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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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뿌리란 무엇일까? 그 뿌리를 찾기 위해 역사를 뒤지고, 한 번도 밟지 못한 조국을 그리워하고, 끝은 꼭 뿌리의 끝이 있는 그곳에 묻히길 바란다. 외지에 나와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조차 고향을 그리워하고 산란기 연어들처럼 회귀하길 바라며, 늙고 힘이 없어졌을 때 고향에 뿌리를 두고 생을 마감하길 바란다. 인간에게 뿌리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며,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노스텔지아이다.

서경식, 그는 왜 디아스포라가 된 사람들의 흔적을 밟았는가? 자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동병상련을 느끼기 위해서?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소수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원해서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었고, 그를 위해 그의 뿌리인 조국은 힘써야 했다. 그의 정신적인 상처, 그것은 문화, 언어, 인종 모든 것이 뒤섞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언제나 의문을 가져야 하는 피로함이다. 그 피로함 뒤에는 처절함과 슬픔,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얽혀 뿌리에 관한 근원적일 질문을 다시 하게 되는 그로 돌아온다. 존재에 대한 의문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그것은 다수자들은 알 수 없는 그만의 짐이다.

이 책에서 그는 디아스포라의 행적을 따라다닌다.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에서 생각한 것들과 그 도시에 유영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흔적들. 그는 한시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는 못 살겠다는 사람처럼 망명자들, 추방당한 자들의 흔적을 찾고 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굴레가 그를 옭아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가 아니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사회적인 위치를, 마음의 상흔을, 고독함을, 외로움을, 한 민족이라는 우리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그리고 알려 하지 않는다. 관심 두지 않는다. 그건, 그들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디아스포라인 '재일조선인'은 외롭다. 민족이 외면하고 국가가 외면한다. '경계인' 그들은 경계인이 되어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뿌리를 뻗고 속 편하게 살 수 없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며 조선인이지만, 일본 국적이 없는 상태로 일본에서 살아가며 한국 국적을 갖고 모든 것이 감시 태세이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상태.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진 채 살아간다. 

조선이 분단되고 '북한', '남한'이 되면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재일조선인들은 '조선'이라는 민족은 하나인데 선택을 강요당해야 했다.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다수자들의 횡포는 소리없이 폭력적이었다. 소수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다수자들의 입장에서 결정을 내린다. '흑' 아니면 '백'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제11항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르크스가 말했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들의 삶은 얼마만큼 바뀌었을까?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 오는 것일까? 자꾸 그의 마음이 내게 전해진다.

식민지배와 전쟁이 많은 디아스포라를 만들었다. 그들은 세계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자신들의 존재와 뿌리 정체성에 관해 끊임없는 의문을 던졌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고도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 :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 프리모 레비와 독일에 적을 두고 있었던 유대인 장 아메리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존엄에 대한 모멸감, 폭력적인 강요를 잊을 수 없어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걷어낼 수 없어서 그들은 존재의 소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 수 없다. 디아스포라들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압박, 그 고독을. 그 누구도.

서경식은 그들의 행적을 밟으며, 고통과 아픔을 읽는다. 그도 디아스포라이기에 가능하다. 그도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의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하이드파크 위로 희미한 달이 걸려 있다. 지금 이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면...... 그런 생각이 깜빡거리며 점멸한다.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이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가족이라고 해야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부양해야 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형제나 친구들은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까. 그렇다고 해도 죽음은 늦고 이른 차이는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피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지금이면 안 되는가.
(......)
외국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 있기에 평소 막연히 느끼고 있던 생각들이 한층 뚜렷이 다가오는 것뿐이다. 그런 감정의 모습을 나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이유는 잘 생각해보면 결국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다.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걸 안다면 뛰어내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쓸쓸한 디아스포라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슬프다. 너무 슬프다. 그 혼자 짊어져야하는 모든 것이, 다른 디아스포라가 느꼈던 감정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중에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도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라는 것이 금세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 것 같은 위기와 표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 망명자는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하고 쾌할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다수의 '당연함'은 다수의 집단에 속하지 못한 '소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다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다수의 타인'에게 꿀리고 싶지 않은 서글픈 욕망이 된다. 진짜 일본인이 아니므로, 일본인처럼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재일조선인'은 껍데기는 '일본인'으로 살 수 있지만, 그 뿌리를 바꿀 수 없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선택을 하곤 한다.

