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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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에게 한 다스는 몇 개입니까?" 일반 상식에서 한 다스는 12개다. 그러나 마녀의 세계에서는 13개가 한 다스라고 한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13은 불길한 숫자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좋은 숫자에 해당한다. 이처럼, 같은 숫자라도 각자의 상식과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녀다. 하지만, 그것을 모를 뿐이다. 마리 여사의 <마녀의 한 다스>를 읽으며 이번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에 갔을 때 느끼는 생소함과 생경함, 이질감은 문화적 차이와 삶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 그녀가 갔던 나라, 견문들을 모아 세계 속에 있는 개개인들 안에서 느껴지는 '차이'라는 것을 그녀만의 위트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오던 '정의'나 '상식'이, 다른 문화에서 이어온 발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지는 순간, 또 시간이 흐르고 그 문화권 자체가 변화하면서 맥없이 무너져가는 현장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한편, 인간은 지치지도 않고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 헤매는 동물이기도 하다.   - 23p

<마녀의 한 다스>에서는 비교적 세세한 분류로 각 나라에서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 삶, 생각 등을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직업병과 취향은 곳곳에 발현되어 있다. 언제나 그녀가 염두에 두는 것은 말과 맛, 문화.
시작은 그녀가 마녀 집회에 참석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취재차 모스크바에 갔을 때 당시 소련 공산당 청년동맹 기관지에 유능한 기자가 마녀 이야기를 건네며 마녀와의 만남을 주선해준다. 마리는 마녀를 만났지만, 어떤 신비로움이나 특이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자'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 이성적인 판단의 편견에 사로잡혀 기자에게 마녀의 문화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다. 그가 과학부 기자였기에 그녀의 생각은 더 굳건했다. 하지만, 그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마녀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에게 화를 내며 사라졌다. 문화라는 것은 개인이 살아온 '상식'이나 '이성'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 느껴지는 사건이었다.

그 후로 마리는 이 문화의 충돌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단이 있는 풍경들을 이 책에 소개한다. 베를린의 조선인, 이스탄불의 일본인, 바르나의 이란인, 모스크바의 베트남인, 마닐라의 스위스인, 시베리아의 일본인, 나라의 러시아인, 도쿄의 후쿠시마인, 시베리아의 프랑스인, 베니스의 미국인, 아프리카의 일본인 등등.
나라와 나라는 물론, 지역과 지역의 문화와 방식을 대비하며 우리가 살아온 시간과 상식, 문화들이 다른 곳에 놓여 있을 때는 얼마나 이질적인 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이해와 관용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만들어낸다. 

사실, 식수가 절실한 아프리카인에게 '에비앙'이냐 '삼다수'냐가 중요할까? 몽골의 유목민들에게 '아파트'냐 '정원 딸린 집'이냐가 중요할까? 한국인에게 '일본인'은 괜히 라이벌인 것처럼. 우리가 전부라고 믿는 문화는 사실 작은 부분임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산다는 것이 아닐까? 나의 공간에서 내가 보내는 시간이 전부라고 믿는 이가 얼마나 많은 편견에 휩싸여 좁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새삼, 그녀의 풍부한 인간관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든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한 상상력, 이런 사고가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지. 게다가 이런 정신의 소유자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면 그야말로 큰 비극이다.  - 145p

그녀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하다. 문화의 이해와 관용. 올바른 역사적 지식과 사회적 배경에 관한 지식이 한 나라의 분위기, 삶,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결국, 우리는 개인과 개인이 맞서도 결국 타인일 수 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마녀로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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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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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시, 마리 여사야!"
그녀의 눈으로 보는 문화는 날카로움과 명랑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그녀의 이론은 기분 좋게 이해된다. 다시, 요네하라 마리다. <미식견문록>, <미녀냐 추녀냐>, <마녀의 한 다스>, <문화편력기>까지. 아직 읽지 않은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올가의 반어법>도 기대가 된다. 이런 여인이라면 모두가 친해지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러시아에서의 생활, 그리고 러시아 통역사라는 경력. 그것은 그녀의 삶에 폭넓은 경험과 가르침을 준 것 같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마리 여사는 무엇하나 그냥 놓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러시아에 대한 애정도 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문학적 수준도 느낄 수 있는데, 그 문학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따분하다거나 어렵지 않다는 게 즐겁다. 

