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마음>을 리뷰해주세요.
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 한 구석에 달팽이가 그려진 이 책을 다 읽고 문태준 시인의 '맨발'을 다시 꺼내 읽었다. 시에서 느꼈던 느림보 마음이 이 수필집에서는 긴 여러편의 산문시 같은 문장에 담긴 것 같았다. 그의 '맨발'로 느림보 마음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시간은 역시 느리게 흐르고 그의 발걸음은 역시 느리게 내딛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랑도 느리고 느긋하다. 그래서 더 속깊어 보인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 문태준 시집 <맨발> 중 '맨발' 일부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느림보 마음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처럼 들렸다. 문장을 만나보니 모두 느리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여유롭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은 답답하고 행간이 넓은데도 문장이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이렇게 무사태평한 문장이란, 도저히 읽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처음엔 들었다. 공교롭게도도 내 마음이 전혀 느리게 가지 못할 때였다. 근래 내가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여유가 없어서'라는 상냥한 힐난이었다. 상냥함을 조심스레 가장했지만 그 뜻을 모를 리 없다. 내 성정이 원래 여유가 없고 조급하고 다혈질이다. 보기보다 그렇다. 내가 여유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건 어찌보면 내가 가장을 할 줄 모른다는 말도 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해 초중반까지 좋은 글귀들이 마음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았다. 문장이 가슴에 와닿지 않으니 무겁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이 책이 오히려 힘겨웠다. 나로선 마음이 복잡할 땐 오히려 지식습득용의 책이 낫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이 조금 힘들었던 건 순전히 내 거친 마음밭에 탓을 해야한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자면 내 반성(?)이 어쩔 수 없이 나와야될 것 같다.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읽어나갔다. 단어 하나하나 어렵거나 치장한 것이 없다. 말을 에둘러 고상해 보이려는 흔적도 없다. 미풍을 마시며 시골길을 유유히 걷듯 한가롭고 느긋한 풍경을 자아낸다. 풍경! 이 책을 가장 잘 말해주는 단어같다. 시인은 책의 마지막 장에 "나의 기도는 풍경을 떠올려 그 풍경이 내 마음속에 살게끔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당신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풍경을 떠올리는 것으로써 나의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라고 적고 있다. 평생 농부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순박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비롯해 유년의 가난하고 소박한 기억들, 지금의 가족에 대한 웃음띈 이야기, 스쳐지나가는 마음의 풍경과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까지, 어느 것에도 진심과 애정이 조촐하니 담겨있다. 형식을 따져 읽을 것도 없고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저자의 생각과 느낌을 따라 쉬엄쉬엄 읽으면 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위로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황폐해진 마음이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모난 성정이 조금은 깎여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한 권 읽었다고 당장 그리 될 리 없지만 상당한 위로와 은근한 충고가 된다. 잔소리나 힐책이 아닌 애정어린 충고, 예전에 말수 적으신 외할머니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할 듯 말 듯 건네주시던 그런 말씀처럼, 순하고 평화롭다. 요즘 시대에 이런 종류의 문장을 만나는 일은,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몇 십 년 전의 글인가 싶을 정도로 예스럽고 촌스럽다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험악하고 뾰족한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 무공해 언어의 느린 산문시(같은 에세이)가 주는 느낌이 특별하다.   

