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귀 문원 세계 청소년 화제작 3
쎄르쥬 뻬레즈 지음, 박은영 옮김, 문병성 그림 / 도서출판 문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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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가 아주 인상적이며 충격적이었다. 한 쪽 눈이 없는 아이들, 뭔가 결핍되어 있는 아이들이 생각났다. 가정과 학교에서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른들의 부조리와 위선과 욕심에 휘둘리며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한없이 위축되어 쭈그러져 있는 몸에 난 생채기와 혈종들은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아픈 아이들의 이야기가 여과없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우리의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오지만, 그래서 더욱 강한 어조로 와 닿는 면이 있다.

부모를 괴물로 여기고 보고 싶지 않은 존재로 생각하는 레이몽은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 어머니의 무력함과 무관심에 멍드는 아이다. 전혀 존경의 대상이지 못하는 담임 선생님은 무책임하고 교활한 위선 덩어리로 보인다. 친구들은, 바보스러운 자신에게 몰매를 가하는 어리석고 한심한 뭉치들이다. 죠슬린, 저능아 여동생에게 느끼는 연민의 정도 증오의 대상인 부모 때문에 번번이 스스로 차단된다. 레이몽은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자폐증세를 보임으로써 분출한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선생님의 권유로 레이몽은 요양원으로 가게된다. 이 곳은 자신처럼 아픔을 간직한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자유로운 피난처이다. 폴은 이 아이들에게 아주 감동적인 말을 해 준다. 너희들은 외계인이라고, 아주아주 먼 나라에서 온 우주인이라고.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너희들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거라고. 고향의 별로 다시 가려면 날개가 필요한데, 그 전까지는 눈높이를 낮추어 이 작은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너희들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보나 멍텅구리가 아니라, 너무나 큰 존재인 너희들이 이 작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거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레이몽은 정신과 의사 앞에 입을 꾹 닫고 앉아, 이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 폴과 레이몽을 통한 작가의 이런 목소리만큼이나, 후반부는 설득력이 있으며 인간적이다. 레이몽은 요양원에서 알게 된 안느를 통해 그 동안 굶주렸던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다. 늘 함께 있고 싶은 대상, 내가 관심을 끌기 위해 벌이는 작은 일들 그리고 대담함... 안느를 보는 순간 레이몽은 행복한 예감을 느낀다. 그러나 늘 미소만 짓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안느의 슬픈 비밀을 알게 된 레이몽은 자신만이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레이몽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부모님이 온다. 작가가 레이몽을 다시 힘든 현실로 끌어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전을 쓸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레이몽은 소극적으로 자기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예전의 태도를 바꾸어,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배운 것 같다. '쓰레기 더미처럼 더러운 곳, 힘든 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도 삶이란 그리 녹녹한 것도, 달콤한 것도 아니'라지. 성장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래도 '난 죽지 않을 테야.' 3부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 이 서평은 <당나귀 귀>가 아니라 <난 죽지 않을 테야>의 것입니다. 실수로 <당나귀 귀>에다 올렸네요. <난 죽지 않을 테야>의 서평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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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나라 비룡소의 그림동화 42
존 버닝햄 글 그림, 고승희 옮김 / 비룡소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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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닝햄의 그림책을 볼 때마다 나는 아이들의 나라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그가 그리는 아이들의 나라는 항상 상상력으로 충만한 자유로움을 나에게 선사하며 즐거움을 준다. 현실에서 나는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틀 안에 가두고 억압하는 역할을 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의 사람이다. 하지만 좋은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보고 읽으면서 난 어느새 아이의 나라에 조금은 접근해 있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에게 좀더 다가가기 위해서 그림책은 더 없이 좋은 길을 열어놓고 있다.

<구름 나라>는 표지에서부터 실제 구름 사진이 눈길을 끈다. 그 위로 세 아이가 각자 다른 동작을 하고 있다. 책장을 한장한장 넘기면 여러가지 종류의 구름이 수 놓아져 있는 하늘 사진과 작가의 짙은 수채화 붓자국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가는 스케치로만 그려져있는 부분은 주인공 앨버트의 의식이다. 그 아이가 느끼는 그대로의 그림이다. 아이들의 그림은 여백이 많고 서툰 것 같이 보이지만,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 꾸밈이 없고 돌아가는 법이 없다. 가는 선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그림에서 아이의 순수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앨버트가 발을 헛디뎌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작가는 가는 세로줄 절벽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는 조그만 토끼 한 마리를 그려 놓았다.