* '친척인가 친구인가 이웃인가'에서는 러시와의 문화와 그 이웃하는 나라의 문화, 혹은 비슷한 문화인 듯 보이지만 다른 시각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리 여사는 러시아 속담이나 문화와 일본의 문화, 혹은 러시아와 이웃하는 나라들의 문화를 비교해서 분석하길 좋아하는데 그녀의 지식을 따라가다 보면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러시아와 유럽 등의 국가들의 문화를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동양인의 눈으로 해석되는 문화편력기는 시각의 차이를 좁혀준달까? 이해하기 쉽게 해준달까? 생소한 문화에 맞장구칠 수 있게 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옛이야기의 교훈에서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일하지 않고 응석받이로 자란 계모의 친딸들은 제멋대로이고 바보에 심술궂고 오만하지만, 일하면서 자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는 상냥하고 슬기로워 모두에게 사랑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며 현명한 어머니라면, 전통적으로 의붓자식을 괴롭히던 방법으로 아이를 키워야 잘 성장할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 워낙 천연덕스럽고 명랑하여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배형의 전통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온 사형 이야기를 예로 들어 프랑스의 사형제도에 대문호들이 충격받았던 것을 알려준다. 당시 러시아는 사형은 없고 유배형에 그치고 있었는데 이 훌륭한 전통에 수해를 보았던 레닌과 스탈린은 살아남아 수백만 명을 처형했던 걸 상기시키며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간단하고 명료하며 위트 있게 진행한다는 것이다. 한 줄의 문장에 숨겨진 그녀의 생각을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못해 숨은그림 찾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요리와 먹이의 경계선'은 <미식견문록> II 라고 할까? 미식가인 그녀의 영원한 관심사, 음식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폴레옹이 아낀 요리사에서는 닭고기에 얽힌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민담처럼 재미있게 풀어낸다. 버섯으로 보는 인생관에서는 '맛없는 버섯은 무난한 인생과 같고 맛있는 버섯은 생명의 위험이라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맛없는 버섯을 먹는 것보다 독버섯을 먹게 될지도 모르지만 맛있는 버섯을 찾아 떠나겠다는 굳은 결의를 밝힌다. 기내식 생각에서는 기내식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당차게 밝히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깨갱 하는 마리 여사는 유쾌하다 못해 귀엽다.

* '심장에 털이 나 있는 이유'는 <미녀냐 추녀냐> II 라고 할 수 있는데, 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문화와 일본 문화, 혹은 말에 대한 문화를 전한다. o/x 모드의 언어 중추에서는 프라하에서 일본으로 왔을 때 봤던 시험문제에 관해 이야기 한다. 논문, 구술시험으로 시험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프라하에서와 달리 일본으로 돌아오니 (  )형 문제나 o/x 문제를 풀어야 했다. 시험의 '부품'이 된 듯한 치욕을 느낀다. 마리 여사는 획일적인 교육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토해낸다.
애매한 상황에 놓였을 때 통역하는 방법, 단어와 말에 숨겨진 의미, 통역을 하면서 애로 사항 등 언어에 대한 그녀의 분석을 읽을 수 있다. 국제 정세와 전쟁의 안타까움을 간결하게 말한 말의 힘이나 신문에 대한 새로운 견해 낡은 틀, 새소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녀의 새로운 시각은 신선하여 짧은 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독서에도 TPO도 크게 공감했는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읽히는 책은 모두 다르다는 생각은 나 역시 느끼고 있었던 생각이다.

