인공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달려라, 아비>

-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영원한 화자>
 
- 이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수만가지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사랑의 인사>

 
유명한 철학자나 학자들이 하는 명언처럼 그녀는 일상적이면서 잠시 눈을 떼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도 염두해두지 않는 것들에 대해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우리 삶속에 당연히 포진해 있으니 알고 있으라는 듯이.

이것은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이다. 그 일상을 우리는 끊임없이 상상해야 한다. 그녀의 소설들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보는 것이 아닌 그 상황속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어쩌면 김애란 그녀는 끊임없이 상상하며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밥을 먹으면서 밥과 반찬이 식탁에 올라오기 까지 만난 사람들을 상상하고 물건을 사면서 그 물건이 만난 것들을 상상하고 스쳐가는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고 그 상상력들이 결국 소설로 나타난게 아닐까 하는 생각.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나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 하나, 아버지.
단편들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녀가 그리는 아버지는 포근하고 따뜻하고 듬직한 아버지가 아니다. 자식을 버리고 무능력한 아버지. 그녀의 소설들에 들어앉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다. 가정에서 가장으로 당당하게 듬직하고 현명한 아버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거역한다. 그녀가 알고있는 아버지는 이것뿐이라는 것처럼 처자식을 버리고 자식을 어딘가에 버리고 도망가고 무능력하게 자식집에 며칠 얹혀있다가 떠나는 그런 아버지를 그린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이 어쩐지 더 불쌍하고 안되고 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괜히 아버지가 그럴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느껴질만큼. 그녀가 그리는 아버지는 반아버지적이면서도 그 행동조차 용서되는 아버지의 색깔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일상적이면서도 낯설고 신중하면서도 사려깊은 이야기인 듯 싶다. 소설속에서 내가 했던 행동들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참 재미난 글 읽기였다. 어쩌면 유치한 신파적이며 구질구질한 사랑이야기 보다는 신선한 일상이야기가 더 낫다 싶다. 통속적인 스토리에 신물이 난 사람에게 추천한다.

김애란의 소설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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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이란 작가의 이름은 이 글을 통해서 처음 접해봅니다. 꼴통님의 좋은 글을 보게 되니 왠지 궁금해 지는 군요. 서점에가서 꼭 한번 찾아 읽어봐야 겠습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뷰티풀 몬스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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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직 담백하게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나는 솔직할지언정 그 모습을 받아들이는 타인은 전혀 솔직한 존재가 아닐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솔직함에 도가 넘치는 자들에게 손가락 질 하고 비난을 마구마구 퍼부어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곤, 자기 자신의 비솔직함에 안솔직함에 흐뭇함을 느끼곤 한다. 그런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솔직함을 갖게 되기란,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서점에서 방황하며 돈키호테를 살 것인가, 포우의 단편집을 싹다그리 묶어놓은 우울과 몽상을 살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며 먹고 싶은 사탕을 절제력없이 주머니에 집어넣는 아이처럼 책을 팔안에 쑤셔넣고 있는 나를 불쌍해 하며 쓰윽 둘러보던 중, 이상한 책 제목을 발견했다.

'뷰티풀 몬스터'

탁정언 선생님은 말씀하셨지. 컨셉이 없는 제목과 컨셉이 없는 글과 컨셉이 없는 제품과 컨셉이 없는 장사와 컨셉이 없는 광고는 끔찍할 뿐이라고... 말도 못할 정도로

이 눈에 확 들어오는 컨셉이 있는 제목에 신기함을 느끼며 무심코 폈을 때, 마침 대중들 사이에서 극과 극의 평을 듣고 있는 낸시 랭을 만나 인터뷰한 글이 있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나한테 호감 있는 사람들만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구요. 시간은 부족하고 인생은 흘러가고 있잖아요. 자기한테 피해를 안 줬는데도 나를 욕하는 건 그들이 다 못나서 그런거예요. 게다가 내 앞에서 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은 다 'Fuck you!" 라구요"

아이러니 하게도 이 구절을 읽고 너무 감동하여 이 책을 그 많은 책들 사이에 덥썩 끼워버리고 말았다.