앨버트가 절벽에서 떨어지자, 엄마 아빠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대개 운이 좋다.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잘 해나간다. 앨버트는 구름 나라 아이들에 의해 구조되어, 다음 날부터 시시각각 다른 놀이로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구름 색깔이 점점 어두워지며 천둥 번개가 치려고 하자 '우리 실컷 떠들면서 시끄럽게 놀아 보자!'라고 하며 리듬악기를 두드리고 흔들며 노래부르고 춤춘다. 아이들의 입은 함지박만하다. 앨버트만 빼고 구름 나라 아이들 모두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다. 규율도 구속도 없어보인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모두 발가벗고 바다로 뛰어든다. 거칠고 굵은 붓자국이 아이들의 역동적인 힘을 잘 표현해 준다. 여기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고조된다.

비가 그치자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고 잠자기 전까지 모두 그림을 그린다. 다음 날 바람이 세게 불자, 아이들은 작은 구름 하나씩을 타고 달리기 시합을 한다. 혼자 제일 뒤에 처져있다는 걸 알게 된 앨버트는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진다. 그 순간 커다란 비행기가 지나가는 바람에 앨버트는 떨어질 뻔 했지만, 비행운을 따라 아이들에게로 무사히 간다. 마치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집에 가고 싶다.' 앨버트는 구름나라에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다시 보내 달라고 한 최초의 사람이다. 구름 나라 여왕님은 앨버트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려고 바람과 몇날몇일을 의논한다. 여왕님과 달사람은 아이들의 편에서 아이들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하늘에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고 구름 나라 아이들과 앨버트, 달사람과 여왕님은 마지막 파티를 한다. 그 다음 앨버트가 기억하는 것은 자기 방의 침대에 자기가 누워 있었다는 것과 엄마랑 아빠가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꿈을 자주 꾼다. 앨버트는 한바탕 신나는 꿈을 꾸고 눈을 뜬 건지도 모른다. 꿈은 늘 현실과 맞닿아 있고, 눈을 뜨면 언제든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래서 무서운 꿈이나 힘든 모험의 꿈도, 눈을 뜨면 안도할 수 있는 현실이 있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 그 현실에는 여왕님과 달사람 같은 엄마와 아빠가 있다. 앨버트는 내면에 자리하는 불안, 욕구불만, 외로움 같은 것들을 이제 이길 수 있다. 엄마 아빠가 양 옆에서 지켜주고, 가끔씩은 구름 나라에서 놀았던 것을 떠올리며. 하지만 구름나라로 들어가는 그 이상한 주문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유년의 기억으로 가는 주문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 치부되어버릴지라도, 가끔씩은 아이들과 함께'뜬구름'을 잡고 아이들의 즐거운 나라로 가는 작은 행복을 맛보심은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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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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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적이 있다. 어느 숲, 이름 모를 침엽수들이 싸늘한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한 그 곳에서, 나는 방향을 잃고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수레바퀴를 돌리듯 그러고 있었다. 도대체 그 곳에서, 무엇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을까? 나의 꿈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면, 이것이 종족의 집단적이 꿈으로 확산되면 신화가 된다. 전자가 다분이 Freud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Jung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된다. 꿈과 신화는 보다 복잡한 현실을 비교적 단순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신화는 현실보다 더 깊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신들이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인 신화에 인간들을 대입하면 문학이 된다. <미사고의 숲>은 Mythago라는 작가의 합성어가 내포하고 있듯이, 신화의 이미지 안에서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그리고 있다.