*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기까지의 거리'는 현시대의 문화적 양상을 에피소드로 구성해 들려준다. 뭐라고 부르시나요? 에서는 언어 습관에 대해 설명하며 일본인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말, 진화와 퇴화는 세트로 에서는 원숭이의 영특한 식재료 능력을 설명하며 인간의 식재료 식별 능력의 무지함과 방관, 좀비 같은 젊은이들에서는 생기 없는 무표정한 젊은이들 앞에서 강의하는 괴로움, 모자람의 효용에서는 풍요와 넉넉함이 얼마나 많은 낭비를 가져오고, 사람을 좀먹는지를 이야기한다. 가장 좋은 교사에서는 아이를 망치는 법은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몽땅 사주는 것이라는 루소의 말을 인용하며, 아낌없이 주는 교육을 하는 요즘 부모들에게 아쉬움을 토한다.
문화에 대한 생각, 너무 큰 욕망이 실현을 나약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드래건 알렉산드라의 심문'은 오해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가족이야기, 친구이야기, 선생님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경험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맞선남의 비밀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맞선남의 비밀과 그녀를 이해하게 된 후 친구가 된 이야기이다. 맞선남의 프로정신이 황당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지만, 그를 이해하는 그녀의 넓은 마음에 또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나의 실연 회복기에서 그녀의 실연과 하얀 화장지 그리고 친구의 오해가 어이없다 못해 콩트 같다. 결국, 눈물로 젖은 화장지 뭉치를 목련꽃으로 착각한 친구 덕에 마리 여사는 실연에서 회복된다. 드레건 알렉산드라의 심문에서 그녀가 러시아어로 책을 요점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낯선 언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 알렉산드라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느껴진다. 사프란이 남긴 수수께끼에서는 아버지 친구 지압사 M씨가 주었던 사프란을 회상하는 마리 여사를 만날 수 있다. 고가의 사프란을 선뜻 내주셨던 지압사 M씨는 아버지에게 도대체 어떤 신세를 졌던 것일까 궁금해하지만, 그 수수께끼에 담긴 애정과 사랑을 느끼는 마리 여사를 만날 수 있다.
아빠와 엄마, 부모에 대한 오해와 사랑을 담은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내가 마리 여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열린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일본만 편들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사랑하고, 한껏 누릴 줄 아는 마음을 가졌지만, 비판하고 싶은 것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정된 시각으로 사람을 보지 않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녀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심각하지 않다. 그녀만의 위트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상식이 쌓여감을 느낄 수 있다. 시답지 않은 농담만 늘어놓는 칼럼이 아니기에, 그녀를 자꾸 찾게 되는 것 같다.
마리 여사의 명랑한 시선으로 바라본 <문화편력기>는 이번에도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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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 '슬로 라이프'의 제창자 쓰지 신이치가 들려주는
쓰지 신이치 지음, 장석진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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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풍요 속의 행복 빈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단면, 어쩌면 이미 더 이전에 논의되어야 했을 이야기이다. 부강한 나라는 무엇일까?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다. 돈이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인 것일까?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과연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뽑은 '경제 대통령'은 우리의 행복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어느 선에 도달하고 나면,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떠난다. 도시의 생활을 버리고 전원생활을 찾아 떠나기도 하거나, 한적한 나라를 찾아 노후를 보내러 떠난다. 자꾸만 떠난다. 그렇다면, 자꾸만 떠나게 하는 사회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나는 종종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는 천국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대접을 받는다,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다 라고 말하는 게 공공연해졌다. 어린 아이들마저 돈을 벌기 위해 학습 된다. 인생에서 돈은 '절대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떳떳하게 살기 위해 필요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 행복의 수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은 갖을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라가 돈을 많이 벌수록 국민의 행복 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경제학>에서는 시종일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은 개개인의 노력과 희생이다. 경제의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시간 중 대부분을 경제에 내놓아야만 한다. 그런 시간의 희생이 뒤따라야 경제의 성장률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간의 희생이 경제 성장률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성장은 어떤 문제로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희생된 개인의 시간은 돌려받을 수 없다. 

