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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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뭐랄까?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혼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성적인 인간을 폭풍같이 변화시키며, 감정적인 제어를 불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사랑은 참으로 어렵다.

학고재 주간 손철주 선생님을 만나서 받은 <D에게 보낸 편지>는 많은 사람이 환상처럼 어렴풋이 느끼는 꿈인,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실재일지도 모르는 두 남녀 간의 부럽디 부러운 사랑이야기다. 아니, 길고 긴 한 남자의 연가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이 둘은 너무도 사랑했던 것 같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아내가 정신적인 협력자이며, 삶의 동반자라면.
아니 나의 배우자가 그런 위치에서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면 삶은 참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운명처럼 만나, 죽는 순간까지 일체가 되어 살 수 있다면, 사는 내내 행복이겠지. 앙드레 고르는 도라를 만나 그랬던 것 같다. 앙드레 고르는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글을 쓰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도라는 인식시키고 또 인식시킨다. 인식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신적인 곤궁을 느껴야 할 때도, 그를 한없이 지지하는 도라가 있어 그는 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도라가 병에 걸리고, 오랜시간 그를 간병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함께했던 앙드레 고르. 그녀없는 삶은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
그녀가 죽고, 자살로 그녀를 따른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없이 그녀를 따를 수 있었던 그의 용기는 사랑의 완성이 아닐까?

단지, 결혼이라는 법제화된 사회적 구속 속에서 아웅다웅하며 서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떠한 이유들 때문에 억지스럽게 묶인 상태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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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
마이라 산토스 페브레스 외 14인 지음,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엮음, 우석균 외 6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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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문학이나 프랑스, 일본, 중국 문학 등은 나름 익숙하게 다가오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접해보기도 어렵고,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15개의 단편을 읽으면서, 얼마나 숨이 찼던지.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 <트로이로, 엘레나여>, <미국의 숙녀들>, <짧은 작별>, <코끼리에 관한 우화>, <스케이트 타는 남자의 침묵> 등은 인상에 남는 단편이었다.

<짧은 작별>이나 <트로이로, 엘레나여>는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기적인 욕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짧은 작별>에서 느껴지는 광기와 폭력, 생존의 욕구는 잔인하다 싶지만, 인간 본성에 숨겨져 있는 이기심을 잔혹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과 <코끼리에 관한 우화>는 신비스럽고 매혹적이었다.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은 소설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향수>에서의 '후각'과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의 '촉각'은 주술처럼 신비로웠다. 단편에서 보여주는 집착과 전문성이 변형되어 나타나는 기이한 행동은, 인간의 전형적인 행태가 아닌가 싶다.

나는 라틴아메리카 단편선을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에 집중하여 읽었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 아는 지식이 부족했고, 그때문에 이해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다른 형태와 전개방식을 발견했고, 캐릭터를 풀어내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눈이 보이는 사람이 손으로 더듬더듬 점자를 읽어나가듯 서투르게 이해하면서도 얻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부족하여 이해되지 않는 단편들도 있었고, 희미하게 이해하는 단편들도 있었다. 글이란 것은, 참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욕망은 참으로 헛된 것같다.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라는 단편집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성과는, '낯선 것들에 다가가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드는데는 나의 노력이 필요하겠다.

2009년 첫 해를 여는 책은, 도전적이고 실험적이었다. 올해는 나에게 그런 해가 되지 않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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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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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의 날것같은 삶을 그대로 토해내는 명랑 고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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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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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can't dance,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

- Emma Goldman

 

혁명은 변화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변화하고자 하는 몸부림.
육체적인 과격함과 정신적 투쟁.
소리없는 투쟁이라 하여도 변화의 시작은 소리없이 이루어 진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에서는 자신들이 투쟁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혁명을 시도해 나갔던 좌파들이 나온다.
사실 생소한 이야기도 있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존레논, 첨바왐바, 피카소, 체 게바라, 쇼스타코비치, 조지오웰, 미야자키 하야오... 등등
게임, SF, 핵커, 인터넷...
문화현상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작은 움직임을 경험했다.
그것이 작은 움직임이라 했을 지라도 혁명의 몸짓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변화의 시도는 아름답다.
올바른 변화는 혁명이 된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수많은 혁명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혁명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모습도
자신이 춤추고자 시도하는 변화와 혁명의 물결이 아닐까?
광고주를 압박하고, 특정당을 해킹하고, 칭찬받을 사람은 칭찬하고..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혁명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싸웠기에, 우린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작은 행동이 미래의 후손에게 혁명이 될 수 있겠지.
칭찬하고 싶다. 우리의 행동을...
좌파들의 상상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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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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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나는,
그림이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림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을 정화시킨다.
고요하게도 말이다.


그림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보고 싶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영화야 보고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지만, 그림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구입을 하지 않으면, 마침 전시가 없다면 직접 보는 것이 힘들다.
책에서 보는 그림과 실제로 보는 그림은 차이가 많다.
작은 책에 큰 그림을 구겨 넣다 보면, 직접 볼 때 보였던 것도 책으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세밀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림은, 그냥 감동이다.
평론가들은 그림에서 기표와 기의를 찾으며 함축적은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눈에 쌍심지를 켜지만, 그림은 그냥 보고 느끼면 된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천천히 그림 읽기>에서는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말 해준다.
차근차근, 조곤조곤 알기 쉽고 선명하게 말이다.
하지만, 작자도 말한다. 그런 저런 이야기들은 다 주관적일 뿐이라고.
결국, 자신이 그 작품에서 무엇을 찾아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맞다. 바로 그거다.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 있는 반면, 재미로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 만든 작품도 있다.
그런 것들은 수많은 사람이 그 작품을 읽어내며 작자도 모르는 의미를 부여해 주곤 한다.
그 의미는 수만 수천가지로 나뉠 수 있으며,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작가의 유년을 쫓아가며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표출을 작품에서 찾아내려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개개인이 공감할 만한 의미를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 심지어 객관적임을 자랑하는 사진도 실은 사진사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찍을 수가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주의'라 부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주관성들 뿐이다. 따라서 화가가 자기 세계관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니라."

135p 중에서

 

이 대목은 <천천히 그림 읽기>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또 다른 언어로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을 탐구하는 학자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관람자 보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림에 관해 잘 알고 있는 화가와 그 의미를 부여하는 관람자.
어떤 게 그 그림의 전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림을 잘 느끼고자 하는데 수많은 지식보다는,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렇게 위대하다고 말하는 피카소의 전시회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실망을 느꼈고,
르네 마그리트의 엉뚱한 그림에서 감동을 느꼈다.
김환기 작가의 아기 그림에서 진한 모성애를 느꼈고, 롭스의 악마적인 그림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더 자세히 파고들고 싶다면, 그건 보는 이의 몫일 것.

 
<천천히 그림 읽기>는 그 몫을 알고 싶게 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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