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집 [북항], 문학동네
2013년 8월 7일 녹음시작, 총 4시간 소요 8월 14일 완료
안도현 시인이 절필을 선언했다는 소식은 얼마전 자목련님의 댓글로 알게 되었다.
[북항]에서는 시인의 더 절실한 '시'에 대한 열망, 더 나은 '말'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염원이
곳곳에 담겨있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도 있고 좀 더 강렬한 이미지들도 드러나는 여러 편의
시 중, 여름 끝물에 담벼락을 친친 감고 타오르는 능소화와 붉게 타오르는 '부엌' 아궁이에
대한 인상이 깊다. 능소화의 탐욕스러운 붉은 혓바닥과 부엌 아궁이 속 붉은 눈은 삶의 빛과
그림자 같다. 빛이 너무 강하면 제 살을 타들어가는 법. 삶을 살아내기엔 능소화 붉은 혓바닥도 아궁이 붉은 눈도 함께 필요한 것인데 나는 대개 그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 같다. 몸의 계절이 바뀌려고 이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를 피부로 받아내며 날마다 모종의 애틋함과 근원 모를 그리움으로 마음밭에 꽃 한 송이 피우고 있다. 늘 그렇듯 이번이 마지막 여름이다,
하면서. 능소화일지도 모를, 그래도 나쁘지 않을.
능소화
능소화의 몸이 뜨거운 것은
죽자 사자 부여안고 다리에 다리를 걸쳐 휘감는 게
최대한의 사랑인 줄 알기 때문이다
햇빛 속에서도 햇빛을 잡아당기지 않고
이마에 여러 개의 헤드랜턴을 켠 능소화에게
환한 대낮 따위는 없다
동굴의 그림자만 있을 뿐
내려놓을 줄 모르는 저 넝쿨의 무한대의 열망 덕분에
여름날 인근 마을 꽃들은 일찍 불을 끄고 잔다
그때 능소화는 몸속의 혀를 꺼내
어머니의 빈 젖을 핥아 먹는다
능소화가 입 냄새를 슬슬 풍기는 저녁
뼛속에 구멍이 송송 난 적막한 어머니가
아랫도리를 오므리며 말했다
얘야, 나는 죽은 나무다 죽은 나무여서 나는 제국의 호적
에서 지워졌다 나는 자궁이 없다 자궁이 없어 네가 웅크리
고 잠잘 방이 없단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819/pimg_734585173887462.jpg)
사진은 이필형 님의 것을 사전허락 없이 빌려왔읍니다.
붉은 눈
부엌,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잘 슬퍼져요 부엌은 늙
거나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덩달아 부엌, 이라는 말도 떠나가
겠죠? 안 그래도 외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
엌에서 더는 고등어를 굽지 않아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
던 아궁이 생각나요? 아아, 나는 어릴 때 아궁이 앞에서 불
꽃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 돼, 하
면서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우는 소리로 밥이 익
는다고 생각했어요 알아요? 아궁이는 어두워지면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이 되어주었지요 참 크고 붉은 눈이었어요 이
제 아무도 자신의 붉은 눈을 태우지 않아요 숯불 위에 말이
스러져요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
이름뿐인 '입추'가 벌써 지나갔지만 그래도 입추!, 하고 읊어본다.
변하는 건 없다해도 그래도 가을,이 오고 있다.
입추
이 성문으로 들어가면 휘발유 냄새가 난다
성곽 외벽 다래넝쿨은 염색 잘하는 미용실을 찾아나서고 있고
백일홍은 장례 치르지 못한 여치의 관 위에 기침을 해대고 있다
도라지꽃의 허리 받쳐주던 햇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기별이다
방방곡곡 매미는 여름여름 여름을 열흘도 넘게 울었다지만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왜가리는 여태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한성부 남부 성저십리의 참혹한 소식 풀릴 기미 없다
시 두어 편 연필 깎듯 깎다가 덮고 책상을 친다
오호라, 녹슨 연못의 명경을 건져 닦으니 목하 입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