'라이호프'라 불리는 미사고의 숲은 종족의 집단 무의식이 추구하는 원초의 숲이다. 이 숲은 와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숲이 오라에 깃든 고립감은 강한 전염성을 지녀, 아버지의 육체를 통해 형,크리스찬에게로, 다시 나(스티브)에게로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숲과 '나'는 서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숲은 야생의 힘을 지니며 태초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섬뜩하고, 의미심장하며, 모호한......' 아버지의 미사고인 '우르스쿠머그'는 미사고의 원형들 중 하나이다. 언제나 무감동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의 일기를 들추어보는 과정에서 무너진다. 인식의 불확실성이란! 숲의 와륜의 틈을 잘 찾아 들어 온, 아웃사이더의 혈족, 스티브를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우르스쿠머그였다. 숲의 중심에는, 밀어내기도 하며 동시에 강하게 끌어당기기도 하는 아버지의 미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미사고의 숲>은 시종일관 그려지는 오묘한 이국 숲의 전경이 마치 한 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중세시대로, 청동기를 거쳐 불을 다루는 사람이 등장하는 신석기 그리고 저 태고의 빙하기까지. 각 시대를 거슬러 가면서 현란하게 변하는 숲의 모습과 나무들의 종류까지...... 활엽수림이 상록의 침엽수림으로 변하는 장관이 눈앞이 펼쳐진다. 떡갈나무는 개암나무와 산사나무로 대치되고, 숲의 심장부로 깊어질수록 원초적인 야생의 에네르기가 주위를 압도한다. 싸아한 숲의 정기가 코끝에 와 닿는 느낌이다.

나무는 일반적으로 '우주의 생명(life of the cosmos)'을 암시하고 있다. 쉼 없는 생명력을 그 속에 품고 영원과 불멸을 상징하고 있다. 우르스쿠머그가 귀네스를 그의 안전한 품으로 안아 올리고는 불을 향해 들어갈 때, '섬뜩할 정도로 인간을 닮은 새까맣게 탄 나무'를 스쳐 지나간다. 나무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다음 순간 불길이 또다시 밝게 타올랐고, 나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를 통해 그 모든 원초의 꿈은 영생하고 멸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강박증과도 같이 숲에 매달린 아버지의 꿈이자 '나'의 꿈이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던 어둠과 고통이 자아낸 한 타래의 실에서' 만들어진 여인, 귀네스에 대한 스티브의 사랑은 무의식에 가깝다. 모든 걸 감싸는 아버지의 과묵하며 위대한 사랑 앞에서, '나'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 현실에서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감정들이 환상의 공간에서 환하게 걷히는 순간이다. 숲의 심장부 라본디스(환상의 공간)에서 '나'는 현실에서 억압되어 있던 것들에 날개를 달고, 내면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보다 원초적이며 본능에 충실해진다. 이 곳은 인간의 영혼이 계절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다. 귀네스에게 한 마지막 입맞춤의 기억과,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는 기쁨과 함께, '나'는 오늘을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몇 천년이 흐른 후, '나'는 또 다른 시대에 신화로 깨어나, '아버지' 못지 않은 사랑의 힘으로 '영원'의 나무 한 그루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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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랑 달릴 거야 꿈꿈이의 자연학교 1
손정혜 지음, 김정한 그림 / 느림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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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이다. 그것도 요즘 많이 키우는 청거북 이야기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마리 길러볼까 생각중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까지도 산다는 청거북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돌보려면 여간 정성을 기울여야 될 게 아닐 성 싶다.

하지만 이 책은 동물 이야기가 아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주인공 아이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키우는 이야기이다. 겨례는 100미터 달리기를 45초에 하는 느림보이다. 그래서 놀림을 당하고 늘 풀이 죽어 있다. 교실에서 동물관찰을 했던 거북을 느림보라는 이유로 겨례가 떠맡게 되면서 일은 시작된다.

무심하게 내버려 두었던 두마리의 거북에게 온 정성을 쏟는 사람은 겨례가 아니라, 세 들어 사는 한 학년 아래의 훈이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할머니와 늘 심심한 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타는 2학년 훈이는 두마리의 거북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영양가 있는 먹이를 준다. 뿐만 아니라, 목욕, 수조 청소, 일광욕 등 세세하게 신경쓰고 돌보는 일을 아무도 모르게 담당한다.

기분 좋은 거북이 속으로 생각하는 대사가 말주머니에 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훈이와 거북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좋은 관계를 맺고 사랑을 주고 받는다. 거북이 달리기 대회에서 두 마리의 거북, 별이와 달이가 훈이를 주인으로 알아보고 어기적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정성으로 사랑을 쏟는 대상에 정을 주고 매달리는 것이다. 신기하다.

