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
존 버닝햄 글.그림 / 보림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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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가 제법 오는 날 아침, 우산 쓰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여섯 살 작은 아이에게 일부러 심부름을 시켜보았어요. 편의점에서 커피믹스 낱개로 한 봉지, 껌 두 통, 그리고 빌어온 비디오테잎 갖다주고 오기가 그날의 임무였지요. 2천원을 들고 본홍색 우산을 받고 슬리퍼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내려가는 뒷모습을 베란다 밖으로 내다보며, 아이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집에 들어오는 아이는 기대와는 전혀 달리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않더군요. 돈이 모자라 아무것도 못 샀다고요.

그래서 다시 단단히 일러 같은 길을 갔다오게 했지요. 그런데 역시 그대로 들어오며 높은 톤으로, 아무것도 못 샀다고 하더군요. 제가 먹고 싶은 것만이라도 사오면 되는데, 그냥 온 마음이 하도 순진하여 꼭 안아주었어요. 대신 아이는 우산 속에서 빗길을 밟으며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 고인 작은 웅덩이에 퐁당퐁당 발도 담그고, 비에 젖은 회색 나무도 쳐다보며, 우산 속 작은 집 지붕 위로 경쾌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도 즐겁게 들었겠죠. 들고 간 비닐봉지에 아무것도 넣어오지 못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겠죠.

아이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집은 구석구석이 아이의 특별한 공간이에요. 보기엔 어지럽고 정돈이 안 되어있지만, 함부로 허물 수가 없지요. 아이가 만든 소중한 상상의 공간이거든요. 그곳에서 아이는 생활 속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풀어요. 사실 아이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은 엄마랍니다. 유치원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 또는 어른에게서 받는 상처와 억압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지요. 가끔은 거칠어보이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지요. 현실에서 늘 제지당하는 일들을 상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것이 건강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모든 권위와 억압을 싫어한 존 버닝햄의 작품은,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대변해 줍니다. <장바구니>를 통해 작가는 수개념이나 일의 순서에 대한 논리적 사고 따위도 계산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의 본능적이고 순진한, 거칠지만 생명력있는,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인정하게 만들지요. 어른이 되면 이런 신나는 일을 하기엔 제약이 많지요. 이 그림책은 <지각대장>만큼이나 통쾌하게 한 방 먹이는 맛이 좋아요. 안경을 끼고 단정하게 양말을 신은, 모범생 같은 스티븐이 한 일이라(상상이라도) 더욱 신나지 않나요! 아이의 머리 속처럼 여백이 많으며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스케치한 작가 특유의 그림이 역시 개성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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