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시간이 악순환을 거듭하는 나날,
오늘 아침 시원하게 긋는 빗소리 들으며 큰딸 학교에 데려다 주고 안아주고 돌아왔다.
현관에서 자꾸 머뭇거리며 발길을 떼지 못하고 서 있던 새하얀 얼굴이 눈에 밟힌다.
고3, 지금 한참 힘들 때인데 어제낮에도 죄없는 애한테 내 답답하고 화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뜨렸다.
주말에만 보는데 맛난 것도 챙겨주고 그래야되는데 그렇게도 못하고 엄마로서 참 많이 미안하다.
딸, 우리 건강하게 이 지긋지긋한 여름을 잘 견디고 나아가자.

오늘아침 문학광장 배달시는 아주 재미있다. 깜찍하다.
그리고 지리한 장마와 개같은 폭우처럼 잡다한 것들을 모두 뻥~ 날려주는 가벼운 시다.
가벼움, 그래 그게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내겐. 김선우 시인은 묻는다.
시인이 필요한 곳은 사람의 몸, 마음, 정신 어느 곳일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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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시_ 김민정 -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검은 나나의 꿈」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있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함.
 
 


 
흥, 치사하군요. 언제는 특이하게 시 쓴다고 달라붙더니 이제와선 시 쓴다고 트집 잡는 당신. 시인이 필요한 곳은 인간의 몸, 마음, 정신 중 어디일까. 세상의 어느 자리에 시인은 앉을 수 있을까. 헉, 그게 그런 거였어? 다정과 힐난이 줄넘기 넘는 아이처럼 오락가락하는 거야 인생 다반사 그 모양이니 그렇다 치지만, 차버리고 떠나는 마당에 꼰대 같은 이유씩이나 조목조목 들이대며 ‘안전망’ 구축하는 당신. 마음 변했으면 그냥 쿨하게 잘 가줘요, 당신한테 시 쓰고 살라고 안 할 테니까. 여기서 뭉개져 시 쓰고 사는 거야 내 인생이죠. 난 내 인생이 좋다구요! 애인과 우습게 헤어지고 화가 나서 팔짝팔짝 뛰다가 푸른 밤바다를 보고 온 것 같은 시. 시시콜콜 가르치려드는 꼰대님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로 쓰기 쉽지 않은 바람맞은 시. 깎자고 덤비는 세상에서 너무 싸게 파는 거라서 더 이상 깎아줄 수 없는 시. 안 착해 보이는 착한 시. 그러니 우리 해피하자구요.
 
-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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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는 완전 그런 느낌이예요,
저보고 '너 상당 공부한다며? 상담가 되겠다며? 그런데 심성을 그리 먹어도 되냐?' 머 이러는거...
그러니 항상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본인이 무엇을 하든 속내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그런거...

ㅋ!ㅋ!

추신. 따님은 언니의 속마음을 충분히 알리라 생각해요... 멋진 따님이니까요. ^^

2011-08-02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0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인의 다른 시들도 읽어보셨지요? 읽는 사람을 때로 당황하게도 하고, 솔직하기도 하고, 뻔뻔한 것 같기도 하고, 흔한 이름인데도 한번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시인이어요.

오늘 아침 마지막에 한번 꼭 안아주는 순간, 모든 게 스르르 녹아내리지 않았을까요? 큰 따님이요...

프레이야 2011-08-01 18:54   좋아요 0 | URL
아뇨 처음 만나는 시인이에요. 나인님은 다른 시도 읽어보셨군요.
안 착해 보이는 착한 시^^
애가 부쩍 마음적으로 기대고 싶어하는데 제가 잘 못 해주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이렇게나마 같이 있을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위로 고마워요 ^^
평안한 저녁 보내세요.

