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 이덕무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9
이덕무 지음, 강국주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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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에서 이덕무를 만났다. 또 한 번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이덕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왜 그가 좋았느냐고 묻자면, 우직하고 바보같은 모습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책만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한시나 옛글을 읽다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덕무의 글들은 더더욱 그렇다. 돌베개에서 나온 이덕무 선집에 실린 글들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가난
가장 뛰어난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가장 못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해 감추기도 하고, 남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호소하기도 하고, 그 가난에 그대로 짓눌리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가난에 부림을 당하고 만다. 이보다도 못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다. 

가장 큰 즐거움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 일, 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법, 평생토록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는지.

그의 소박한 마음이 잘 들어난 글들이었다. '돈'이 최우선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경시되는 지금 다시 한 번 되새겨볼만한 말들이었다. 그는 지독히도 가난했다. 구들이 움푹 움푹 파인 집에서 책을 읽으며,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에 손님들이 놀라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책이 전부였고, 책읽기가 그의 낙이었다.
박제가와는 지기였는데, 아홉살이나 어린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덕무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서얼 출신인 그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책을 읽으며 세상의 시름을 잊었고, 책을 읽으며 배고픔을 잊었다. 책을 읽으며 추위와 슬픔조차 잊었다. 그는 정말로 간서치(看書癡)였던 것이다.
하나밖에 모르는 그의 성정을 사랑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그런 그와 우정을 나누며 기쁨을 누리는 이도 있었다.
멀티미디어가 되어야하는 이 시대에 하나밖에 모르는 그가, 바보같지만 우직해서 사랑스럽다.
또한, 그는 유머와 농담도 아는 이였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것
아름답게 솟은 푸른 봉우리와 선명하고 짙은 흰 구름을 한참동안 부러워하다가 한 손에 움켜다 모두 먹어 봤으면 하고 생각했더니 어금니에서 벌써 군침 도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것 중에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이덕무의 상상력이 느껴지는 글이다.
먹을 게 없어서 책을 팔고 서글펐지만, 그는 자신을 위안한다.
진실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요행을 바라는 얄팍한 술책일 뿐이요, 책을 팔아 잠시나마 배부르게 먹고 술이라도 사 마시는 게 도리어 솔직하고 가식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외다. 서글픈 그의 심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글을 읽는 일로 부귀를 얻는 것보다 마음 맞는 지기와 책에 대해 논하는 게 더 좋았던 그는, 가난하긴 했지만, 마음만은 여유롭고 풍요로웠던 사람인 듯하다.

가끔은 짜증이 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사실 이덕무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닌 일들이다. 그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들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부끄럽다.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살고 싶다는 그의 솔직함. 그 발끝을 어떻게 따라갈까 싶지만, 그래도 조금 닮아보고 싶었다.

닮고 싶은 그, 이덕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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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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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다 아는 대망의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그동안의 처절한 몸부림이 점수로 나오는 날. 온갖 스트레스와 억압된 자유와 선택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수치가 정확히 나오는 날. 수능날에는 관공서가 출근 시간을 늦추고, 부모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하루를 보낸다. 수년간 공부한 것들을 종합하고 집중해서 단 한 번에 해내야 한다. 그래야 부모가 원하고 사회가 원하지만, 나도 원하는지 모르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비이상적인 교육열로 아이들이 고통받는 한국은, 아이들이 즐거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하긴, 조금만 다른 시도를 하려고 해도 명문대 못 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는 온갖 비난 속에 시도조차 포기해야 하는 많은 교육자들. 사실, <핀란드 교실 혁명>은 부모들이 읽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뭐 개중 부모들은 잘하는 아이만 열심히 가르치면 되지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 뭐하러 애써서 가르치느냐 하겠지만.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은 핀란드 교육은 한마디로 파격적이다. 강요도, 고함도, 권위도, 억지도 없는 선생님과 함께 소수의 인원이 반을 이루고 자유로운 커리큘럼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공부한다. 아이들은 할 공부를 끝내고 종이접기를 하거나, 수업시간에 뜨개질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잠을 자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학생들이 아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아니다. 그냥 우리 반 학생이다. 선생님은 빨리빨리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참을성 있고 끈기있게 아이들이 혼자 해낼 때까지 기다린다. 선생님은 아이의 공부가 협력자가 될 뿐, 지배자는 아니다.

