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시작하여 연초까지 15시간 좀 넘는 시간동안 이 책을 녹음완료했고,
편집을 미뤄두고 있다가이제야 1차 편집, 중반을 넘어 가고 있다.
편집교정을 하며 일독을 더 하게 되니 나로선 감사하고 느껍다.
물만두 홍윤님의 깊고 진실된 사유와 마음씀, 쉽지 않은 생을 끌어안는 사랑과 여유, 재치와 유머,
무엇보다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때로는 가슴앓이하며 솔직한 토로를 하는 글귀가 마음을 울린다.
입이 점점 작아진 그녀에게 음식을 잘게 잘라 입에 넣어주는 만순이에 대해 고마움을 쓴 대목도.
어쩌면 나는 생을 거죽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때때로 약간의 자괴감이 엄습하는 순간
이런 글귀를 만나게 되는 건 작지 않은 선물이다.
그녀만큼 생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다 간 사람이 또 있을까싶을 정도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돌림노래라도 불러야 할 터다.
함께 나이들어가는 여고 친구들이랑 이 도시의 오래된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지름신 강림하여 옷도 몇 점 사고 튀김이랑 어묵에 뜨거운 국물 훌훌~ 이래저래 사람 사는 모습도 구경하고 다녔다.
학창시절 가늘었던 몸은 다 어딜 가고 적당히 살집이 붙은 우리는 너스레도 떨 줄 알고 깎아달란 소리도 잘도 한다.
그래도 나는 체구가 작은 편이다보니 사이즈가 상대적으로 작은데 걔들 앞에선 군살 붙었다 소리하면 엄살이라고 퉁 먹는다.
그래 봄날이다, 지금이!
계절이 선택의 여지 없이 가고 또 다가오듯, 물만두님의 글귀대로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것 같다.
한때는 내가 선택해서 살아왔다고 착각했지만 돌아서 생각해보면 그 반대가 아닌가.
무언가 물밀듯 밀려오고 밀려가는 느낌. 강물에 흘러가는 꽃잎처럼 살자.
어제 도서관 입구에서 보았다, 백목련화 꽃봉오리들.
입을 앙다물고 야심차게 열릴 희열의 순간을 예고하며 단단하게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었다.
폰카메라로 그걸 담고는, 어느 순간 열렸다 화르르 닫힐 그네들의 뽀얀 이파리를 동시에 떠올렸다.
눈물이 새큰 났다. 하늘이 너무 새파래서만은 아니지.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어 보면 또 달라지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그냥 살자. 어떤 삶이 더 낫다, 못하다 저울질 말고 그저 내 삶이 제일이려니 생각하고 살자.
누구든 살며넛 남보다 우위에 놓이길 원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게 그리 중요한가.
내 삶은 이생에서 단 한 번뿐이고, 그 삶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스스로가 아름답게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중략)
살아 있어서 좋다는 건, 백 번의 불행이 닥쳐와도 단 한 번의 행복이 그 백 번의 불행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해피데이'라고 하는 건가.
(별 다섯 인생, p175)
세상에는 열 가지 보따리가 있다. 그 중 아홉은 불행 보따리고 나머지 하나만 행복 보따리다.
아홉에 얽매일 것인가. 하나에 기뻐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이다.
(별 다섯 인생, p184)
인터넷의 폐해도 크고 단점도 많지만 물만두님에겐 하루 일과의 많은 부분,
거의 전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하다시피 한 창구가 인터넷, 특히 알라딘이었다는 건
이 책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누구의 세상이든 그 세상을,
누구라서 좁다고 허튼 거라고 쉽사리 말할 수 있겠나.
수족관 물고기들에겐 그 크지 않은 세상이 세상의 전부이고
화분 속의 꽃은 그 얕은 세상이 세상의 전부이듯,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세상의 전부일 테다.
루미의 말처럼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면서 동시에 거울 자체이기도 하다.
행위자이자 관찰자로서 '나'는 생이 몰아가는대로 일희일비 하지 말고
상하좌우 돌고도는 어지러운 바퀴살이 아니라 바퀴의 굴대, 중심에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