진주 2011-08-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걸 보니 왠지 시가 싫어지는데요?
에이~ 시답잖아~ㅎㅎ

ㅎㄱ님댁 고3은 얼굴이 하얗도록 공부하나봐요.
우리집은 어제 등산 갔어요.
가족 행사라서 고3도 예외는 아니죠^^;;

프레이야 2011-08-01 18:56   좋아요 0 | URL
진주님의 언어놀이는 늘 기발해요.
시답잖아 ㅎㅎ 동의해요.ㅋ
공부보다, 원래 하얀데다 바깥활동 안 좋아하고 그런 점이 저랑 닮았어요.
제가 고만할 때 무지하게 창백했거든요.
가족행사로 등산요? 에고 전 더워서 시러용.
아들은 좋았겠어요.


라로 2011-08-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거나 첫딸이라 더 그럴까요????
저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프레이야님의 잘못이라고 생각 할래요,^^;;
저도 그렇걸랑요,,ㅠㅠ
무조건 사과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세요. 사랑 팍팍~~~응?
빨래 삶다가 깜빡 졸았어요. 졸다가 무서운 느낌이 들어 퍼뜩 정신 차리고,,ㅎㅎㅎㅎ

프레이야 2011-08-02 10:09   좋아요 0 | URL
네, 제 잘못이 맞아요. ㅠㅠ
어제밤에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로 맺은 메시지 보냈어요.
"ㅎㅎㅎ 안녕히 주무세요." 이렇게 쿨하게 답장 왔어요. ^^
빨래도 삶고 나비님은 진짜 몸이 몇개에요? 응??ㅋ
졸다가 무서운 느낌 들어 놀라 깨는 기분, 아 그거 알아요.
무서운 느낌 드는 거 그게 꼭 이유가 있나요?뭐? 사는 게 다 무서운 거지.ㅋ

순오기 2011-08-02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테는 체면 때문에라도 무례하게 안하는데~ 그래서 가족이 제일 만만하다잖아요.ㅜㅜ
나도 울딸 고3일때 편들어주지 않고 내처서 애를 서럽게 했어요.
엊그제 일욜엔 해사 시험친다고 집에 들렀던 아들한테 문 열어주었다는데, 왔다 간 것도 모르고 잤다니까요.ㅜㅜ
그래도 가족이라 그런저런 허물을 서로 보듬고 덮으며 사는거지요.^^
김민정 시인~ 기억할게요.

프레이야 2011-08-02 10:13   좋아요 0 | URL
네, 언니 만만하고 편안하니 그렇다고 이해해주는 딸이라 고마워요.
엄마가 좀 모자라서 미안하지만요. ㅠ
언니도 그래 편안하군요.ㅋㅋ 그래도 언니는 다른 때에 열심히 정말 잘 하시잖아요.^^
제 허물만 너무 많이 보이는 거 같아서 헐~
그래도 이렇게 가끔 찡찡거리면 얼른 달려와 위로해주시는 여기 벗들 있어서 좋아요.

뽀송이 2011-08-0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글을 이제야 보네요.^^;;
프레이야님도 고3 엄마노릇 힘드시죠?
아니면 이 여름이,,, 그냥 엄마라는 처지?가 힘든 건가요?ㅎ ㅎ
저도 작년에 고3 아들 겪으면서 뭐랄까??
막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에 힘들었어요.^^;;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는 없지만요.ㅎ ㅎ ㅎ
많은 분들이 그런가보더라구요.^^;;
따님도 수시 써야죠? 학교, 학과 결정은 하셨어요?
무더위에 님도 따님도 건강관리 잘하셔요.^^
일단 건강해야 뭐든 합니다.^^

프레이야 2011-08-11 01:17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고3엄마 선배로서 어떠셨어요?
남의 일일 땐 잘 몰라도 자기일이 되면 확실히 다르죠.^^
갈수록 살아가는 일이 무섭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해요.
학과는 아이가 꼭 가고 싶어하는 데가 있어서 결정되어 있어요.
지금 무더위보다 더한 불안과 싸우고 있을 딸아이를 위해 그저 마음만이랍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