서경식의 두 형은 정치범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한국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형들의 옥살이도 그의 존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나 민주화 항쟁이 있었던 광주를 찾은 그는 많은 것을 회상하게 된다. '동백림 사건'으로 연행되었다가 독일로 돌아가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의 쓸쓸한 죽음을 생각하며 정치권력의 비열함과 잔혹함을 다시 한 번 되씹는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났던 디아스포라들의 작품, 그들의 작품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서경식.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들의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TV 프로그램 촬영차 브뤼셀을 방문했던 그는 브렌동크 요새에 방문한다. 유대인들의 강금과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 총살하기 위한 말뚝과 무릎을 으스러뜨리기 위한 고문 도구, 희생자들이 '실존의 절멸'을 느꼈던 곳. 그곳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볼 수 있다. 난민이 된 유대인들, 핍박받고 고통받은 후, 떠돌아야 했던 그들의 모습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예술가, 지성인, 작가 누구 하나도 자신의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갈구했던 뿌리들은 그들에게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었지만, 모든 짐들은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답뿐이었다. 답답함, 누구도 주지 못하는 시원한 해답. 그것을 찾기 위해 떠돈다. 언제나 이방인. 언제나 소수자. 못 견디게 외로운 존재.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영하는 상태. 그의 시선은 언제쯤 자리를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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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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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진정 이성적인 것일까? 과학에 맹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뜨겁게 끓어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과학을 이벤트성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 어떤 사건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통찰력있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언론에 이끌려, 하나의 문제로, 단면적이고 단편적인 시선으로 보는 우리의 모습. '과학적'이라는 말에 홀려 '이성적'이 되지 못한 문명의 관객들은 바로 우리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다이어트 방식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광고에 열광하며, 값비싼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덜컥 홀려버리고도 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정상적'인 체중을 가진 이도, '비만'을 만들어버리는 모호한 그 '과학적 기준'이 진짜인 것처럼 비판적 사고 전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가 먼저 튀어나간다.

'성형'으로 이루어지는 정형화된 美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사고와 불합리한 시스템은 애써 외면한다. 나를 '성형'해주는 이는 '의사'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의사'는 신이 아닐 것인데, 그 '의사'가 행하는 의료행위는 모든 것이 완벽할 것이라는 믿음이 앞서나가는 것이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일반화 되어가고,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과학'이라고 믿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비판의식도, 아무런 성찰도 없이 말이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모두 이벤트였다. 물론, 조류독감과 광우병 공포까지도 말이다.줄기세포에 감춰진 이면, 우주인 이벤트에 숨겨진 정치적 효과, 봉사와 감동으로 본질이 흐려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는 결국 과학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철저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우리가 진정 원한 '과학'은 무엇일까? 되묻게 된다.

'과학적 열광'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집단적인 열광은 위험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조류 독감으로 죽는 사람보다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외면한채 다른 확률에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이익을 창출하는 이들의 배를 불려주는 게 옳은 일일까? '과학'이라는 명목하에 '인체의 신비전'에 아이들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남들이 하기에, 남들이 열광하기에, 남들이 좋다기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포장될라치면, 다른 것보다 100배 1000배쯤 더 열광한다.

