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신작을 낭독녹음 하고 있다. 반쯤 했는데 역시 김훈 방식의 소설이다.
자주 쓰는 단어들은 여전하고 서사보다 특유의 사유와 문체에 집중되는 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역시 매력적인데 가령 아래와 같은 구절(접힌 부분)은,
작가가 삶의 나신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마치 구질구질한 삶의 눈꼽 낀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망연히 씻어주는 느낌이다.
이 소설은 아무래도 제목에서 혹시 연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낭만적인 '젊은 날의 숲'이 아니라
실핏줄과 튼살과 꿰멘 자국까지 다 보이는, 정밀하고 적확해서 떨림이 오는 상처의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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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떨어지면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돌이켜본다'는 이 말이 도덕적으로 반성은 아니다.
돌이켜본다는 말은 돌이켜 보인다 라고 써야 옳겠다.
보여야 보이는 것이고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닐 터이다.
돈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우 보이는 수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돈 떨어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계가 막막해진 저녁에 오래전에 죽은 말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는 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던 그 구매력이 빠져나가면서
돈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인데,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세는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리 그 자체여서
거기에 약간의 속임수가 섞여 있어도 안정을 누리는 동안 그 속임수는 자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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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가수 하덕규의 노래 '숲'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김훈의 인터뷰 장면을 보면 강직한 인상이지만 생각보다 부끄럼도 타고 내성적일 것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가시를 괜스레 잡아떼고 있는 모습도 꼭 내 아버지를 닮았다.
시인과 촌장의 맴버 하덕규의 '숲'이다. 하덕규는 내가 좋아하는 '한계령'을 만든 가수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