핀란드의 교육철학은 '격차'를 없애는 것에서 출발한다. "교육의 질이 떨어져서도 안 되고, 아이의 배경이나 출신이 교육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됩니다." 정말 멋진 말이다. 명문대의 학생들이 강남, 고소득자 아이들로 채워지는 우리의 현실을 봤을 때는 말이다. 교육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핀란드.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만 한다면 수업 시간 내내 여자친구만 바라봐도 뭐라 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OECD는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3년마다 PISA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기술과 지식에 대해 정책 지향적인 국제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핀란드의 아이들은 골고루 격차 없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시험도 없고, 학습 진도도 저마다 다르다. 방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선행학습을 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은 명민하며 똘똘하다.

우리의 교육이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내고, 양성하는 교육이고, 탈락자를 골라내는 교육이라면, 핀란드의 교육은 스스로 하는 공부를 지향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느리더라도 상관없다. 교육은 삶의 원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구성주의 교육을 추구하는 핀란드의 교육에서는 '협동의 지식'이 우선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속에서 더욱 충실한 지식을 만들어가는 핀란드 교육. 뜨개질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하지만, 뜨개질 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과 그룹으로 뜨개질을 해서, 어떤 것을 만들기도 한다.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무언가를 만들기로 하고, 서로 나누어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을 정하고 나중에는 작품으로 완성된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협동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내기도 한다. 어려서 어설퍼 보여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협동해서 공부하는 게 핀란드 아이들이다.

또한, 핀란드 교사들은 자율성과 전문적인 권한이 있다. 자신의 반 아이들을 자신의 학습 방법대로 가르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아이들의 스케쥴을 조절한다. 한 반에 2, 3학년이 함께 공부해도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는다. 진도가 빠른 아이는 빠른 아이대로 3학년 수업에 맞춰갈 수 있고, 진도가 느린 3학년은 2학년 학습을 더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가 지진아라고 하지 않고, 빠르다고 우쭐해 하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빨리 알고, 조금 더 느리게 알 뿐 어쨌든 다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학생들과 선생님의 생각이다. 그렇게 되니 교육에서 상호 작용은 활발하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두려워 않는다. 억압된 풍경에서 선생님의 비위를 맞추며 공부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과는 사뭇 비교되는 광경이다. 공부 스트레스도 심한데 선생님의 성격까지 맞추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비뚤어지게 되면 그 이유를 학생에게 돌린다. 사실 아이가 비뚤어진 감정을 갖고,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것에는 어른들이 가장 큰 이유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학창시절, 성격 더러운 선생님에게 별명을 붙이고, 담임 선생님은 '담탱이'라고 비하하며 선생님의 매와 힘에 순응하고 움직일 때가 많았다. 종소리가 나면 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피곤해서 졸기라도 하면 복도행이었다. 수업시간에 내 기분보다는 선생님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고, 혹시 모르는 문제를 풀라고 하지 않을까 창피당하게 될까 봐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게 우리 교실 풍경이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좁은 교실에서 우글우글 수업을 받다 보면, 아이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게 되며 외면하게 된다. 참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학교를 떠난다. 평균에서 이탈하는 게 두려운 부모들은 자식을 다그치고, 모든 게 자식 탓인냥 선생님에게 굽신 된다. 부당한 처우를 받고도 학교에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자식이 혹 다른 피해나 입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가르치고 싶은 깨인 선생님도 공부 잘하는, 돈 많은 부모의 항의로 압박을 받는다. 자신의 경력이 손상되길 바라지 않기에, 보통 선생님처럼 행동하려고 애쓰지만, 사실 선생님이라는 지위로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다.

'대학' 때문이다. '대학'에 가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생각하고, 명문대를 가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며 사회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교육에는 '여유'가 없고, '억압'과 '집착'만 있다. 학교는 특수고를 몇 명이나 보냈는지, 명문대를 얼마나 보냈는지 수치화하고 자랑한다. 하지만, 핀란드의 교육은 생각 자체가 다르기에 모두가 평등하고 재미있게 자신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서로 수업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경계'를 만들지 않고 '경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아이는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답을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참 따뜻하다.