비단, 과학뿐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 예술, 문학. 어떠한 사건. 그 이면에 감추려하는, 감추어진 것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내 다른 시선으로 봐야하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반성과 성찰없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 <문명의 관객>은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어도 제대로 믿으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학'이 '이성'으로 포장되어, 본질을 흐릴 수 있으니,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 본질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많은 정보를 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도 전에 흡수되고 만다. 그 '흡수'의 방식이 바뀔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말이다. 멈추어버린 뇌는 슬프다. 작동하는 뇌에서 우리는, 진정한 정보와 올바른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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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숄 지음, 이재경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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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시절, 한스 숄, 조피 숄, 잉겔 숄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한 정부가 우리나라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가난에 시달렸기 때문이지."

아버지는 이어서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시대를 겪어왔는지 한번  살펴보자. 처음엔 전쟁, 그리고 곧 전후의 인플레와 극심한 빈곤으로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를 메우게 됐단다. 그리고 원래 사람이란, 아무런 희망도 바랄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면 나약해지기 마련인데, 누군가 감언이설로 장래를 약속한다면 속아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 약속을 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실업자를 구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도 핵심을 따져보려 하지 않았단다. 히틀러가 실업을 어떻게 몰아냈는가를 말이다. 그가 일으킨 것은 바로 전쟁 산업이었다. 곳곳에 병영을 만들고...... 너희들 이런 종류의 산업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니? 그는 전쟁 산업이 아닌 평화 산업을 지향하는 노선을 취했허야만 했어. 실업자를 없앤다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야. 하지만 우리는 결코 먹이만 던져 주면 좋아서 만족하는 짐승이 아니지 않니? 물질적인 보장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단다. 우리는 최소한 개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냐? 그런데 여기에 문제점을 갖고 있는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어떻게 존경을 받을 수가 있겠니.... 우리가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바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신념의 보장이란다."


나치와 히틀러에 강력하게 저항한 한스 숄, 조피 숄 그리고 그들과 같은 활동을 했던 '백장미단'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수세적 저항으로만 일관했을 뿐인데 '저항' 자체가 금기되었던 시절에는 '저항' 자체만으로도 사형이 될 수 있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들이 고민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은 국가와 자유와 민족을 위한 명분이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국가와 독재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국민을 존중하라. 국민을 속이지 말고, 진실되게 행동하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국가는 그들이 두려웠던 것이고, 그들의 행보가 속고 있는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 역시 우민한 독재자는 시대를 넘나들어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인가. 이명박 정부 또한 비슷한 행동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대로인데. 백장미단의 활동과 정부가 대처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들의 희생이 히틀러가 무너지게 된 것에 작은 불씨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어떠한 저항도 헛된 것은 없다.

우리는 침묵을 거부한다.
우리는 바로 당신들의 양심이다.
백장미를 따라 분연히 떨쳐 일어나자!


독일 국민에게 독재 정권을 자각하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체제를 부정하자고 했던 백장미단. 촛불을 들었던 우리 모두가 백장미단이었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국가의 간섭이 심해지고, 부당함이 심해지면서 피부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나치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백장미단의 편지에 노자(老子)의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국가의 통치작용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만 국민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작용이 뚜렷하게 부각될 때에는 국민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아! 진실로 행복은 연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연민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질서는 무질서에 의해 유린되었고, 선은 악에 의해서 유린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오래 전부터 일상적으로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해 성인(聖人)이란 모가 났지만 남을 찌르지는 않는다. 그는 똑바로 서 있지만 결코 가파르지 않다. 그는 밝지만 결코 빛을 발하지 않는다.
국가를 지배해 자신의 의지대로 자기 세계의 국가를 건설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자들이 자기 목표를 한번도 달성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 자체가 그들의 전부인 것이다.
국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有機體)와도 같다. 진실로 국가는 창조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와 국가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국가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앞으로 전진한다. 또 다른 자는 그들을 뒤쫓아간다. 어떤 자는 따뜻함을 느끼고 어떤 자는 차가움을 느낀다. 어떤 자는 강하고 또 어떤 자는 약하다. 어떤 자는 만족을 얻고 또 다른 자들은 실망한다.
그리하여 성인들은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으며 불손하지 않고, 그리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


