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영하 옮김 / 푸른나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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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로맹 가리와 헤밍웨이가 생각났다. 우리가 생을 선택하여 시작한 게 아니라면 죽음은 선택하여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이 있지 않나. 베르테르, 로맹 가리, 헤밍웨이... 이들의 선택된 죽음을 생각해보았다. 이런 죽음이, 얼마 전 생활고를 비관하여 딸을 먼저 아파트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고 자신도 뛰어내린 한 젋은 엄마의 죽음과 다를까? 고생하는 부모는 안중에 없고 엄청난 카드빚과 사치 낭비로 생을 탕진하는 젊은 아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한 부부는 어떤가? 정황은 다르지만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기저는 보통 사람들의 몰이해에 있다. 좀 참고 살아갈 것이지, 쯧쯧, 그 용기로 살려고 애쓸것이지, 라고 또 한번 관습적인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것인가.

베르테르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살은 정신의 열병을 앓다가 도저히 못 견뎌 숨이 끊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열병을 앓다가 죽은 이에게 좀더 참고 열을 견뎌볼 것이지, 라고 혀를 차는 건 극단적인 몰이해의 단면이라고 했다. 베르테르는 젊다. 그는 기존의 격식과 관습을 중시하는 모든 양상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의 권총자살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또다른 생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가식과 편견으로 타인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양자택일의 흑백논리를 베르테르는 혐오했다. 알베르트를 비롯한 보통 사람들의 논리로는, 자살이란 관습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행동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선택은 자신의 소중한 감정을 가식이나 편견으로 위장하거나 상처 주지 않고, 고스란히 아름다운 것으로 간직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젊은 베르테르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두 친구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감정에 전적으로 많은 힘을 실어준다. 사람들은 그의 지성과 재능을 그가 가지고 있는 본성보다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베르테르 자신은 그가 가진 감정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오로지 감정만이 모든 힘의 원천, 모든 행복과 불행의 원천이라네. 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내 감정만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네.' ~ 145쪽

'하느님! 당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을 가지기 이전과 그 이성을 다시 잃어버린 후가 아니면 행복하게 될 수 없도록 운명을 만드셨나요!' ~ 177쪽

베르테르는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선택을 했다. 기존의 격식과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이 배제된, 열정과 감정(보다 개인적이라 할 수 있는)으로 산 신인간상이다. 그 행동(표면적으로는 로테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며 '죽음의 술잔'에 입을 댄다. 당시 계몽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여주는 젊은이답게 큰소리를 친다. 자살이라는 소극적인 반격으로 더 이상의 구차한 위선과 무서운 대중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나,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아름다운 감정과 행복을 지킨 베르테르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적극적이다.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 책을 표면적인 사랑의 이야기로만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괴테가 이십대에 쓴 이 책에는 작가의 우울함과 젊음의 열정이 내비친다. 그 후 고전주의로 돌아간 작가이고 보면, 베르테르를 다시 만나며, 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이십대)이 그립기도 하다. 어떤 종류이든 정신의 열병을 앓는 우리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이란 쉽게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찬양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난 벌써 관습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데 현실은 그런 나를 모순덩어리,어중이떠중이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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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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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향수 하나를 고를 때처럼 <향수>라는 제목의, 표지가 예쁜 책을 만났다. 부제는 '향수'에서 가질 수 있는 첫느낌과는 달리 다소 섬뜩하고 자극적이다. 모두 4부로 나뉘어있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굳이 4부로 나눌 필요가 없었다는 듯이 술술술 빠른 속도로 풀려나온다. 털실뭉치에서 실이 막힘 없이 풀려나오는 것처럼 문체도 간결하고 잘 읽힌다. 여러 계층(귀족, 시민계급, 빈민)에 대해 각각 비꼬고 있는 어투도 재미있다. 향기를 피우는 것 같은 예쁜 꽃과 풀이름도 나온다.

우울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는 '향수'를 소재로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궁금해진다. 18세기 프랑스의 혐오스러운 천재들 중의 하나인 그르누이는 '자신의 천재성과 명예욕'을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에 발휘한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으니 덧없다 할 수 있지만, 후각으로 감지된 기억은 다른 감각에 의존한 기억보다 오히려 그 생명력이 질기다. 그런 면에서 냄새의 천재 그르누이는 끈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타고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성에 굶주리는 운명을 짋어진, 기이하고 참혹한 인간 그르누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향해 한눈 팔지 않고 손 뻗을 수 있을 만큼 아이같다. 때론 순진무구하고 때론 충분히 사악하다. 때론 가련하고 때론 충분히 힘이 세다.

그르누이가 여느 아이와 다른 점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보호의 감정(본능적인 모성)을 유발하는 특유의 냄새가 몸에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르누이가 세상을 탐색해가는 도구는 냄새이다. 천부적인 후각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빨아들인다. 그런 자가, 자신을 유기살해하려다 발각되어 어머니가 참수를 당한 광장에서, 어머니를 느끼고 그리워하는 방식은 바다의 냄새를 통해서이다. 바다는 '냄새라기보다는 하나의 호흡, 모든 냄새들의 끝인 마지막 호흡과 같은' 것이며 '바다의 냄새 속을 날아다니다가 그걸 들이마시면서 용해되는 일'을 즐겨 상상한다. 이 꿈은 자궁으로의 회귀이며 모성애의 갈구이다.