행복한 공부를 하는 교실 풍경. 공부를 하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아이는 없는 것 같다. 과제를 끝나면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 속에서, 아이는 교육이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학교를 즐거운 놀이터 정도로 생각한다. 학교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으니 수업이 끝나도 학교를 떠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급식도 채식하는 아이와 이슬람교 아이, 다른 인종의 아이를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 하나만 보아도 핀란드에서 어떤 교육을 추구하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행복하고, 배우는 아이들도 행복한, 그랬더니 세계 최고의 학력을 낳는 핀란드가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적용되기 힘든 교육도 있을 것이며, 핀란드만 무조건 따라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잘하는 아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기다려주고 생각해줄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숨 가쁘게 공부한 한국의 아이들은 숨 가쁘게 진로를 결정하고, 숨 가쁘게 취업 준비를 한다. 공부가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을 위한 도구인 듯, 모른 채 끌려왔다가 허탈에서 자기의 길을 잃기도 한다. 핀란드는 기초 교육이 끝나고 고등 교육이 끝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사회 경험을 할 수 있거나, 전문학교에서 원하는 길을 찾기도 한다. '대학'이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공부의 이유이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다.

학부모들이 직접 교육에 달려들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고,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도록 방향을 모색한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장학사도 장관도 대통령도 교육의 병폐를 어쩌지 못하고 방관한다. 그들이 그렇게 자랐기에 밟고 올라갔기에 그들은 그게 맞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부모는 허리 휘게 돈을 벌어 자식의 교육에 쓰느라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가 자신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라 좋다 싫다 말도 못한다.

'공부해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했다. '책 좀 읽어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읽고 싶을 때 읽고 쓰고 싶을 때 썼다. 우리 부모님이 자유 교육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사는 게 바쁘셔서 공부해라는 말도 책보라는 말도 안 하셨다. 남들만큼 지원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부모님한테 감사하다.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뛰어나게 잘하진 않았지만, 욕심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걱정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하고 싶어서 할 수 있을까? 문득, 핀란드의 교실 풍경이 부럽다. 부모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 정책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모가 먼저 변해야 아이에게 행복한 교육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많은 과제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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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내일 - 1차세계대전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아이들의 전쟁 일기
즐라타 필리포빅 지음, 멜라니 첼린저 엮음, 정미영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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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아이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더 꿈꿔야 할 나이에 아이들은 공포를 느끼고, 절망과 슬픔을 맛본다.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꿈꾸고 즐거워야 할 나이에 가족을 잃고, 굶주림과 상처에 감정이 메말라간다. 모든 것을 누려야 할 나이에 불행과 아픔을 먼저 알아버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빼앗긴 내일>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유태인 대학살,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라크 전쟁 속에 살았던 아이들의 일기를 묶은 책이다. 순진한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적의 죽음도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죽음의 위험이 눈앞에 도사리는데도 희망을 품는 이유는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안네의 일기를 읽었지만, 그때는 숨어 산다는 의미도 몰랐다. 또한, 전쟁과 학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가슴으로 느끼지도 못할 때였다. 그녀가 쓴 일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경악했던가? 하지만, 알면서도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던가.

우리가 단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전쟁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산다는 것은 더 끔찍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 정보화 시대, 물질이 풍족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구 어디에선가는 끔찍하게 살해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꿈을 꾸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계속 되풀이되고, 끝날 줄 모르며 어디선가 시작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일상을 폭탄 테러의 공포에 빼앗겨 버린 시란 젤리코비치, 그녀는 이스라엘인이다. 팔레스타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공포와 누군가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메리 해즈보운 그녀는 팔레스타인이다. 두 나라가 벌이는 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 분쟁 속에서 공포에 떨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공포에 못 이겨 나라를 등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이들이 있다. 개개인에게는 조국과 국가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조국과 국가가 없다는 것은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황당한 상태가 된다. 또한 뿌리에 대한, 나를 형성한 모든 것에 대한 부재. 내 존재가 흔들린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내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일까? 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전쟁을 하면 배부른 이들은 무기상, 검은 거래를 하는 정치인, 권력자들. 전쟁을 하면 배고프고 고통받는 이들은 아이들, 국민, 군인들. 다수의 고통과 소수의 이익을 아무렇지 않게 맞바꾸는 것도 전쟁이다.