아! 우리 시대에 어떤 성인이 나타나 국가의 작용이 제대로 되게 할 것인가.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며, 자꾸 우리나라가 처한 시점과 국가의 대표로 서 있을 뿐인 그를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 시대에도 벌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이 죽었고,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그 끝을 한스 숄과, 조피 숄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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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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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수유 + 너머> 추장 고병권 씨. 고추장께서 여기저기 기고한 글이 모여 책이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벼르고 있다가 이제야 읽게 된 이 책. 고추장님의 생각과 생활이, 공부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생각까지 좌지우지 하셨던 이 분. 쉽고, 즐겁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이 책은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책이다.
냇물에 돌을 던지면, 멀리 멀리 물이 퍼지듯 누군가의 말과 이야기와 생각이, 읽는 이에게 파장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까? 고추장님은 그런 일에 너무도 능숙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이 먼저 행동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 공동체를 생각하는 지식인, 고추장님은 그런 분이다.

이 책의 1부는 우리가 논의해야 할 쟁점 키워드가 펼쳐진다. 철학자의 말을 빌어, 어떤 책의 말을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 역사, 사실, 여성, 기술, 화폐, 선물, 사회, 인권, 국가, 혁명. 짧은 글 안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독서량. 공부와 시간이 결합되어 만들어 놓은 산물. 그리고 2부가 펼쳐진다. 기본에 대해 이야기가 끝나자,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수자의 이야기들. 장애인, 비정규직, 농민, 학벌, 교육, 지식인, 전쟁 등 그는 아픈 곳을 마구 마구 찌른다.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는다. 그 속에서 아프지 않은 자 없고, 그 안에서 반성하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그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사유를 하지 않은 채 힘을 가진 소수자들 뜻대로 하는 사회에 다시 한번 분노케 한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굳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 자유란 선택이기보다는 능력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자유가 술에 대한 예속가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알고 있다. 코뮨이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도록 만든다. - 21p <자유>

 
   

베르그손이 말하는 자유는 행위 이전이나 이후가 아닌, 행위 자체의 독특한 색깔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라는 말, 그 행위 자체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게 올바른 자유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기형적인 많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공기처럼 소중하지만, 소중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자유라는 기본을 논의하며 하나 하나 우리의 모습을 파헤쳐 간다. 이후 전개되는 1부의 주제들은 2부를 밀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부의 이야기들은 모두 1부의 주제들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고, 1부에서 말했던 고추장님의 생각들은 2부의 사회적 현상,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공동체 바깥에 존재하는 적나라한 인간은 현실적으로 인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권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행위를 의미 있게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이란 그런 공동체에 살아갈 권리, 그래서 공동체가 부여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노예제가 반인권적인 것도 자유의 권리를 부인당해서라기 보다는(전시[戰時]에는 시민들도 자유를 일정하게 박탈당한다) 자유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right to have right),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데 있다(<전체주의의 기원>). 그렇게 보면 인권이란 동어반복이거나('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로서 말할 때) 무의미한 것('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로 말할 때)이다.    - 92p <인권>에 대한 고추장의 독서 메모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인권이랑 얽혀 있다. 인권을 생각할 때 벌어지는 싸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조직은 권력 세력과 국민들을 사이에 두고 인권 싸움을 벌인다. 겉으로는 인권을 잘 지켜주고 있는 듯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엔 힘없는 소수의 인권을 박탈하고, 소수의 힘있는 인권(?)을 탐욕스러운 방법으로 지켜준다. 그것은 국가라는 상부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있는 소수이기 때문이 아닐까?

