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건축 뒤집어보기 - 감성과 이성의 경계에서 유럽을 말하다
김정후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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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을 보았다. 왜 국가의 계획에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를 내 놓아야 하는 것이냐는 거였다. 그는, 보기드문 서울 속에 오래된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한옥이 주는 포근함과 정다움을 사랑하며, 그 역사에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역사가 묻어나고, 대대손손 보존해야 할 한옥을 국가는 낡고 허름한 퇴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이니 당장 나가라는 통보를 해 온 것이다. 그 외국인은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으며, 국민이 왜 국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천박한 자본에 밀려 개인의 행복과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존물을 가볍게 치부하는 행태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 뉴스를 보고, 남편과 나는 깊은 공감을 했고, 후진국스러운 국가의 의식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요즘,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는 이와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쉽게 부시고, 쉽게 짓고, 쉽게 바꾼다. 사람의 편의와 행복한 생활의 영위가 아닌 '돈'이라는 가치를 좇아 국가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미래에 닥칠 사회에 끼칠 영향과 파장은 간과하는 것이다. 우선 국가는 '돈'과 '전시 행정'이 중요한 것이다.

요즘, 한강 둔치 곳곳에 퍼진 포크레인과 아무렇게나 파 올린 땅덩어리들을 보고 있자면, 아침 출근길마다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영동대교 너머로 보이는 그 흉물스러운 모습은 누구를 위한 '르네상스'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의 동의를 거친 것인지 알 수없는 무자비한 건설 현장에 서울 시민들의 따뜻했던 휴식처마저 빼앗겨버린 기분이다.
청계천 재건 또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며,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데 용역깡패들에게 쫓겨난 사람들의 행복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서울시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쳐졌고, 힘에 의해 밀려나 어디선가 떠돌고 있다. 결국, 청계천은 썩어가는 '수로'일뿐이고, 한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 되었다.

21세기의 건축은 '재생'이 화두이다. 하지만, '재생'은 무분별한 '개발'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할 것이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각기 다른 의도로 건축물을 만들고, 재건하고,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하나만 보지 않고, 넓게 봤다는 점에서, 그들의 모습은 본받을만 하다.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이라 하여도, 그 속에 '이야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찾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에 등장하는 건물들은 건물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모두 '어떤 이야기'와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국가와 개인과 국민들의 결합으로 완성된 것들이었다.
'건축물' 하나에도 정부의 의식과 시민 의식이 숨어 있으며, 도전과 창의적인 생각이 꽃을 피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에 담긴 복합적인 의미와 건축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역할과 경제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다우닝가 10번지>, <다이애나 추모분수>, <세인트 폴 대성당> 등과 스코틀랜드의 <토버모리>, 웨일즈의 <헤이 온 와이> 이것들의 발상의 전환과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의 결합은 단기간에 발굴하고 개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동의와 정책적인 결합이 잘 이루어져야 보여지는 형태가 아닌가 싶다. 특히 쇠락해 가는 지역의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활성화 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작은 아이디어였다는 것. 그것은 삶의 터전을 모두 뜯어고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시키고 문화를 덧입혀 창출해낸 것이라는 것은 새로웠다. <토버모리>와 <헤이 온 와이>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넓게 보면 <테이트 모던>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벨기에의 <그랑플라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은 어떤가? 사람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자체로도 명소가 된다. 축제를 벌여 사람들의 발을 잡아 끌고, 광장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그곳이 빛나게 한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어떤가. 그 모습에 압도 당하기 충분하고, 건축물 형태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시민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미술관에 갈 수 있는 그 분위기와 곳곳의 배려가 더 매력적이다. 미술관으로 통하는 다리나, 지하철 입구 모두, 미술관으로 가는 통로이다. '사람'이 찾아가기에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편안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유럽의 건축물들은 화려한 플랜카드와 과대 광고의 부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그들의 삶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건축이 없음에도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곳에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취리히'는 화려한 멋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옛 것을 보존하며,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기에 모두가 살고 싶은 그런 도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결국, 건축은 문화이고 예술이며, 사회적인 가치이다.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도시와 건축물에는 결국 인간의 삶과 공존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핵심이 있다.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결국 '사람'이 알아본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뉴타운'이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넘어서, 수백년이 흘렀을 때 그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묻는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의 '보존'보다는 새로운 건물의 '재건'에 열을 올린다. 예술가들이 손떼 묻히고 살았던 집들이 아무렇지 않게 헐린다. '개발'이라는 이익 때문에. 지키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더 이상할 정도다. '남대문 화재사건'은 우리의 의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적'인 것은 사라지고, '따라하기'만 있다. '문화'는 없고 '돈'이 먼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지금 정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는 유럽 건축에 담긴 의미는 물론, 우리나라의 위치와 문화적, 사회적 의식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사람'이 빠진 것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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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모에 - 혼이여 타올라라!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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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이 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가 죽고난 후, 그의 다른 삶을 알게 된다면?
내가 믿고 살았던, 그가 내가 알던 사람과 달랐다면?
생각을 정리할 사이도 없이, 아이들이 유산 분할을 요구하고, 내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나는 전업주부였고, 자립적인 삶을 한 번도 한적이 없는 순종적이고 유약한 여자였다면?