사실, 행복의 조건은 국가의 경제 성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경제 성장은 이미 많은 이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며 이루어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경제 성장을 빌미로 희생된 많은 사람을 기억하라.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최면에 빠져, 희생된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않고 있다.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경제 성장'의 망령은 다시 사람들을 부추긴다. 잠깐, 눈감고 잠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우리 모두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성장'이라는 '발전'이라는 단어 속에 감춰버린 많은 고통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태우거나 건축 자재로 이용하여 집을 짓는다. 이것을 나무의 '발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숲을 벌채하여 길을 닦는 것을 숲의 '발전'이라고 하지 않으며, 호수를 메워 공업단지를 만드는 것을 호수의 '발전'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60년 사이에 이러한 일들이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엄청난 기세로 행해졌다. 자연이 파괴되었을뿐더러 문화가 파괴되고 몇백 년 전부터 내려온 기술이나 음악, 언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도 대개의 경우 '발전'이라고 하는 한마디 말로 정당화되었다.
- 118p

'발전' 때문에 많은 것이 파괴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때문에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문화가 파괴되며, 삶의 터전이 파괴된다. 단적인 예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는 '멧돼지의 공포'는 우리가 '발전'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되돌아온 문제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겼던 '발전' 때문에, 자연이 역습한다. 당장은 행복해 보였지만, 결국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공포가 농촌 경제에 불행과 개인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은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빈곤을 낳는 것, 그것은 바로 자연을 자원으로, 또한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방패로 하여 자연을 언제나 충분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고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을 동원하여 온갖 기술을 낳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테크놀로지들은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사람들에게 한층 심각한 빈곤을 안겨주었다. 즉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보다는 거꾸로 결핍을 만들어 내고 늘려왔던 것이다."
- 인도의 사상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의 말 - 160p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강대국들은 약한 나라의 자원을 착취하고, 심지어 인간의 생명마저도 경시했다. 그들이 그렇게 이루어낸 경제 발전은 권력과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자국의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끝도 없는 욕망은 결국, 만족과 행복을 방해한다. 무엇을 원하느냐가 분명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거대한 덩어리로 합리화되기도 한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선진국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경제 성장과 발전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행복지수
"경제적인 대차대조표 대신 국민들의 행복도를 기준으로 나라의 발전도를 측정하겠다."
-1973년 부탁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국왕 대관식

"국가의 목표나 개인적 만족을 단순한 경제적 성장에서 찾을 수는 없다. GNP는 삼나무 숲의 파괴와 호수의 죽음, 네이팜 탄과 미사일과 핵무기의 생산으로 증가한다. GNP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포함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가치,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와 가르침, 자비나 헌신을 측정하지 않는다. GN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측정한다."
- 1968년 미국, 캔자즈 대학, 로버트 케네디

성장의 희생에 내몰리면서 개인은 시간을 반납하고, 개인의 행복을 반납한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성장일까? 우리의 대통령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겠다고 연일 떠드는데 왜 우리의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을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행복의 경제학>이 말해준다. 쓰지 신이치는 부드럽지만 충격적이게 말한다.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얻기 위해 증거 자료와 다른 이들의 말을 빌려 '성장'이라는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행복의 정의와 왜 우리가 행복을 느끼기 어려운지에 대해 말한다.

'풍요' 의존증에 중독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소비하는 생활에 내몰려 있고, 소비를 하는 것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임을 주입받는다. 경제 발전과 경제 성장은 '소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물리고 물리고 물리고 쳇바퀴 돌듯 멈출 수 없는 것이 '발전'이고 '성장'이며, '풍요'다. 여기서부터 끝. 이만하면 성장했다. 이만하면 발전했으니 그만하자. 라는 것은 없다. 지속적이고 끝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끝없이 반복되는 파괴와 희생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점점 눈을 뜨고 있다. 이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속 가능한 성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은 극히 적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만의 행복을 창조하는 집단도 생겨나고 있다. CC(Cultural Creatives), 자신의 만족감에 무게를 두며 사회적 지위와 부보다는 내면적인 성장과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 시간을 돈보다 중시하며 환경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이미, 우리는 '성장'에 지쳐 있다. '성장'이라는 사슬이 개인의 행복을 좀먹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적극적으로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
젊을 때는 앞만 보며, 돈만 좇아 살아오다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여유와 행복을 찾아 삶의 행로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한 '성장'에 지쳐버린 몸부림이 아닐까? 무엇을 희생에서 얻는 것은 행복이 아닐 것이다. 곧, 내가 희생될 수도 있으니. 