아직은 자신의 천재성을 확실히 모르는 이 아이의 즐거운 상상은 나중에 청순한 소녀의 살인으로 이어진다. 강한 흡인력을 가진, 사랑을 유발하는 그 냄새만을 취하려는 그르누이에게 살인이 죄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 미묘한 향기만을 찾아 자신의 향기로 취한 그르누이는 마치 신이라도 된 듯,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을 얻는다. 하지만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단 한 곳이 있으니,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 향수를 몸에 바르고도 느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동시에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보편적인 갈증을 향수를 통해 풀고자 한 그르누이는 우리의 숨겨진 얼굴 같기도 하다.

'그레브 광장에 서서 바람에 실려오는 한 가닥 바다 냄새를 코로 거듭 들이마시고 있는 그르누이에게 멀리 서쪽에 있는 진짜 바다. 그 커다란 대양을 보고 그 냄새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일생 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58쪽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처음으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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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 풍수와 함께 하는 잡동사니 청소
캐런 킹스턴 지음, 최이정 옮김 / 도솔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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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1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차로 1시간 정도의 거리가 되는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갈 계획이다. 한 보름 쯤으로 날짜가 다가오니, 괜히 마음만 분주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이번 이사가 나에게 또다른 전환점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설레기도 두렵기도 한 엇갈린 심정이다. 전같지 않게 우유부단하고 복잡미묘한 촉수들이 얽혀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인 것 같은 요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라니, 바로 난데... 이 책이 꽤나 반가웠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못 버리고 사는 '나'란 사람의 심중이 나도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리 좁지않은 집안이 좁게 느껴지고 답답한 짐들로 마음마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이 구석 저 구석 쌓여가는 책들, 정리를 해도 금세 흩어지는 옷가지들, 재활용품들... 신혼 때 첫 월급으로 남편이 사준 잠옷을 버리자니 그 마음이 아까워 입지도 않으면서 서랍 한 켠에 아직도 넣어두는 나. 냉동실 문을 열면 내용물이 뭔지도 모를, 꽁꽁 언 음식물들. 아이들이 내게 준 생일카드, 유효기간이 지난 영수증들, 서류들... 지금 우리 집의 거의 반 정도는 버리고 가야할 것들이다.

분명 있었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진짜 이유가 내 안에 있었다. 이 책은 정신적 잡동사니와 물리적 잡동사니에 대한 현실적인 주장이다. 잡동사니 청소라는 논리로 소위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 끊임없이 의미를 달며 버리지 못하는 행동은, 버리면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워준다는 생의 강력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있지 않아도 충분히 그 의미를 다한 물건을 다른 곳으로 보냄으로써 나를 포함한 세상의 에너지를 제대로 돌리는 것이다.

사실 더한 비밀은 정신적 잡동사니에 있었다. 과거에 집착하며, 누가 한 거슬렸던 말과 행동, 후회되는 나의 언행, 화나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아직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잡동사니를 다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과거에 집착하게 하는 잡동사니들은 나와 세상(모든 인간관계와 물건과의 관계)간에 흐르는 에너지를 정체시켜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몸과 정신의 잡동사니(비판, 불만, 험담, 모든 두러움)를 처치하기 위한 첫단계는 집안의(혹은 직장의) 잡동사니부터 자연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버리는 것이란다. 엉뚱한 비약이라고 치부하기엔 부정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내 마음을 알고 나니, 신나고 명쾌하다. 나도 신혼시절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기억이 있는 장농을 비롯해 거의 다 버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로 나를 기쁘게 채울 것이다.