솔직함으로,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것은 대책없이 자유분방하고 대책없이 말도 안돼 보일지는 모르나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다.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은, 참 잘난 재주를 가졌음에 분명하다. 김경은 그런 재주가 뛰어난 여인네가 아닌가 싶다.

대책없이 솔직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글발에 반하고, 잡학다식함에 반하고 문학과 패션과 철학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반했다. 마음의 경건한 평화를 주는 어여쁜 글도 필요하지만, 나의 사고와 나의 생각을 톡톡 두드려주면서 나의 고집스러움을 밀어낼 만한 글도 필요하다. 그것도 과격하게 말이다.

자기가 좋으면 남들이 싫어도 좋은 것.
남들이 좋아해도 자기가 별로면 절대 좋아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와인 테스팅을 천천히 하고 있는 웨이터에게 "제발 그런 짓 좀 하지마. 그냥 놓고 가라고"를 외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
신문3사가 밀어줬던 이회창이 대선에서 낙방한 것은 하얀 머리를 염색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녀만의 솔직한 생각에 난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수많은 관습과 관념,
지키지 않아도 상관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에 시종일관 이야기 하면서도 패션에서 만큼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어필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만의 원칙일 뿐, 명품을 치장하는 멍청한 짓과 유행을 좇는 어리석은 짓은 참아달라는 그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원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완벽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를 볼 때 김경의 글들을 한번씩 들춰보며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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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잘 가라, 서커스
천운영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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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천운영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강의에서 그녀의 단편 '바늘'이 커리큘럼이었고 그녀의 단편에 흥미를 느낀 나는 단편집을 통째로 다 읽었다. 그 때 그녀의 유일한 단편집 한권이 나를 독특한 세계와 만나게 했던 것 같다. 그녀의 다른 단편집 '명랑'이 나오고 처음으로 장편 '잘가라, 서커스'가 나왔다. 단편집 '명랑'을 읽으면서 그녀가 많이 달라졌구나. 신인 때의 패기 속에 묻혀 있던 치열함과 강렬함이 아니라 잔잔해지면서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장편 '잘가라, 서커스'도 내가 반했던 단편집 '바늘' 때와는 첨예하게 달랐다. 그녀는 '바늘'이란 단편집을 쓸 때 소를 도축하는 것도 배울 만큼 치열하게 자료를 수집했다는 데 이번에도 소설을 위해 많은 것들을 했다는 것을 소설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아픔과 상처를 마음에 묻고 있는 주인공들 속에서 그녀의 상처가 투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삶의 무게를 던지듯이 혹은 사랑하는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희망으로 쇳소리를 내는 나그네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기로 결정한 해화가 나그네를 떠난 건 밤마다 자행되는 강간같은 부부관계도 그녀를 돌돌말아 묶고 자던 전선줄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깊은 상처가 문득 고개를 쳐들고 그녀에게 떠나라고 속삭였을 것이다. 잠시 눈가리고 아웅하려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상처를 두고두고 생각하며 터미널에 앉아 마약 같은 졸음이 몰아칠 때 마다 약 한알을 씹으며 속초로 떠난 그를 중국으로 떠나버린 시동생을 그리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묘기를 부리다 늘어진 전선줄에 봉변을 당해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나그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죽고 동생마저 떠난다 했을 때 중국에서 데려온 색시마저 떠날까봐 문득문득 난폭해지고 하루를 불안하게 살았던 나그네. 잠에서 깨어나 색시가 떠나버린 걸 깨달은 후 돌아오지 않을 그녀를 찾다 찾다 체념해 버리고 끈을 정말로 놓아야 했다. 그 때 나그네의 뱃머리에서 자살은 어쩌면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상처로 얼룩진 나그네의 몸과 마음은 결국 아무도 위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윤호는 형을 데리고 맞선을 보러 중국으로 가 형과 결혼할 여자 후보들과 대면하면서 자신이 밀어내고 싶은 건 형과 엄마를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과 많은 상실감을 맛봐야 했다. 형수에게 불온한 감정을 갖으며 그녀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정작 자신에게 필요했던 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과 엄마가 다 떠나버리고 형수마저 마음으로 죽인 후 그에게 남은 건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던 가족들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지워지지 않을 상처속에 홀로 남은 윤호가 하고 있었던 것들은 서커스였다. 형이 하던 서커스. 현실 속에서 서커스는 윤호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형, 윤호, 해화의 비교적 행복했던 시간들은 사라지고 고통과 상처만이 수면위를 맴돈다. 꽃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엄마가 사라진 후 폐허가 되어버린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혼자만의 상처를 보듬느라 허덕이다가 결국 육체의 죽음, 영혼의 죽음으로 산산히 흩어져 버린다.