행복이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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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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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아한 거짓말로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고립되게 하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우아한 방관을 정당하다고 합리화한 것은 아닌가요?

이야기는 천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천지는 아침부터 MP3 타령이다. 엄마는 보증금을 올려줘야 할 처지라 애먼 소리 하지 말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타박이다. 이상하다. 천지는 막무가내로 조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천지는 참았고, 착했고, 인내하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언니 만지도 엄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다'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가 털실에 목을 감고 죽어버렸다.
자살이다. 자살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자살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물론 자살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사건만 따지자면 분명 천지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이 아니다.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자살을 택했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진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강요된 자살이다.

자, 이제 진실을 알아야할 시간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만지와 엄마. 그리고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운 직접적 가해자 화연. 진실과는 동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접적 가해자인 미라. 진실로 다가가려고 할수록 물러서는 이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이 아이들도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천지가 죽고, 엄마와 만지는 이사를 한다. 천지가 죽었는데도 엄마와 만지는 표면적으로 명랑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한 맺힌 엄마의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누구보다 고통스럽지만, 만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천지의 죽음, 그 내막에 둘러싸인 진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만지는 내일을 준비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왜 죽었을까?

화연, 그녀의 우아한 거짓말, 아니 잔혹한 거짓말은 천지를 좀먹기 시작한다. 천지의 정신이 감정이 화연에게 휘둘린다. 화연은 지능적으로 천지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천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생일파티는 2시인데 일부러 천지에게만 3시에 오라고 한다. 그리고 천지만 뒤늦게 자장면 한 그릇을 먹게 한다. 천지의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는데도 화연은 천지의 아버지가 자살로 죽은 것처럼 떠든다.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아이들은 '힘'에 의해 조종된다. 화연은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어필한다. 사실 그들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닌 것을 알고, 화연이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 침묵한다. 그것은 '남'의 일이고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천지도 조금씩 달라진다. 자기한테 쩔쩔매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다. 아이들의 반응도 조금씩 바뀐다. 화연은 그 상황이 싫다. 천지는 겉으로는 태연해졌다고 하지만, 아픈 감정들을 이겨낸 것도 치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가 국어 수행평가 발표를 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잡한 말이 뭉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예비 살인자는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명확한 글은 자살을 암시했고, 경고했다. 화연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태연하게 군다. 하지만 천지가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비밀이 있다. 천지와의 또 다른 약속.

만지와 엄마, 천지 그들은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서로에 관해 잘 몰랐다. 천지의 속이 곪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엄마이지만, 딸이 죽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만지는 화연이와 천지가 단짝인 줄만 알았지 화연이가 천지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몰랐다. 만지는 동생의 흔적을 밟아가며 단짝 친구 미란의 동생 미라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로 천지의 고통을 희미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미라도 어쩌면 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미라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무관심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는 행동. 만지는 천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남과 동시에 무관심한 사회와 사람에게 화가 난다. 결국, 지능적인 거짓말과 회피가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화연은 화연대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라기보다는 천지의 죽음에 대한 원망이다. 그것은 또 부모에 대한 분풀이로 표출된다. 변명을 만들고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솔직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해왔던 거짓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화연의 탓은 아닐 것이다.

천지는 다섯 개의 실에 메시지를 남긴다. 실은 결국, 하나다. 엄마, 만지, 화연, 미라,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 천지는 살고 싶다는 흔적을 여기저기 여러 번 남겼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게 슬픈 현실이다. 죽기 전에 들어주는 이 없고, 죽고 나자 들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 모순의 끈, 언제쯤 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 무관심이 어떻게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한 아이의 고민과 근심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실은 자꾸 뒤로 물러나고 조작된 거짓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많이 봐왔다. 학생, 가장, 경제인, 연예인, 심지어 대통령도 자살에 이르렀다. 상황, 소문, 말들이 퍼져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지 봐왔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큰일이며 너무 깊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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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착하지 않으면 어떤가?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 어떤가?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임꺽정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 펼쳐진다. 현대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말이다.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꾸려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든 고미숙 선생님은 임꺽정 무리가 꾸민 공동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이상향과 맞아떨어지는 집단이니 말이다.

