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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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서경식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었다. 그리고 다시 서경식이다.
7월 9일 울산 출장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이 그림 한 장이 <고뇌의 원근법>을 쓴 작가와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심정을 다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내 몸으로 전해졌다.


오토 딕스, 여성반신상, 1926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은 이미 그의 다른 책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다루고 있다. <고뇌의 원근법>에서는 그들을 깊이, 더 깊게 다루고 있다. 그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는 그림에 담긴 고뇌와 슬픔과 아픔을 읽어내려 했다. 아니,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다.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서경식은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을 누구도 아닌 한국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그 이유는 이랬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본 미술 - 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
왜 내가 본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2년이라는 짧은 한국 체류기간 중에 내가 볼 수 있었던 작품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단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문제 제기 차원에서 굳이 말한다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일부는 예외라 할 수 있으나, 내가 본 한에서 민중미술운동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미 역사화되었으며, 그 맥락이 현재도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미술에서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그것도 미술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미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대다수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공유하고 있던 통념으로서 미의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미의식을 개척해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 대 서양'이라는 안이한 도식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이 그런 것처럼 한국의 근대미술도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라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한 사보에 한 유명한 작가의 미술 칼럼이 실린다. 마감이 되어 글을 받았는데 <다비드 상>에 관한 글이었다. 담당자는 나체 상태의 <다비드 상>을 보고 기겁을 한 후, 원고 수정을 요구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강경했다. 나는 비굴하게 이해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한 후 다른 원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쾌하셨는지, 한 달만 쉬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지만 결국 내가 딱했던지 다른 원고를 보내주셨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강세황의 자화상>이었다. 담당자가 또 다른 말로 나의 혈압을 올렸다. 그림이 너무 칙칙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좋으나, 그림이 칙칙하니 알록달록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수정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어찌 보면 이 작은 사건이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기 '예쁜' 작품을 원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작가들은 피와 땀을 녹여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대중들은 피와 땀을 알 리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고, 눈에 좋은 것만 흡수하려 한다. 그게 문제다. 회피가 결국, 한국의 근대미술에 서경식이 말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고 자살을 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가 그린 아이리스나 해바라기, 자화상, 예쁘고 사건과 맞닿은 그림들은 많은 화제가 된다. 그의 붓 터치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글을 쓴 화가 고흐, 그가 느꼈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동생에게 부렸던 투정, 뻔뻔함, 고뇌, 상처, 고통.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긴 그림.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 가는 그의 그림 속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내려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냥 천재라고만 부르고 싶고 알고 싶은 고흐만 있다. 우리에겐. 

당신들은 고흐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빈곤 속에서 무명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당신들은 타인의 고뇌에 흥미를 갖지만,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 장 콕토 

이 말은 비단 고흐에게만 적용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고흐가 될 수 있다. 대중에 의해서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서경식은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철저히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역사와 상황 그들이 처했던 개인적인 문제들도 모조리 다 이해하려 한다. 그래야 온전히 그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좋다는 것, 보고 예쁘면 된다는 것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그림들은 겉보기에 예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다. 그냥 아플 뿐이다.
 
전쟁의 잔인함, 폭력, 학살, 고립, 분쟁, 망명. 그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중첩된 그들의 삶을 쫓으며 외면당하고 고통받는 그림 속의 인물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낀다. 
학살과 예술,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의 잔인함을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유대인 학살 장면의 사진이나 여수, 캄보디아 학살 사진은 예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진실이 있다.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그들이 남겼다. 작가들이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떠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맹점이다.

 원근법. 작품을 보는 우리의 눈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시야는 어디까지 일까?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 것일까? 눈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 눈과 작품과의 거리를 넓혀야 한다. 

서경식, 그가 자꾸 깊게 깊게 전하려 한다. 다시 말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게 아니다. 더 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 학살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그림과 이야기는 형태가 달라졌을 뿐,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갖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자연도 되돌아 봐야 한다. 방관이 문제일까? 외면이 문제일까?


결국, "예쁜" 것만 보려 하는 우리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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