클라라 슈왈츠는 2차세계대전 동안 홀로코스트(대학살)가 횡횡했던 그때, 살아남기 위해서 지하실에 숨어 지낸다. 다행히 독일인 벡 씨의 도움으로 그의 집 지하에 다른 유태인들과 숨어 살 수 있었던 그녀는 하루하루 공포에 시달린다. 머리카락이라도 들켰다가는 어디로 끌려가 죽을지 모른다. 히틀러 친위대는 그들의 독재자 히틀러의 뜻을 받들어, 유태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했다. 같은 인간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린 아이의 일기장에는 '사는 게 완전히 지옥이다', '요즘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어서 빨리 자유의 몸이 되게 해 달라고. 이 고통이 막을 내리게 해 달라고. 모두 울었다.', '사람들이 백 살까지 산다 해도 결코 우리가 하루에 겪은 시련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글들이 적혀 있다. 아이의 절망이 뼛속까지 사묻힌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지하실에 숨어 살며 겪어야 했던 것들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에게는 미래를 꿈꿀 여유도 미래를 설계할 생각도 없다. 단지, 그곳에서 탈출해 나가기만을, 전쟁이 끝나서 맑은 공기만을 마실 수 있기만을 바란다.

전쟁은 많은 이에게 고통을 낳는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아무렇지 않게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은 길을 걷다 죽기도 하고, 물을 마시다가 죽기도 한다. 공부하다가도 죽는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이 예정되었다는 듯이. 우리는 안다. 알면서도 또 전쟁을 시작한다. 그 웃기지도 않은 평화의 이유로 말이다. 평화롭게 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은 겪어본 자만이 안다. 제3자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꿈꿀 수 있는 내일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은 소중한 것이다.

이 아이들의 일기 속에는, 전쟁을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며 이미 일어난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의 죽음도 슬퍼하는 아이들의 눈이 있다. 결국, 적은 적이 아니어도 될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모두가 적을 만들 뿐이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일기가 왜 세상에 퍼지고 있는가? 그것은 전쟁을 막으려는 그들의 바람이며,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들의 아우성이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전쟁 속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온전히 행복할 내일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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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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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서경식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었다. 그리고 다시 서경식이다.
7월 9일 울산 출장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이 그림 한 장이 <고뇌의 원근법>을 쓴 작가와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심정을 다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내 몸으로 전해졌다.


오토 딕스, 여성반신상, 1926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은 이미 그의 다른 책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다루고 있다. <고뇌의 원근법>에서는 그들을 깊이, 더 깊게 다루고 있다. 그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는 그림에 담긴 고뇌와 슬픔과 아픔을 읽어내려 했다. 아니,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다.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서경식은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을 누구도 아닌 한국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그 이유는 이랬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본 미술 - 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
왜 내가 본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2년이라는 짧은 한국 체류기간 중에 내가 볼 수 있었던 작품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단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문제 제기 차원에서 굳이 말한다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일부는 예외라 할 수 있으나, 내가 본 한에서 민중미술운동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미 역사화되었으며, 그 맥락이 현재도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미술에서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그것도 미술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미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대다수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공유하고 있던 통념으로서 미의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미의식을 개척해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 대 서양'이라는 안이한 도식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이 그런 것처럼 한국의 근대미술도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라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한 사보에 한 유명한 작가의 미술 칼럼이 실린다. 마감이 되어 글을 받았는데 <다비드 상>에 관한 글이었다. 담당자는 나체 상태의 <다비드 상>을 보고 기겁을 한 후, 원고 수정을 요구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강경했다. 나는 비굴하게 이해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한 후 다른 원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쾌하셨는지, 한 달만 쉬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지만 결국 내가 딱했던지 다른 원고를 보내주셨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강세황의 자화상>이었다. 담당자가 또 다른 말로 나의 혈압을 올렸다. 그림이 너무 칙칙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좋으나, 그림이 칙칙하니 알록달록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수정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어찌 보면 이 작은 사건이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기 '예쁜' 작품을 원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작가들은 피와 땀을 녹여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대중들은 피와 땀을 알 리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고, 눈에 좋은 것만 흡수하려 한다. 그게 문제다. 회피가 결국, 한국의 근대미술에 서경식이 말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고 자살을 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가 그린 아이리스나 해바라기, 자화상, 예쁘고 사건과 맞닿은 그림들은 많은 화제가 된다. 그의 붓 터치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글을 쓴 화가 고흐, 그가 느꼈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동생에게 부렸던 투정, 뻔뻔함, 고뇌, 상처, 고통.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긴 그림.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 가는 그의 그림 속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내려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냥 천재라고만 부르고 싶고 알고 싶은 고흐만 있다. 우리에겐. 