느린 마음, 느린 열매, 느린 닿음, 느린 걸음. 이렇게 4개의 장으로 나눠 실었지만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사계절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자연의 크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깊고 따뜻한 인식, 일상의 작고 하찮은 물건에 대한 소중한 느낌도 사람에 대한 애틋한 감정 못지 않게 작은 감동을 준다. 느린 마음을 위해서는 마음구석을 비워두고 깊은 강으로 나아가라 한다. '빈그릇에 담긴 물'이 되라 한다. 물은커녕 불같은 내가 그때그때 대응하려고 바둥거렸던 일들을 돌아보게 하는 글귀는 이런 것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껴 있는 시간입니다. 비껴 있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입니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입니다.(96쪽)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펴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앞에서는 물론 화가 나는 그 순간의 시간을 살짝 비껴서 있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수히 늘어놓은 독설과 소금 뒤집어쓴 미꾸라지처럼 군 내 성정을 감수해준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의 문장은 그저 감상적이거나 연약한 말놀이를 하고 있지 않다. 유연함 속에 강건함을 지키며 그것을 탄탄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더위를 못견뎌한다. 친정엄마도 그랬다. 아마도 40 고개를 넘으면서부터가 아니었나싶다. 생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과 겨울을 맞는 사람들에게 계절로서의 여름은 하나의 은유이기도 하다. 가령 이런 문장은 폭염같은 생을 얼마나 굳건하게 나아가라 전하고 있는가. - 여름은 모든 풀과 나무를 무성하게 자라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일념에 대해 말합니다. 한결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용기백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을 무릎으로 삼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220쪽)  여름은 그리하여 무너진 자를 일으켜세웁니다. 절망의 못에서 우리의 삶을 건져올립니다. 여름은 처음도 끝도 없습니다. 중간만 있습니다. 진행되는 시간만 있습니다. 여름날의 저 들찔레처럼. (221쪽)  

수수하고 정감어린 문장을 읽어가다가 깨끗한 우리말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예를 들어,  

1. 그 풍경은 너무나 장엄해서 넷 에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153쪽)  

2. 내가 어물전에서 일하는 분과 대화를 하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곁말을 겁니다.(161쪽) 

3. 살면서 입말을 주고받다 어느덧 정이 들기도 하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때에도 덧정이 생겨납니다. 요즘은 가족과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는 시간이 덧정이 생기는 시간입니다. (225쪽)  

 

지금의 내가 제일 마음에 품어야할 문장은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 산다는 것은 마음속에 오름 하나씩을 품고 산다는 것은 아닐는지요. 부드럽게 올라가고 내려오는 오름의 능선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오름처럼 유순하다는 그 말의 의미를. 오름처럼 완만한 말, 오름처럼 서두르지 않는 심성과 생각의 품 말이지요. (244쪽)

 
   

 

이 책에 실린 모든 문장이 바로 저자가 말한 '오름처럼 완만한 말'이다. 가끔 마음이 복닥댈 때면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을 문장들이다. 오르다 다리 아프면 중간에 퍼질러앉아 쉬어도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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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8-2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책을 읽은 소감이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뻐요. 그가 골라 쓴 고운 언어들을 저는 활용을 잘 못하지만 많이 배워요.

프레이야 2009-08-22 23:31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서평으로 처음 이 책을 알게 되어 담아두었는데 서평단도서로
왔지 뭐에요. 기뻤지요.^^ 요즘 제 마음이 사막이 되어 문시인의 고운 언어밭을
좀 캐고캐야겠어요.

순오기 2009-08-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복닥댈 때면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을~ 오르다 다리 아프면 중간에 퍼질러앉아 쉬어도 좋은'
님의 리뷰도 충분히 한 편의 에세이로 읽혀요. 이주의 마이리뷰, 혹은 블로거 특종으로 뽑힐 것 같은데요.^^

프레이야 2009-08-23 22:21   좋아요 0 | URL
하이고~ 오기언니^^
늘 좋게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니 고마워요.

꿈꾸는섬 2009-08-2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데요.^^

프레이야 2009-08-23 23:48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해지는 문장들이에요.^^

맥거핀 2009-08-2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책이군요. 그런 책을 읽음으로써, 뭔가 바뀔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와중에서도 이 리뷰도 다다다다 읽고 있군요. 아..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프레이야 2009-08-25 07:53   좋아요 0 | URL
다다다다... ㅎㅎ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성정도 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같은 경우에요.^^
조급하면 지는 건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