2부를 열자마자 시작되었던 최옥란 씨의 이야기. 마음이 아팠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투쟁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우리의 무관심 속에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였다.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 수 있다는 국가의 단정 속에. 그녀는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아내야 했다. 그녀는 힘없는 소수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교육받지 못했으며, 신체장애를 가졌으며,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겼으며, 이혼한 사람이며, 여성이었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인권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국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사회가 약자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존재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묻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과 요구 속에서 여러 '가난한 자들'의 이름과 요구들을 봅니다. 그리고 맑스가 '전부를 가진 자'들에 맞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서 미래를 찾았던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왜 미래를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가난한 자들은 빈곤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 사회가 바뀌어야 할 이유이자 요구이고 투쟁인 것입니다. 나는 네그리와 하트가 '가난한 자'라는 모든 시대 '공통의 이름' 속에서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토대를 발견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 115p <최옥란을 기억하며>

 
   

농민이 외면 당하는 세상, 농민을 외면하는 국가,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게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학벌이 최고인 사회, 학연과 지연으로 굴러가는 사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과연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권력 안에 속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공부라면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을 무시하기 위해서,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공부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은 사유를 하고 인식을 한다는 것인데, 신성한 대학에서조차 사유와 인식과 반성과 성찰보다는 탐욕과 권력을 잡으려는 발버둥이 만연한다. 과연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미네르바가 백수에 전문대를 나온 이었다고 밝혀졌을 때, 우리가 그려놓은 환상에서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는 그 이상한 순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괴물 한 두마리쯤은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워지는 순간. 마음이 아파오는 순간. 바로 내 안의 괴물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삶으로부터 분리된 지식인, 현장에서 떨어져 나온 지식인.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지식인의 존재조건인 양 말해왔다. 플라톤은 "평화롭고 한가하게 담론을 생산하는 자들"과 "물시계의 흐르는 물에 쫓기면서 언제나 긴급하게 이야기하는 자들"을 대비시켰는데, 전자만이 철학하는 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삶에 쫓기는 자들은 차분히 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쿨'(school)dml djdnjsdls '스콜레'(schole)가 '여가'라는 뜻을 가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물질적 이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여유. 그것이 학문의 전제인 것이다.
그러나 삶에 쫓기지 않을 여유, 물질적 이해관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게 아니다.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거리두기'는 사실상 특정 계층, 특정 계급 이상에게만 가능하다. 먹고사는 것이 다급한 빈곤층에서 지식인이 배출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지식인이 물질적 이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계급이나 계층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말할 수 잇다고 말하지만, 그런 지식인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으로부터만 충원된다면, 그렇게 그 지식의 보편성을 믿을 수 있을까. - 155p <지식인, 그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서>
 
   

지식인은 비대해졌고, 기형적으로 탄생되기 시작했다. 고소득층 자녀들이, 강남 자녀들이 명문대에 가는 비율이 비이상적으로 높아졌고, 그 명문대는 미국 대학의 학부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가 되어 돌아온 소위 지식인들은 미국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사유하지 않고, 흡수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성찰하지 않고, 입력된 대로 내뱉는 이들 속에서 복제되어 가는 지식인들을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개념과 의미로 보듬어줄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고 지식인일까? 교육과 지식이라고 포장된 욕심과 탐욕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수치스러움만 쌓아가고 있다. 그 반성, 분명 필요한 것이다.

그가 속한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를 하는 연구원들이 만들어가는 꼬뮌이다. 그는 그곳에서 추장으로, 공부하며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살고 있다. 용기, 그의 삶은 용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궁리'를 하고, '공부다운 공부'를 하며 함께 살아가는 연구공간. 그들의 그런 노력이 있기에 안 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되어 가는 거겠지. 고추장! 그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하는, 그래서 이 국가에 살고 있는 모두가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와 행복'을 보장받으며, 올바른 '역사'를 쌓아가는데 꼭 필요한 시선이다. 신속히 사라지는 기억의 끈을 꽉 붙잡고, 이 책 안의 의미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보고, 경계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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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4:55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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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민주주의 하고 있는가? 하루하루 사는데 급급하지 않고 사유하고 사는가? 문제를 문제로 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잠시 멈췄던, 정신이 행동이 번쩍 눈을 뜨게 하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말빨 끝내주는 논객들이 교육, 사회, 여성문제, 복지, 정책 등에 대해 밀도 높은 이야기로 생각의 창을 열어준다.  
 