쉰 아홉, 도시카는 이 모든 것을 갑작스레 겪는다. 중년에 찾아 온 혼란, 다정하지 않은 자식들. 뒤이어 알게 된 남편의 불륜. 숨을 쉴수도 없이 평온한 삶에 사건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 갑자기 남편이 죽고나자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고,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사소한 결정도 친구들에게 묻게 되고, 몇 번은 망설인다. 

천천히, 느리지만 분명히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 밥과 빨래, 살림만 하던 그녀가 가출도 해보고, 가출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또 다른 세계, 자신만이 몰랐던 세상에 쉰 아홉이 되어서야 발을 들이는 것이다. 씁쓸함, 슬픔, 놀라움은 도전, 다짐, 당당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가 귀엽다가도 답답해 가슴을 쳤다. 그게 그녀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진데, 나는 왜 이리 답답해지는지. 후훗. 여러가지 삶이 있는데도 말이다.

남편의 애인에게 당당히 맞서고, 자식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을 독하지도 강하지도 않는 뜨뜨미지근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힌다. 서서히 변화하면서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그녀가, 눈물겹게 용감하다.
쉰 아홉이 되어서야 홀로서기를 하는 그녀는, 과거의 어떤 여인들이었겠지. 현실은 냉혹하며 요람처럼 포근하지만은 않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도시코 자신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하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클리나멘(clinamen)', 돌연 발생하는 방향 선회. 남편의 죽음이 그녀에겐 클리나멘이었다.

生이 고착화되고 고정화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우리가 사는 70년이 넘는 시간은, 한가지 길로만 살기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변화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 지 모르는데, 또한 그것을 갈구하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변신도 하고 살아야 재밌지 않을까? 그런면에서 그녀가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고, 혼자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게 된 것에 박수를 보낸다.

혼이여, 불타올라라! 다마모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기에는, 인간은 너무 영악하며 세계는 변화무쌍하다. 
내 인생 끝까지~ 불타오르게 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뜨겁고 멋진 삶일까?

도시코! 당신의 새롭고 변화된 인생을 응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시코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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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 수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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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왜 이리 남자가 눈물이 많아? 눈물이 있는 남자는 멋지지만, 눈물이 많은 남자는 찌질해 보이기도 한다.
허지웅, 그는 왜 그리 눈물이 많은 걸까? 하지만, 그 눈물이 찌질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때가 울어야만 할 때여서인 것 같 같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를 읽을 때는 사변적인 이야기에, 뭐냐 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는. GQ를 때려치든, 여자와 헤어져 자살시도를 하든, 그게 뭐. 그러니까 그게 어떻다는 이야기야? 라고 중얼거렸는데 <큰 사람들의 나라>를 읽고 있자니, 전초전이였군. 이란 생각이 든다. 그를 모르는 나같은 이가, 그를 이해하는 대에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 부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무래도, 그는 자유분방하나 막돼먹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작은 몸집에 큰 생각을 가진 젊은이. 개인적으로 '최민수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는 글이 인상깊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은, 아무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진실로 한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방관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한사람. 
우리가 좀 더 진실을 드려다 보려 한다면, 관심을 갖는다면 지금 일어나는 mb 정부의 행태들이 명백하게 이해될텐데.
사실, 모두 더러운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에, 고개를 돌리기에 우리는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무관심이 가장 큰 적임이 분명한대. 허지웅의 주장을 듣다보니, 정말 별일 아닌 것이 아닌 일들이 별일처럼 묻혀버리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품고 있으니, 정말 그의 말처럼 지금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불끈 들었다.

