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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7년 1월
평점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추장 고병권 씨. 고추장께서 여기저기 기고한 글이 모여 책이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벼르고 있다가 이제야 읽게 된 이 책. 고추장님의 생각과 생활이, 공부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생각까지 좌지우지 하셨던 이 분. 쉽고, 즐겁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이 책은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책이다.
냇물에 돌을 던지면, 멀리 멀리 물이 퍼지듯 누군가의 말과 이야기와 생각이, 읽는 이에게 파장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까? 고추장님은 그런 일에 너무도 능숙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이 먼저 행동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 공동체를 생각하는 지식인, 고추장님은 그런 분이다.
이 책의 1부는 우리가 논의해야 할 쟁점 키워드가 펼쳐진다. 철학자의 말을 빌어, 어떤 책의 말을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 역사, 사실, 여성, 기술, 화폐, 선물, 사회, 인권, 국가, 혁명. 짧은 글 안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독서량. 공부와 시간이 결합되어 만들어 놓은 산물. 그리고 2부가 펼쳐진다. 기본에 대해 이야기가 끝나자,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수자의 이야기들. 장애인, 비정규직, 농민, 학벌, 교육, 지식인, 전쟁 등 그는 아픈 곳을 마구 마구 찌른다.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는다. 그 속에서 아프지 않은 자 없고, 그 안에서 반성하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그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사유를 하지 않은 채 힘을 가진 소수자들 뜻대로 하는 사회에 다시 한번 분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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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굳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 자유란 선택이기보다는 능력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자유가 술에 대한 예속가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알고 있다. 코뮨이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도록 만든다. - 21p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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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이 말하는 자유는 행위 이전이나 이후가 아닌, 행위 자체의 독특한 색깔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라는 말, 그 행위 자체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게 올바른 자유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기형적인 많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공기처럼 소중하지만, 소중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자유라는 기본을 논의하며 하나 하나 우리의 모습을 파헤쳐 간다. 이후 전개되는 1부의 주제들은 2부를 밀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부의 이야기들은 모두 1부의 주제들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고, 1부에서 말했던 고추장님의 생각들은 2부의 사회적 현상,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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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동체 바깥에 존재하는 적나라한 인간은 현실적으로 인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권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행위를 의미 있게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이란 그런 공동체에 살아갈 권리, 그래서 공동체가 부여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노예제가 반인권적인 것도 자유의 권리를 부인당해서라기 보다는(전시[戰時]에는 시민들도 자유를 일정하게 박탈당한다) 자유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right to have right),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데 있다(<전체주의의 기원>). 그렇게 보면 인권이란 동어반복이거나('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로서 말할 때) 무의미한 것('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로 말할 때)이다. - 92p <인권>에 대한 고추장의 독서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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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인권이랑 얽혀 있다. 인권을 생각할 때 벌어지는 싸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조직은 권력 세력과 국민들을 사이에 두고 인권 싸움을 벌인다. 겉으로는 인권을 잘 지켜주고 있는 듯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엔 힘없는 소수의 인권을 박탈하고, 소수의 힘있는 인권(?)을 탐욕스러운 방법으로 지켜준다. 그것은 국가라는 상부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있는 소수이기 때문이 아닐까?
2부를 열자마자 시작되었던 최옥란 씨의 이야기. 마음이 아팠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투쟁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우리의 무관심 속에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였다.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 수 있다는 국가의 단정 속에. 그녀는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아내야 했다. 그녀는 힘없는 소수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교육받지 못했으며, 신체장애를 가졌으며,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겼으며, 이혼한 사람이며, 여성이었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인권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국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사회가 약자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존재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묻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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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이름과 요구 속에서 여러 '가난한 자들'의 이름과 요구들을 봅니다. 그리고 맑스가 '전부를 가진 자'들에 맞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서 미래를 찾았던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왜 미래를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가난한 자들은 빈곤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 사회가 바뀌어야 할 이유이자 요구이고 투쟁인 것입니다. 나는 네그리와 하트가 '가난한 자'라는 모든 시대 '공통의 이름' 속에서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토대를 발견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 115p <최옥란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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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외면 당하는 세상, 농민을 외면하는 국가,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게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학벌이 최고인 사회, 학연과 지연으로 굴러가는 사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과연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권력 안에 속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공부라면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을 무시하기 위해서,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공부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은 사유를 하고 인식을 한다는 것인데, 신성한 대학에서조차 사유와 인식과 반성과 성찰보다는 탐욕과 권력을 잡으려는 발버둥이 만연한다. 과연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미네르바가 백수에 전문대를 나온 이었다고 밝혀졌을 때, 우리가 그려놓은 환상에서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는 그 이상한 순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괴물 한 두마리쯤은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워지는 순간. 마음이 아파오는 순간. 바로 내 안의 괴물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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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부터 분리된 지식인, 현장에서 떨어져 나온 지식인.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지식인의 존재조건인 양 말해왔다. 플라톤은 "평화롭고 한가하게 담론을 생산하는 자들"과 "물시계의 흐르는 물에 쫓기면서 언제나 긴급하게 이야기하는 자들"을 대비시켰는데, 전자만이 철학하는 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삶에 쫓기는 자들은 차분히 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쿨'(school)dml djdnjsdls '스콜레'(schole)가 '여가'라는 뜻을 가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물질적 이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여유. 그것이 학문의 전제인 것이다.
그러나 삶에 쫓기지 않을 여유, 물질적 이해관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게 아니다.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거리두기'는 사실상 특정 계층, 특정 계급 이상에게만 가능하다. 먹고사는 것이 다급한 빈곤층에서 지식인이 배출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지식인이 물질적 이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계급이나 계층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말할 수 잇다고 말하지만, 그런 지식인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으로부터만 충원된다면, 그렇게 그 지식의 보편성을 믿을 수 있을까. - 155p <지식인, 그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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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비대해졌고, 기형적으로 탄생되기 시작했다. 고소득층 자녀들이, 강남 자녀들이 명문대에 가는 비율이 비이상적으로 높아졌고, 그 명문대는 미국 대학의 학부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가 되어 돌아온 소위 지식인들은 미국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사유하지 않고, 흡수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성찰하지 않고, 입력된 대로 내뱉는 이들 속에서 복제되어 가는 지식인들을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개념과 의미로 보듬어줄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고 지식인일까? 교육과 지식이라고 포장된 욕심과 탐욕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수치스러움만 쌓아가고 있다. 그 반성, 분명 필요한 것이다.
그가 속한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를 하는 연구원들이 만들어가는 꼬뮌이다. 그는 그곳에서 추장으로, 공부하며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살고 있다. 용기, 그의 삶은 용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궁리'를 하고, '공부다운 공부'를 하며 함께 살아가는 연구공간. 그들의 그런 노력이 있기에 안 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되어 가는 거겠지. 고추장! 그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하는, 그래서 이 국가에 살고 있는 모두가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와 행복'을 보장받으며, 올바른 '역사'를 쌓아가는데 꼭 필요한 시선이다. 신속히 사라지는 기억의 끈을 꽉 붙잡고, 이 책 안의 의미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보고, 경계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