   
 

 강대한 문명은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그 과신이 빚어낸 오만 때문에, 그 오만에 취하고 젖어,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 문제를 보지 않기로 하는 것은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 이상의 중병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소극적 무지라면, 문제를 보지 않고 위기에 눈 감는 것은 무의식적 선택과 집단적 의지에 의한 무지, 곧 적극적 무지이다.  
(.... 중략......) 
문제를 보지 않으려는 그 적극적 기피의 경향이 한 사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사회가 '사유의 정지' 현상을 보일 때이다. 사회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거부하며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를 증오하는 것이 사유의 정지이다. 사유의 정지는 사회를 실패의 위기에 빠뜨리는 위험한 병리적 현상이다. 
- 13p <여는 글, 도정일>

 
   

 강대하지도 않은 문명이 오만에 취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는 것. 문제를 보지 않곡 적극적으로 기피하는, 사유의 정지가 리더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면. 이러한 상황이 민주주의를 다시 봐야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까지 끌고 갔다. 힘을 합해 방향을 바꾸어야 하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기에. 지도자가 괴물이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각계에서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민의 동의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와 국가기관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권력을 등에 얹고 괴물이 되어 국민을 공격하는 비이상적인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위기는, 우리의 저항으로 나타나고 있고 우리의 문제 의식은 또 다른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총체적인 현상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말하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얼마 전 'CEO 대통령' 담론이 유행하면서 이 담론에 의해 정부가 교체되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이 담론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는 국가 이론에 비추어보면 성립할 수 없는 언어조합이에요. 철학에서는 이를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oin이라고 하죠. 특정한 언어 조합이나 행동 조합이 출발부터 모순을 갖는 겁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모순은 더욱 심화되지요. 대통령의 어원은 사회자, 조정자, 균형자란 뜻이에요. 여러 대립되는 측면과 이익, 주장들 앞에 서서 조정한다는 뜻으로, 사회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여러 견해와 이익을 조정하고 균형을 잡는 공공성의 표상이에요.
그런데 CEO란 바로 사익의 표상입니다. CEO는 사적 기업의 최고 경영자로서 경쟁사를 제압하고 시장을 얼마나 더 확대할 것이며 얼마나 더 많은 이윤을 낼 것인가를 목적으로 하죠. 그래서 CEO의 역할을 키우면 키울수록 대통령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요. 반대로 공공성의 표상으로서 대통령의 역할을 하려면 할수록 CEO의 역할은 줄어들어야 되죠. 결국, 'CEO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모순일뿐더러, 국가와 공공성의 표상인 대통령을 모욕하는 말이죠. 그런데도 우리의 보수 언론과 지식인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쓰고 있어요. 
- 82p <민주공화국에서 국가를 다시 생각하다 - 박명림>

 
   


괴물 지도자를 만들어 낸 것은 결국, 우리였다. 이런 모순되고 말도 안 되는 위치를 설정하고 그에 부응한 것도 우리였다. 모순된 지도자를 만들어 놓고, 우리는 세월을 역행하는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도 흔들릴 정도의 사건들. 그리고 지금 우린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된다. 사적인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를 뽑아 놨으니,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려 하지 않고,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만 더 불려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내린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 속에서 고통받는 시민들, 괴물의 존재를 물리치고 다시 바로 설 수 있는 방법. 우리의 권리를 제대로 행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논의와 관심이 이루어져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끝없는 시도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강자에 대한 동일시와 욕망, 약자 또한 약하다고 인식되는 가치에 대한 경멸과 혐오. 저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 집단 심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작은 현상 중 하나가 부자는 철저히 계급 투표, '유물론 투표'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욕망 투표'를 한다는 겁니다. 사회적 약자가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일시하고 싶은 사람에게 투표하면, 양극화는 약자의 동의 아래 철저히 합리화되겠죠. 저는 이걸 전반적으로 탈식민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누구의 시각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라는 거예요. 자신을 억압하는 자의 시선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커녕 개인의 행복도 불가능하죠.
- 127p <국가에 대한 명예훼손? 이 시대 소수자가 만들어지는 방식 - 정희진>