훈이가 거북을 이렇게 잘 돌볼 수 있었던 것은, 겨례 반 이이들이 쓴 관찰일기 덕분이다. 반 아이들 한명한명이 각각 다른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관찰일기를 엿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거기서 새롭게 알게 되는 '거북 키우기' 정보 또한 유익하다.

뒤늦게 자신이 거북에게 너무 신경을 안 쓴 것을 깨달은 겨례는 이제 조금씩 변화해 간다. 거북에게 정성도 보이고, 무엇보다 느림보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 달리기 연습에 들어간다. 거북이도 다음 번 달리기 대회를 위해 달리기 연습에 들어가고, 겨례는
자신의 꿈인 비밀 경찰이 되기 위해서는 달리기를 잘 해야 된다. 끝까지 자신의 꿈의 자리를 아무에게도 내놓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 애교스럽다. 이런 겨례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 느림의 미학을 예찬하고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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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 한자루와 친구들 - 책꾸러기 001 책꾸러기 1
박자경 지음, 이경자 그림 / 계수나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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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똥 이야기이다. 똥 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면서 더럽다고 구박받는 개똥 이야기이다. 전체적인 전개는 '강아지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강아지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성스러운 자기 희생의 모습과 종교적인 엄숙함보다는, 현실적이면서 명랑한 분위기가 희망이라는 단어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길바닥, 아이들, 시장, 쓰레기차, 이런 것들이 바로 생활 속의 평범한 것들을 대변해 주는 듯, 개똥 한 자루의 이야기 속 배경으로 등장한다.

길바닥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구박을 받으며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개똥 한 자루는 소원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멀리 여행을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이름을 갖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은 태어나기 전 많이 들었던 권이라는 이름으로 짓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어한다. 길가 하수구에서 만난 허풍쟁이 풍선껌과 영감 같은 성냥개비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기분이 나빠지지만, '이보다 더 나쁜 일을 없을 거야.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거야'라며 자신을 희망의 길로 끌어간다. 나쁜 상황에서도 항상 좋은 쪽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미덕이다.

권이는 우연히 자신의 첫번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의 자전거 뒷자리에서 어떤 아주머니의 노란 양산으로, 그렇게 그렇게 세상을 구경하며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여행은 권이의 성장에 필요한 요건이다. 세상의 이모저모를 보고 겪으며 권이는 자신도 충분히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이란 없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휴지 한 조각도,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으스대다가 실망했던 비닐봉지 하나도, 모두 소중한 꿈 한 자루씩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권이의 꿈은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라고, 권이는 이제 조심스럽게 자신의 꿈을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쓰레기차에 붙어 흙이 있는 곳으로 간 권이는 그 곳에서 찔레나무 새싹을 만난다. 자신도 볼품없이 마르고 잘게 부서져서 단풍나무 새싹을 틔운다. 이제 권이는 꿈을 이룰 수 있다. 흙에 단단히 뿌리 내린 멋진 단풍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이 책을 같이 읽은 2학년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가슴 속 싹은 뭐니?'하고 물으면 제각각 '과학자가 되는 것', '성악가가 되는 것', '경찰관이 되는 것', 선생님이 되는 것' 이라고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볼품없이 잘게 부서져서야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권이처럼 싹을 틔우기 위해 희망을 안고 노력해야겠다고 저희들이 답을 내리기까지 한다.

책을 잘 안 읽고, 숙제를 안 하여 야단을 맞아 의기소침해 있었던 아이들도, '너희들이 쓸모있다고 생각될 때가 언제니?'라는 물음에 '엄마 심부름을 잘 할 때', '노래를 잘 부를 때', '시험지 백점 받았을 때', '동생과 잘 놀아주었을 때' 같이 할 말들이 많다. 그리곤 아주 의기양양해진다. 식상하다싶은 소재의 이야기라도 똑같은 이야기는 없다. 그러므로 한 권 한 권 들여다보면 가치없는 책이란 없다. 그 속에서 얼마만한 보석을 끄집어내는 지는 아이들과 어른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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