당신들은 고흐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빈곤 속에서 무명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당신들은 타인의 고뇌에 흥미를 갖지만,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 장 콕토 

이 말은 비단 고흐에게만 적용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고흐가 될 수 있다. 대중에 의해서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서경식은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철저히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역사와 상황 그들이 처했던 개인적인 문제들도 모조리 다 이해하려 한다. 그래야 온전히 그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좋다는 것, 보고 예쁘면 된다는 것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그림들은 겉보기에 예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다. 그냥 아플 뿐이다.
 
전쟁의 잔인함, 폭력, 학살, 고립, 분쟁, 망명. 그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중첩된 그들의 삶을 쫓으며 외면당하고 고통받는 그림 속의 인물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낀다. 
학살과 예술,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의 잔인함을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유대인 학살 장면의 사진이나 여수, 캄보디아 학살 사진은 예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진실이 있다.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그들이 남겼다. 작가들이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떠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맹점이다.

 원근법. 작품을 보는 우리의 눈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시야는 어디까지 일까?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 것일까? 눈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 눈과 작품과의 거리를 넓혀야 한다. 

서경식, 그가 자꾸 깊게 깊게 전하려 한다. 다시 말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게 아니다. 더 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 학살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그림과 이야기는 형태가 달라졌을 뿐,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갖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자연도 되돌아 봐야 한다. 방관이 문제일까? 외면이 문제일까?


결국, "예쁜" 것만 보려 하는 우리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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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왜 우리의 가장들은 가족들과 데면데면하며, 죽어라 일하고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일까? 열심히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왜 재미없는 사람이 될까? 명망 있는 리더든, 전문가든, 학자든, 남자라면 대부분 똑같다. 가장이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해질 수 있건만 여자들만큼 남자들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삶이 허무하건만 왜 아무도 몰라주는 것일까?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아, 숨차다. 어쨌든, 이 책은 낄낄대며 가볍게 웃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메시지를 던져 준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위한 책인만큼 저자도 대한민국 남자다. 중년의 대한민국 남자다. 뼛속까지 철들지 못하는 남자다. 남자가 남자를 위한 해결서를 내놓았다. 이 글을 읽고 해결이 된다면야 탱큐이지만, 웃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땡큐가 아닐까 싶다. 남자들의 마음을 이렇게 쓰다듬어 줬는데, 그것도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말이다. 정말 답답한 남자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난 멋진 남자라고 말하고 싶다. 위엄을 떨며, 자신이 최고인척 위선떠는 남자보다는 징징거려도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웃을 수 있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남자 '최윤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즐겁게 남자를 이야기한다. 적절한 심리학 이론도 섞어서 말이다. 그러니 더 믿음직스럽다. 

이 책을 읽으면, 남자들이 왜 여자의 가슴 크기에 열광하는지, 술만 먹었다 하면 폭탄주인지, 아내에게 온갖 구박 다 받으며 골프채를 둘러매고 나가는지,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왜 웃지 않고 위엄을 떠는지, 속 이야기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왜 시간이 나면 밖으로 나가 넓고 트인 곳에서 여유를 즐겨야 하는지 등등등 수많은 이유들을 알 수 있다.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은, 삶 자체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어떻게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도 잊은 지 오래고, 그러니 중년에 다다를수록 행동 양상이 다들 비슷해진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지만,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색한 우리의 남자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남자들에게 재미와 감탄을 찾길 고한다. 엉뚱하게, 애처럼, 별 것아닌 것들로 행복과 재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쉽게 재밌게 이야기해주는 데도 못하고 못 논다면 뭐 자신의 성격 탓, 틀을 깨지 못하는 답답함 탓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자인 나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건만. 

자신만의 리츄얼(ritual)을 만들고, 사회적 맥락을 바꾸며 순수한 나의 자유에 의해 삶의 재미를 찾는 것. 감탄에 감탄할 일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단순하지만 어려울 수 있는 것.

천천히, 조금씩, 점차, 하지만 당당하게.

아! 그리고, 아내들의 노력도 필요하겠다. 아내들의 절대적인 이해야말로 남편이 재밌게 사는 일에 일조할 수 있을 듯. 내 남편이 나이가 들어서 재미없는 삶이라고 징징댄다면, 나마저도 불행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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