 
   

 강자를 뽑아 놓으면, 우리도 강자처럼 될 거라는 어리석은 욕망. 그러한 욕망이 결국은 강자만 배불리는 지도자를 탄생시켰다. 내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자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런 모순된 행동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어느 나라와 우리 나라를 비교하며, 왜 우리는 그런 복지를 하지 못하냐,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냐. 그것은 결국,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 더 좋은 사회를 원하고, 더 좋은 삶을 원하면서 행동은 반대로 하고 있으니. 약자,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강자의 사고방식과 똑같이 행동하니. 결국, 우리는 먼 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위치를 재정비하는 사유. 생각해볼 문제다. 

기형적인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의 현상들, 변화. 그 속에서 고통받는 20대, 10대. 결국,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쌓아가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살 그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닥친 하나만 생각한다. 20대에게는 40평 짜리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허구가 되고, 아이를 못 나을 세상이 되고, 꿈보다는 안정이 중요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외연적 속도와 내포적 속도가 있답니다. 쉽게 말해서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넘어갈 때는 외연적 속도를 내포적 속도로, 기계적 속도를 전기적 속도로, 눈에 보이는 신체의 속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상상력의 속도로 바꿔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전前 시대에 묶여 있다는 겁니다. 그나마 지난 두 정권에서는 앞으로 가는 듯 했는데,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고 있으니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걱정됩니다. 
정치로 넘어가게 되면 산업혁명 당시와 정보화 혁명 당시의 인터페이스는 다릅니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원리가 달라요. 산업혁명 당시에는 기계가 상수입니다. (... 중략...) 그런데 정보화 혁명 시대가 되면 인간이 상수예요. 인간에 맞춰서 기계를 디자인해요. 햅틱폰 같은 촉각 인터페이스가 바로 그 예입니다. 인간을 상수로 놓는 거거든요. 즉 정보화 시대에는 전 국민이 권력자를 따라 배우는 게 아니라 거꾸로 권력자가 국민한테 맞춰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자면 민주주의를 더 확대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거꾸로 가고 있잖아요. 이른바 법치를 주장하지만, 자신들은 법을 전혀 안 지켜요.  
- 265p <미디어 패러다임에 서서 민주주의를 기획하다 - 진중권>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이 세상을 바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 자신들이 생각해온 것들만 맞다고 생각하는 것. 국민의 말은 귀기울이지 않고, 척도 안 하는 것. 민주주의의 파괴를 자신들이 먼저 하고 있는 것. 이 사회 현상에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안타깝고 분하고 화가 나지만, 결국 끊임없는 논의와 노력, 작은 행동이 모여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셀의 말처럼,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이 중심이 되어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가 전 세계를 다녀보니까 나라마다 자본주의의 색깔이 다르더라고요. 또 민주주의의 온도도 달라요. 북유럽과 영국이 다르고, 영국과 프랑스가 달라요. 프랑스와 미국이 또 다르고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나마 이렇게라도 온 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기 계신 여러분이 피땀을 흘렸기 때문이죠. 세상에 공짜는 없거든요. 노력하는 만큼 얻는 게 아닐까요? - 375p <창조적 시민들, 대안을 실천하다 - 박원순>

 
   


이 책의 결론이다. 많은 이야기와 분석, 비판, 문제제기, 해결해 나갈 방법, 행동하라는 설득 등 각성을 부르는 말들이 있었다. 행동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박원순의 유하면서도 명쾌한 결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하는 만큼 얻을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논의가, 그리고 우리의 저항의 흔적들은 우리를 여기에 서 있게 했다. 이쯤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것도, 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우리만의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모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귀기울이고 듣고, 마음을 다잡는 것도 결국, 우리가 원하는 색을 가진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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