즐거움을 주기 위해 한 서커스 안에는 수많은 고통과 상처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 했지만 진실은 숨겨지지 않고 그들의 상처는 있는 그대로 들어난다.

모든 상처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잊는 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일.

어쩌면 우리 모두 상처를 감추기 위해 현실 속에서는 서커스를 벌이고 가슴 속에는 타다 타다 재가 되어버린 마음만 간직하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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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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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와 페밀리레스탕에 가서 과식을 한 후, 걷던 중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나 요즘 다이어트 중인데 요요현상 오겠다. 으아~~"
"응? 요요현상이 뭐야?"
"뭐야! 너 요요현상도 몰라? 넌 다이어트 안해도 된다고 그런말은 몰라도 된다는 거야?"
 
그랬다. 나랑 가장 친구인 그녀는 키 170에 48kg쯤 되는 소위 말해 날씬녀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이어트라는 용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는 여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살을 찌는 것에 집중하고 살았다. 그러니 요요현상이란 말을 모를 수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들은 뜨거운 붐을 타고도 무관심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난 그 날 느꼈다. 친구에게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고 그 에피소드를 떠올린 건 너무 황당한 발상인가?
일년에 한 번쯤 때만 되면 기아체험이나 기아돕기 캠페인을 하곤 한다. 그 때마다 드는 생각은 못먹고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 뒤에 도대체 왜 굶는가. 이렇게 먹을 것이 풍부한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야만 하는가 였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들이 굶어 죽어 간다는 자체에 관심을 갖고, 황당해 했다.
60억 인구가 사는 세상에 120억 인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자원이 생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반대편에선 7초에 1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6분에 1명씩 비타민 A의 부족으로 혹은 썩은 물과의 접촉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 말도 안되는 수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순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픽픽 쓰러져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경제가 발전된다고 줄어드는 수치가 아니다. 기아에 허덕여 죽어가는 이들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늘어가고 있다.
 
기아는 주로 아프리카와 동남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라카는 내전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지원을 스스로가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고, 그 내전으로 인하여 죄 없는 아이들만이 죽어가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상카라 같은 혁명가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서구 세력과 자국의 군벌 세력에 의해 제거된다.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유는, 결국 자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자신들의 이익만 차려대는 서구세력의 합작품이다. 이 책을 지은 장 지글러의 말로는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도 있어야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세력도 있다고 한다. 그 세력이라는 것이 자신들은 배부르고 풍족하여 더는 바랄 것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들은 굶어 죽고, 불평들을 가중시키기만 하는 금융과두지배. 사막화, 삼림파괴, 전쟁, 정치적 무질서, 서구 세력의 이기심
 
사회에서 부를 얻어 축적한 그들은 사회에 자신의 부를 환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죽음에 방관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침묵의 외투를 뒤집어 쓴 것일까? 눈에 보이면 불편하니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에이즈와 환경파괴에는 열을 올리는 우리는 기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에이즈나 환경파괴는 직접적인 내 생활에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와 직결된 문제에는 관심을 갖고 열성을 들이면서 마실 물이 없어서 먹을 식량이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에게는 무관심하다. 그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해도 내겐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이 필요할 때다. 꿈이란 단어도 모른채 죽어가는 아이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느껴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아이들.
한쪽에서는 살을 빼기 위해 먹는 음식을 줄이느라 괴로워하고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열량이라도 얻기 위해 음식을 찾느라 괴로워 한다.
 
우리에게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을 보고 싶어 하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려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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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4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