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건축 뒤집어보기 - 감성과 이성의 경계에서 유럽을 말하다
김정후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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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을 보았다. 왜 국가의 계획에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를 내 놓아야 하는 것이냐는 거였다. 그는, 보기드문 서울 속에 오래된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한옥이 주는 포근함과 정다움을 사랑하며, 그 역사에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역사가 묻어나고, 대대손손 보존해야 할 한옥을 국가는 낡고 허름한 퇴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이니 당장 나가라는 통보를 해 온 것이다. 그 외국인은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으며, 국민이 왜 국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천박한 자본에 밀려 개인의 행복과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존물을 가볍게 치부하는 행태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 뉴스를 보고, 남편과 나는 깊은 공감을 했고, 후진국스러운 국가의 의식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요즘,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는 이와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쉽게 부시고, 쉽게 짓고, 쉽게 바꾼다. 사람의 편의와 행복한 생활의 영위가 아닌 '돈'이라는 가치를 좇아 국가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미래에 닥칠 사회에 끼칠 영향과 파장은 간과하는 것이다. 우선 국가는 '돈'과 '전시 행정'이 중요한 것이다.

요즘, 한강 둔치 곳곳에 퍼진 포크레인과 아무렇게나 파 올린 땅덩어리들을 보고 있자면, 아침 출근길마다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영동대교 너머로 보이는 그 흉물스러운 모습은 누구를 위한 '르네상스'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의 동의를 거친 것인지 알 수없는 무자비한 건설 현장에 서울 시민들의 따뜻했던 휴식처마저 빼앗겨버린 기분이다.
청계천 재건 또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며,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데 용역깡패들에게 쫓겨난 사람들의 행복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서울시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쳐졌고, 힘에 의해 밀려나 어디선가 떠돌고 있다. 결국, 청계천은 썩어가는 '수로'일뿐이고, 한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 되었다.

21세기의 건축은 '재생'이 화두이다. 하지만, '재생'은 무분별한 '개발'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할 것이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각기 다른 의도로 건축물을 만들고, 재건하고,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하나만 보지 않고, 넓게 봤다는 점에서, 그들의 모습은 본받을만 하다.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이라 하여도, 그 속에 '이야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찾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에 등장하는 건물들은 건물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모두 '어떤 이야기'와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국가와 개인과 국민들의 결합으로 완성된 것들이었다.
'건축물' 하나에도 정부의 의식과 시민 의식이 숨어 있으며, 도전과 창의적인 생각이 꽃을 피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에 담긴 복합적인 의미와 건축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역할과 경제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다우닝가 10번지>, <다이애나 추모분수>, <세인트 폴 대성당> 등과 스코틀랜드의 <토버모리>, 웨일즈의 <헤이 온 와이> 이것들의 발상의 전환과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의 결합은 단기간에 발굴하고 개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동의와 정책적인 결합이 잘 이루어져야 보여지는 형태가 아닌가 싶다. 특히 쇠락해 가는 지역의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활성화 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작은 아이디어였다는 것. 그것은 삶의 터전을 모두 뜯어고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시키고 문화를 덧입혀 창출해낸 것이라는 것은 새로웠다. <토버모리>와 <헤이 온 와이>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넓게 보면 <테이트 모던>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벨기에의 <그랑플라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은 어떤가? 사람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자체로도 명소가 된다. 축제를 벌여 사람들의 발을 잡아 끌고, 광장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그곳이 빛나게 한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어떤가. 그 모습에 압도 당하기 충분하고, 건축물 형태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시민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미술관에 갈 수 있는 그 분위기와 곳곳의 배려가 더 매력적이다. 미술관으로 통하는 다리나, 지하철 입구 모두, 미술관으로 가는 통로이다. '사람'이 찾아가기에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편안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유럽의 건축물들은 화려한 플랜카드와 과대 광고의 부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그들의 삶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건축이 없음에도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곳에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취리히'는 화려한 멋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옛 것을 보존하며,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기에 모두가 살고 싶은 그런 도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결국, 건축은 문화이고 예술이며, 사회적인 가치이다.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도시와 건축물에는 결국 인간의 삶과 공존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핵심이 있다.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결국 '사람'이 알아본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뉴타운'이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넘어서, 수백년이 흘렀을 때 그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묻는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의 '보존'보다는 새로운 건물의 '재건'에 열을 올린다. 예술가들이 손떼 묻히고 살았던 집들이 아무렇지 않게 헐린다. '개발'이라는 이익 때문에. 지키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더 이상할 정도다. '남대문 화재사건'은 우리의 의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적'인 것은 사라지고, '따라하기'만 있다. '문화'는 없고 '돈'이 먼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지금 정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는 유럽 건축에 담긴 의미는 물론, 우리나라의 위치와 문화적, 사회적 의식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사람'이 빠진 것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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