고미숙 선생님이 분석한 <임꺽정>은 의적이니 백성을 의롭게 했다는 메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노는 남자들'이 가득한, 하지만 놀기 때문에 구박을 받거나, 생계가 유지 안 되거나 하지 않는 공동체.
일하지 않지만 '배우는' 남자들, 배움의 도를 넘어 '달인'이 되는 사람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배우기 위해 어떤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들. 우정을 어떤 의리보다 중요시하고, 자존심은 최고로 여기며, 가지각색의 사랑과 연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삶과 인생, 이야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곽오주, 봉학이, 배돌석이, 꺽정이 등 개성 있는 캐릭터가 득실대는 청석골에 여자들의 캐릭터도 만만치않다. 운총이는 꺽정이에게 대드는 배포 큰 여인. 중년의 꺽정이가 여기저기 마누라를 만들어 놓고 청석골로 돌아오지 않으니 남편 머리를 끌고 내려온 여인이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여 호랑이의 씨를 말리거나 한집안을 도륙하는 일도 벌어지니 말이다.

소설 <임꺽정>에는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놀면서 공부하면서 먹고 잔치하고, 큰돈을 탐내지 않으며 어울려 산다. 서로의 힘을 빌리고, 재주와 기지를 빌려 위기에서 탈출하고, 못된 놈 혼내주고 목숨을 살린다.

뻔뻔한 배포와 어찌어찌 잘 굴러가는 청석골의 경제, 핏줄로 맺어진 기묘한 네트워크, 돈이 없으면 데릴사위도 좋다라는 뻔뻔한 뚝심.
작은 사회는 시끄럽고 복닥거리지만, 자기들끼리 즐거운 사회를 형성하며 먹고 자고 싸고 얻고 모든 걸 한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길 위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청년 백수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건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참 서글프기 짝이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청년의 통과의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혹은 정규직에 무사히 골인한 뒤에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될 수 있다. 하긴 정년 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가 아닌가. 오컨대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다. 백수-속어이자 비어였던 이 낱말이 바야흐로 당당하게(!)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가족, 집, 사랑과 행복, 자유와 열정, 당연한 감정도 당연한 감정으로 느낄 수 없는 삭막한 시대에 소설 <임꺽정>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심장 뛰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이너리그로 산다고 해도, 결코 불행하고나 모자라지 않다는 메시지를 소설 <임꺽정>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류, 비주류. 누가 나누어 놓은 것인가. 사회가 말하는 주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비주류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면? 그게 더 열정적이고 아름답다면?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달인이 되고 돈도 벌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소설 <임꺽정>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 데릴사위로 들어가 산다고 해도 꿀리지 않는다. 배짱은 두둑하고 자존심은 억수로 세다. 자유는 누릴 만큼 누린다. 규범은 자신들이 만든다. 백수로 살지만, 백수가 아니라면?

위로가 된다. 이 땅에서 타인으로 인해 마이너리그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말이다.
소설 <임꺽정>을 현대에 맞춰 한 해석에, 깔깔거리다가 위로가 된다. 오합지졸 같지만, 스승에 대한 예의는 깍듯하며, 승리의 잔치를 벌여 사기를 올린다. 길 위에서 배워도 달인이 되는 사람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스승복, 공부복은 완전 꽝이고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또한 공부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결국 '백수'라는 말에 공포만 느끼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진짜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사그라지는 청년들에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소설 <꺽정이>를 이야기하며,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느껴진다. 작가는 안타까운 것이다. 미완된 이 이야기에도 이렇게 많은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냐. 재미를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만 있는 것이냐.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다 보니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즐거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사는 고미숙 선생의 유쾌한 이야기가 소설 <임꺽정>을 빌어 전해진다.

책 속에는, 이야기 속에는 정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상상속의 공간, 청석골에서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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