아, 뭐냐. 이 모순된 시대는.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 정당을 지지하고, 부자 정당은 부자들을 돕는다.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현실을 봐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만 듣고 믿고 따르니,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인지. 산골 시골마을에도 진실이 전해질 수 있다면 허지웅처럼 줄곧 떠들어야 되는 게 아닌 건지.

우리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지는 것 같지만, 미래가 있기에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멍청한 20대인, 증오 대상인 20대인 나도 조금씩 자각하고 있으니, 이러한 혼돈 속에서 눈을 뜨는 20대가 있고, 후발주자인 10대가 있고, 지금을 만든 30대 40대 50대가 있으니 뭐 우리는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더 상처받게 될지라도 한발씩 나아가는 이들이 있으니, 대한민국에 아직 희망은 있다고 본다.

아, 약간 똘끼있고, 어려움 속에서 유쾌함을 찾는 이남자. 그의 대한민국 표류가 더욱 더 빛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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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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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강호순 등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죄책감없이 행동하는 사이코패스. 그들의 죄는, 그들만의 것일까? 사회가 그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방기한 것은 아닐까? 왜면한 것은 아닐까? 우리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르게 자라난다. 상습적으로 맞으며 자란 아이가 분노와 원망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똑같은 행동을 답습하게 되고, 범죄자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아이가 폭력적이 되는 것은 가족과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따져보자면 그들도 사회에서 양상한 피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꽤 오래전에 사놓고 읽지 않았던, 경성기담. 사람들이 알고싶어하는 스캔들과 소소한 사건이 전부겠지라 생각하고, 머리도 식힐겸 열었지만, 그 스캔들 속에 숨겨있는 사회적 병폐와 순환하는 인간들의 속성이 여실히 들어나 있었다. 식민지 시대라는 슬픈 역사적 현실도 한몫해 일어났던 일들은 잠깐의 관심거리와 흥미거리로 읽히기에는 씁쓸한면이 있었다.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 사건,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식민지 시대 속에 미신과 속설이 난무하던 시대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도 일본 고관 부인이란 이유로 묻히게 되었던 사건, 일본 순사가 죽었기 때문에 죄없는 민간인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도 보상을 받지 못했던 사건, 사이비교의 교주가 재산을 강탈하고 여인들을 윤간하고, 살인까지 일삼았던 흉악한 사건.

이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자면, 끔찍하고 어쩌면 이럴수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형태만 달라지고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이 달라졌을 뿐. 지금 이 시대에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과거에도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놀라는 건 그때뿐, 결국 도돌이표처럼 되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2부 스캔들에서 보여진 <박희도 교장의 '여 제자 정조 유린' 사건,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싸움,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 도피 행각',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 사건, 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 사건 모두 하나 하나 뜯어보면, 명망높은 지식인 박희도가 제자의 정조를 유린한 사실이 공개되고 회유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여제자의 거짓된 사생활, 결국 지식인이 성추행을 했다는 진실은 묻히며, 활동을 재기할 수 있도록 주변인들이 도움을 준 행동들.
순종이 사위이며 딸이 황후라는 것으로 수백억의 빚을 지면서도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다가 타국에서 생일 마감한 윤택영.
돈 때문에 싸우는 부부와 그 재산을 지키는 척 빼돌리려는 친척들.
어렵게 뒷바라지한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리고, 사랑에 눈이 멀어 해외로 도피해 돌아온 안기영. 그의 비도덕적인 행태보다 업적에만 관심갖는 사람들.
유부녀를 이혼시키고 부자와 결혼한 후 그가 몰락하자 유학을 떠난 박인덕. 무능한 남편, 그에게 벗어나려는 여인.
스웨덴 왕에게 총애를 받고도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그의 학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결국 콩나물을 파는 여인으로 살다 가난에 못 이겨 죽음을 맞이하는 최영숙.

