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좋아하는 향수 하나를 고를 때처럼 <향수>라는 제목의, 표지가 예쁜 책을 만났다. 부제는 '향수'에서 가질 수 있는 첫느낌과는 달리 다소 섬뜩하고 자극적이다. 모두 4부로 나뉘어있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굳이 4부로 나눌 필요가 없었다는 듯이 술술술 빠른 속도로 풀려나온다. 털실뭉치에서 실이 막힘 없이 풀려나오는 것처럼 문체도 간결하고 잘 읽힌다. 여러 계층(귀족, 시민계급, 빈민)에 대해 각각 비꼬고 있는 어투도 재미있다. 향기를 피우는 것 같은 예쁜 꽃과 풀이름도 나온다.

우울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는 '향수'를 소재로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궁금해진다. 18세기 프랑스의 혐오스러운 천재들 중의 하나인 그르누이는 '자신의 천재성과 명예욕'을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에 발휘한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으니 덧없다 할 수 있지만, 후각으로 감지된 기억은 다른 감각에 의존한 기억보다 오히려 그 생명력이 질기다. 그런 면에서 냄새의 천재 그르누이는 끈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타고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성에 굶주리는 운명을 짋어진, 기이하고 참혹한 인간 그르누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향해 한눈 팔지 않고 손 뻗을 수 있을 만큼 아이같다. 때론 순진무구하고 때론 충분히 사악하다. 때론 가련하고 때론 충분히 힘이 세다.

그르누이가 여느 아이와 다른 점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보호의 감정(본능적인 모성)을 유발하는 특유의 냄새가 몸에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르누이가 세상을 탐색해가는 도구는 냄새이다. 천부적인 후각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빨아들인다. 그런 자가, 자신을 유기살해하려다 발각되어 어머니가 참수를 당한 광장에서, 어머니를 느끼고 그리워하는 방식은 바다의 냄새를 통해서이다. 바다는 '냄새라기보다는 하나의 호흡, 모든 냄새들의 끝인 마지막 호흡과 같은' 것이며 '바다의 냄새 속을 날아다니다가 그걸 들이마시면서 용해되는 일'을 즐겨 상상한다. 이 꿈은 자궁으로의 회귀이며 모성애의 갈구이다.

아직은 자신의 천재성을 확실히 모르는 이 아이의 즐거운 상상은 나중에 청순한 소녀의 살인으로 이어진다. 강한 흡인력을 가진, 사랑을 유발하는 그 냄새만을 취하려는 그르누이에게 살인이 죄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 미묘한 향기만을 찾아 자신의 향기로 취한 그르누이는 마치 신이라도 된 듯,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을 얻는다. 하지만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단 한 곳이 있으니,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 향수를 몸에 바르고도 느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동시에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보편적인 갈증을 향수를 통해 풀고자 한 그르누이는 우리의 숨겨진 얼굴 같기도 하다.

'그레브 광장에 서서 바람에 실려오는 한 가닥 바다 냄새를 코로 거듭 들이마시고 있는 그르누이에게 멀리 서쪽에 있는 진짜 바다. 그 커다란 대양을 보고 그 냄새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일생 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58쪽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처음으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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