동양의 풍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내용이 미약하니, 이 책에서는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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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차 웅진 세계그림책 7
다이앤 딜론, 레오 딜론 그림,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이상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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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 글이 먼저인지, 그림이 먼저인지 혹은 글과 그림을 한 사람이 동시에 탄생시킨 것인지, 다른 사람이 작업한 것인지에 따라, 그림책이 던지는 의미의 해석이 달리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기차>는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의 글이 먼저이고, 52년 후 그것이 재해석되어 멋진 그림으로 탄생한 것이란 걸 이해해야 한다. 원제가 <Two Little Trains>라는 걸 알면, 딜론 부부의 그림이 다소 글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림 속 실제의 큰 기차도 작은 기차라고 표현하고 있다. 딜론 부부가 마거릿의 글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단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려는 의도로, 진짜 작은 장난감 기차를 등장시켜 실제의 큰 기차와 대비를 이룬 것 같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을 분리하여 두 종류의 파노라마를 나름대로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마거릿이 말하는 두개의 작은 기차란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대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다 맞으면서도 '우리가 달려야 할 기다란 철길'을 '툴툴거리지도 않고, 끽끽거리지도 않고' 쉼없이 힘차게 달려가자고, 마거릿은 조금은 어려운 말을 아이들에게 던지고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은 고단한 길을 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동반자의 길이다. 인생의 서쪽은 막다른 길,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서쪽은 죽은 자들의 땅이라 여겼다. 인생의 끝에서 열심히 달려온 기찻길을 뒤로하고 드넓은 저 세상의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작은 기차. 어느덧 작은 기차는 큰 기차가 되어있지만, 신의 눈에는 여전히 작은 기차가 아닐까? '날씬한 새 기차'와 '조그만 옛날 기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한 딜론 부부의 그림은 묵직한 주제에 걸맞는 톤을 취한다. 진지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차분한 색조는 아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 책이면 무조건 밝아야 한다는 건, 아이들의 다양한 감성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철학적이고 도덕심도 강하다. 아이들의 잠재된 무의식은 그림을 직관으로 파악하는 능력에서 바로 증명된다. <작은 기차>의 그림은 아이가 잠 속에서 달리는 기차처럼 아련하고 몽롱하다. 특히 날씬하고 긴 현대식 기차가 달리고 있는 풍경들(도시의 고층건물, 나무, 터널, 흑인아저씨의 노래부르는 입이 담겨있는 달, 목판화같은 산들이 이루는 협곡)은 마치 그림자 같다. 풍경은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구아로를 비롯한 갖가지 선인장은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한 생존과 개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작은 기차>는 깊이있는 주제는 접어두고라도, 또 하나의 장점이 보인다.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든, 무엇으로든, 놀이를 만들어내고 즐긴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퐁퐁 솟는 샘물처럼 마르지않는 것 같다. 항상 눈동자를 굴리며 놀이감을 찾아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생기가 넘친다. 먹이를 찾고 나르는 개미들마냥 분주하다. 두개의 크고 작은 여행가방과 플랫폼을 보며, 어른과 함께 한 긴긴 기차여행에서 집에 돌아와,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를 얼른 꺼내 자신이 거쳐온 여행길을 기억해내며 기차여행놀이를 하는 아이가 떠올랐다. 하루를 또 신명나게 놀며 보낸 아이는 이제 곤하게 달콤한 잠을 자고 있다. 더 놀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며, 꿈 속에서 또한번 기차여행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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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
존 버닝햄 글.그림 / 보림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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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가 제법 오는 날 아침, 우산 쓰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여섯 살 작은 아이에게 일부러 심부름을 시켜보았어요. 편의점에서 커피믹스 낱개로 한 봉지, 껌 두 통, 그리고 빌어온 비디오테잎 갖다주고 오기가 그날의 임무였지요. 2천원을 들고 본홍색 우산을 받고 슬리퍼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내려가는 뒷모습을 베란다 밖으로 내다보며, 아이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집에 들어오는 아이는 기대와는 전혀 달리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않더군요. 돈이 모자라 아무것도 못 샀다고요.

그래서 다시 단단히 일러 같은 길을 갔다오게 했지요. 그런데 역시 그대로 들어오며 높은 톤으로, 아무것도 못 샀다고 하더군요. 제가 먹고 싶은 것만이라도 사오면 되는데, 그냥 온 마음이 하도 순진하여 꼭 안아주었어요. 대신 아이는 우산 속에서 빗길을 밟으며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 고인 작은 웅덩이에 퐁당퐁당 발도 담그고, 비에 젖은 회색 나무도 쳐다보며, 우산 속 작은 집 지붕 위로 경쾌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도 즐겁게 들었겠죠. 들고 간 비닐봉지에 아무것도 넣어오지 못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겠죠.

아이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집은 구석구석이 아이의 특별한 공간이에요. 보기엔 어지럽고 정돈이 안 되어있지만, 함부로 허물 수가 없지요. 아이가 만든 소중한 상상의 공간이거든요. 그곳에서 아이는 생활 속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풀어요. 사실 아이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은 엄마랍니다. 유치원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 또는 어른에게서 받는 상처와 억압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지요. 가끔은 거칠어보이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지요. 현실에서 늘 제지당하는 일들을 상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것이 건강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모든 권위와 억압을 싫어한 존 버닝햄의 작품은,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대변해 줍니다. <장바구니>를 통해 작가는 수개념이나 일의 순서에 대한 논리적 사고 따위도 계산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의 본능적이고 순진한, 거칠지만 생명력있는,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인정하게 만들지요. 어른이 되면 이런 신나는 일을 하기엔 제약이 많지요. 이 그림책은 <지각대장>만큼이나 통쾌하게 한 방 먹이는 맛이 좋아요. 안경을 끼고 단정하게 양말을 신은, 모범생 같은 스티븐이 한 일이라(상상이라도) 더욱 신나지 않나요! 아이의 머리 속처럼 여백이 많으며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스케치한 작가 특유의 그림이 역시 개성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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