정리하다보니, 와우 이것도 이시대에서도 아직까지 일어나는 일들이며, 모순된 사회의 모습이다.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결코 나아지지 않은 사회의 모습들이 집약된 스캔들과 사건들.
개인의 잘못으로 덮어씌우고 잊혀지기에는 너무 많은 의미들이 담겨있다. 사회와 사람, 사람과 사회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혼돈 또한 사회가 만든 것이고,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어떤가? 사회에 의해 개인을 만들어 졌고, 그 개인은 사회 안에서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취한 행동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개인의 모습이 아닐까?

개인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사회의 방관적인 태도를 묻고 싶다. 개개인이 만들어낸 사회라는 덩어리가 결국 화살이 되어 나에게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할 때다. 이 악숙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결국, 나부터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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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 이덕무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9
이덕무 지음, 강국주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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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에서 이덕무를 만났다. 또 한 번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이덕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왜 그가 좋았느냐고 묻자면, 우직하고 바보같은 모습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책만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한시나 옛글을 읽다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덕무의 글들은 더더욱 그렇다. 돌베개에서 나온 이덕무 선집에 실린 글들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가난
가장 뛰어난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가장 못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해 감추기도 하고, 남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호소하기도 하고, 그 가난에 그대로 짓눌리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가난에 부림을 당하고 만다. 이보다도 못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다. 

가장 큰 즐거움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 일, 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법, 평생토록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는지.

그의 소박한 마음이 잘 들어난 글들이었다. '돈'이 최우선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경시되는 지금 다시 한 번 되새겨볼만한 말들이었다. 그는 지독히도 가난했다. 구들이 움푹 움푹 파인 집에서 책을 읽으며,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에 손님들이 놀라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책이 전부였고, 책읽기가 그의 낙이었다.
박제가와는 지기였는데, 아홉살이나 어린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덕무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서얼 출신인 그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책을 읽으며 세상의 시름을 잊었고, 책을 읽으며 배고픔을 잊었다. 책을 읽으며 추위와 슬픔조차 잊었다. 그는 정말로 간서치(看書癡)였던 것이다.
하나밖에 모르는 그의 성정을 사랑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그런 그와 우정을 나누며 기쁨을 누리는 이도 있었다.
멀티미디어가 되어야하는 이 시대에 하나밖에 모르는 그가, 바보같지만 우직해서 사랑스럽다.
또한, 그는 유머와 농담도 아는 이였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것
아름답게 솟은 푸른 봉우리와 선명하고 짙은 흰 구름을 한참동안 부러워하다가 한 손에 움켜다 모두 먹어 봤으면 하고 생각했더니 어금니에서 벌써 군침 도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것 중에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이덕무의 상상력이 느껴지는 글이다.
먹을 게 없어서 책을 팔고 서글펐지만, 그는 자신을 위안한다.
진실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요행을 바라는 얄팍한 술책일 뿐이요, 책을 팔아 잠시나마 배부르게 먹고 술이라도 사 마시는 게 도리어 솔직하고 가식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외다. 서글픈 그의 심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글을 읽는 일로 부귀를 얻는 것보다 마음 맞는 지기와 책에 대해 논하는 게 더 좋았던 그는, 가난하긴 했지만, 마음만은 여유롭고 풍요로웠던 사람인 듯하다.

가끔은 짜증이 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사실 이덕무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닌 일들이다. 그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들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부끄럽다.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살고 싶다는 그의 솔직함. 그 발끝을 어떻게 따라갈까 싶지만, 그래도 조금 닮아보고 싶었다.

닮고 싶은 그, 이덕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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