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동안 우리 부서 워크샵(말만 워크샵 탱자탱자 놀고 왔음)을 갔다가 오늘 화요일에서야 직장에 복귀했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금요일에 보낸 메일에서 연말까지 다른 부서와 함께 일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오늘 오후 아주 중요한 회의를 하자고 한다. 미리 날짜 협의를 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가 화요일에 강의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인지.. 먼저 참석자들의 선약을 물어봐야 하지 않았나? 어쨌든 외부에서도 손님이 오시는 첫 회의이고, 내가 깊이 관여하고 있어 빠질 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휴강을 하기로 결정했다. 강사이기 이전에 직장인이 아니던가? 학생들에겐 진짜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화요일에 절대 회의를 못잡게 하는 수 밖에 없지.
다행인 것은 인터넷에 강의 카페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침까지 게시판에서 자료 하나를 출력해서 와야 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카페에 공지사항을 남기는 것으로 휴강 공지를 끝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에 내 수업 2시간을 듣기 위해 멀리 있는 집에서 등교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공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것이다.
다음주는 학교 개교기념일이라 원칙적으로 휴강을 해야 했는데, 오늘 휴강 때문에 개교기념일에도 수업을 하게 생겼다. 후배에게 그래도 될까 물어보니 '형 오래 사시겠네요' 한다. 즉, 욕 많이 들을 거란 말이지. 건강하게만 살면 오래 사는거 그 까이꺼 별 문제는 아니겠지.
주례사 짧은 결혼식이 어떤 결혼식보다 반갑고(이건 결혼 당사자들도 마찬가지일 터), 여름이라고 덥다고 강론을 생략하시는(에어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이 너무 멋져 보이는 것처럼, 휴강보다 더 멋진 명강은 없다라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10여년 전, 휴강이 왜 이렇게도 좋았던지. 교수님이 5분이라도 늦으시면 혹시나 휴강이 아닐까 연신 손목시계를 보며 마음을 졸인다. 그러다가 과대표가 휴강이란 말을 전하면 모두가 환호를 하고 뛰쳐 나가고, 부리나케 강의실로 달려오시는 교수님을 보면 탄식하곤 했다. 교수님이 멀쩡하게 정시에 맞춰 오시지만 휴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학교의 경우 농구부가 당시에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중요한 게임이나 결승전이 있는 날은 학교버스로 단체로 응원을 나갔다. 그런 날엔 일치단결해서 교수님께 우리도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해서 휴강을 시킨 적이 몇 번 있다. 물론 학생회에서 치루는 중요한 행사 때 휴강은 당연한 것이다.
학과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기에 휴강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학생들을 상대로 기억에 남는 좋은 수업이란 어떤 것인지를 물었는데, 그 중에 기억나는 하나는 당시엔 수업준비하느라 힘들어서 이를 박박 갈고 교수를 욕하지만 결국 그런 과목들이 나중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라는 것이었다. 휴강도 마찬가지 아닐까? 휴강을 자주 하는 교수는 그 당시엔 멋져 보이지만, 지금 생각해보자면 학생들의 교육권 침해에 동조하는 악역을 담당한 것이었다.
요즘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가?
인문사회계 한 학기 등록금이 350만원이라고 쳤을 때 20학점을 듣는다면, 2학점짜리 강의는 35만원. 한 학기 대략적으로 17주라고 본다면, 일주일 2학점 강의 두 시간은 2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강사료가 시간당 보통 3만원이 조금 넘으니 강사료가 적긴 적군. 수강생에 비례해서 강사료를 높여야 하는거 아닌가?) 의약계나 공대는 훨씬 넘겠군. 곧 천만원 시대가 온다더니, 아무튼 2, 3만원이나 되는 돈이 휴강이란 이유로 바로 사라져버리는데, 이렇게 따지자면 요즘처럼 돈이 중요한 시대에 휴강은 곧 죄악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돈을 버리는 죄.
어찌되었던간에 개인사정으로 인한 휴강이라는 일천한 시간강사 경력의 큰 오점을 남기고야 말았다. 다음주 수업을 못하겠다고 항변하면 어떻게 하지? 미안한 마음에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돌려야 하나?
이런 생각 하고 있는데, 1시 넘어 회의 주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것도 아니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나서 오늘 회의 후 회식엔 불참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 깜빡 했는데 오늘 회의가 미뤄졌단다. 외부 손님이 못오실 것 같다고... 언제 결정났냐 물었더니 오늘 아침에 결정이 났단다.
그럼 미리 연락을 줄 것이지. 그럴 줄 알았으면 휴강도 안하고 맘조리는 일도 없을테고, 학생들에 죄스러운 기분도 안들 것인데.. 이구 이구.
답답한 사람 때문에 괜히 휴강했다. 내가 답변 메일이라도 보냈다면 이런 사태는 미리 방지가 되었으려나? 에구 에구 에구 에구. 페이퍼만 하나 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