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을 꾼 적이 있다. 어느 숲, 이름 모를 침엽수들이 싸늘한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한 그 곳에서, 나는 방향을 잃고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수레바퀴를 돌리듯 그러고 있었다. 도대체 그 곳에서, 무엇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을까? 나의 꿈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면, 이것이 종족의 집단적이 꿈으로 확산되면 신화가 된다. 전자가 다분이 Freud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Jung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된다. 꿈과 신화는 보다 복잡한 현실을 비교적 단순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신화는 현실보다 더 깊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신들이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인 신화에 인간들을 대입하면 문학이 된다. <미사고의 숲>은 Mythago라는 작가의 합성어가 내포하고 있듯이, 신화의 이미지 안에서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그리고 있다.

'라이호프'라 불리는 미사고의 숲은 종족의 집단 무의식이 추구하는 원초의 숲이다. 이 숲은 와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숲이 오라에 깃든 고립감은 강한 전염성을 지녀, 아버지의 육체를 통해 형,크리스찬에게로, 다시 나(스티브)에게로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숲과 '나'는 서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숲은 야생의 힘을 지니며 태초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섬뜩하고, 의미심장하며, 모호한......' 아버지의 미사고인 '우르스쿠머그'는 미사고의 원형들 중 하나이다. 언제나 무감동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의 일기를 들추어보는 과정에서 무너진다. 인식의 불확실성이란! 숲의 와륜의 틈을 잘 찾아 들어 온, 아웃사이더의 혈족, 스티브를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우르스쿠머그였다. 숲의 중심에는, 밀어내기도 하며 동시에 강하게 끌어당기기도 하는 아버지의 미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미사고의 숲>은 시종일관 그려지는 오묘한 이국 숲의 전경이 마치 한 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중세시대로, 청동기를 거쳐 불을 다루는 사람이 등장하는 신석기 그리고 저 태고의 빙하기까지. 각 시대를 거슬러 가면서 현란하게 변하는 숲의 모습과 나무들의 종류까지...... 활엽수림이 상록의 침엽수림으로 변하는 장관이 눈앞이 펼쳐진다. 떡갈나무는 개암나무와 산사나무로 대치되고, 숲의 심장부로 깊어질수록 원초적인 야생의 에네르기가 주위를 압도한다. 싸아한 숲의 정기가 코끝에 와 닿는 느낌이다.

나무는 일반적으로 '우주의 생명(life of the cosmos)'을 암시하고 있다. 쉼 없는 생명력을 그 속에 품고 영원과 불멸을 상징하고 있다. 우르스쿠머그가 귀네스를 그의 안전한 품으로 안아 올리고는 불을 향해 들어갈 때, '섬뜩할 정도로 인간을 닮은 새까맣게 탄 나무'를 스쳐 지나간다. 나무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다음 순간 불길이 또다시 밝게 타올랐고, 나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를 통해 그 모든 원초의 꿈은 영생하고 멸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강박증과도 같이 숲에 매달린 아버지의 꿈이자 '나'의 꿈이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던 어둠과 고통이 자아낸 한 타래의 실에서' 만들어진 여인, 귀네스에 대한 스티브의 사랑은 무의식에 가깝다. 모든 걸 감싸는 아버지의 과묵하며 위대한 사랑 앞에서, '나'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 현실에서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감정들이 환상의 공간에서 환하게 걷히는 순간이다. 숲의 심장부 라본디스(환상의 공간)에서 '나'는 현실에서 억압되어 있던 것들에 날개를 달고, 내면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보다 원초적이며 본능에 충실해진다. 이 곳은 인간의 영혼이 계절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다. 귀네스에게 한 마지막 입맞춤의 기억과,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는 기쁨과 함께, '나'는 오늘을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몇 천년이 흐른 후, '나'는 또 다른 시대에 신화로 깨어나, '아버지' 못지 않은 사랑의 힘으로 '영원'의 나무 한 그루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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