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외우는 시 한 편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나요 近來安否問如何


사창에 달빛이 비치니 첩의 한은 깊습니다. 月到紗窓妾恨多

 
몽혼에게 흔적을 남기게 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당신 앞 돌길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半成沙

 

                                              - 이옥봉 '몽혼'

 

묻노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달이 사창에 이를 때면 저의 한은 깊어지곤 한답니다.
만약 꿈길의 걸음에 자취가 생긴다면
문 앞의 돌길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검색을 해보니 이렇게 번역한 시도 있네요. 전 위의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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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편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옥봉의 몽혼이란 신데 들어봐."  그러곤 위의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보, 난 이 시가 요즘 참 좋아."

이옥봉은 조선시대 여류시인인데 연도가 불확실하지만 선조때 양반 '봉'의 서녀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생을 마감한 조한의 소실이기도 했습니다. 32편의 시를 담은 <옥봉집>이 후손에 의해 전합니다. 평생 멀리 떠나있는 남편을 그리워 했다고도 합니다. 읊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는 운율에 애잔한 정서가 첩으로서의 스산한 그리움을 잔뜩 배어 나오게 하는 싯구. 그믐달의 맵시마냥 처연합니다.

옆지기는 홈페이지에 한옥의 나무문을 찍어두고 이 싯구를 실어놓았더군요. 사십 고개를 고되게 넘어가는 남자. 일에 지치고 가족의 무게에 버거워하면서도 거뜬히 이고지는 어깨가 때때로 쓸쓸해 보입니다. 그리움은 욕망으로 생겨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걸 어쩌지 못해 가눌 길 없이 그리워하고, 잡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삽니다. 저는 이제 그리움을 버리기로 합니다. 사실 허울좋은 감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일까요.

대신 첩의 마음으로 살기로 합니다. 본처의 오만함과 무감각함과 텃새기질보다는 부족함에 안달하고 조바심 내면서도, 가끔은 환청에 시달릴 정도로 귀 밝히며 내게 다가오는 것들에 예민한 촉수를 세워보렵니다. 물수제비 번져가는 공명과 반향의 무늬처럼, 신경줄 같은 현의 감각처럼, 때로는 손톱 밑의 작은 떨림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작동하는 첩으로 살까합니다. 숨죽여서 낮게, 욕심없이.. 작은가슴, 새가슴으로.. 하지만 그런 까탈스러운 성정이 거추장스러울 때면 혹여, 곰처럼 아무것도 모른 척 겨울잠도 잘 겁니다.

 

요사이는 당신 어찌 지내시온지요?

달빛 살빛 비치는 창 두드릴 때면 새가슴에도 그리움 사무쳐와요

몽혼의 걸음으로도 발자욱 남길 수 있다면

돌같은 당신 마음 문전의 반은 모래가루 되었을 겝니다.

 

 (이건 제가 무례하게 재해석한 몽혼입니다^^)



                             

댓글(16) 먼댓글(1) 좋아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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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 길(夢魂)
    from 한사의 서재 (휴식 중입니다) 2007-08-16 21:10 
                             동짓달 긴 밤 - 김원숙 作 1992 Oil on Linen 122x56cm          
 
 
조선인 2007-08-1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제가 30대에 외우게 된 시가 있다면 이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57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 3번 참여했어요. 호호~
1번은 음냐음냐.. 어려워요..
꾸벅^^

글샘 2007-08-1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가 한시로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있었거든요.
좋지 않냐고? 애들에게 한참 설명을 했더니...
시험에 나올 것만 새카맣게 적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남학생 반만 수업해서 그런 거였나 모르지만...
그 중에 이 시를 정말 좋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있었을는지도...^^

프레이야 2007-08-16 18: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런 시를 좋아하는 옆지기는 저보다 더 감성적인 건가요?
한시로도 읊어주더군요. 이옥봉의 다른 시들도 참 맑고 고아하더이다.
그나저나 시커먼 남학생들이 과연?? ^^
걔들이 이런 맘을 알까요? ㅎㅎ

마노아 2007-08-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시도, 재해석도, 아... 너무너무 좋아요(>_<)

프레이야 2007-08-16 18:2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좋게 봐 주셔서 넘 고마워요~~~ ^^

비자림 2007-08-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재해석이 더 좋군요. 잘 읽고 가옵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7   좋아요 0 | URL
아니, 시인 비자림님 와락~
재해석시를 더 좋다고 봐주시니 기분 좋아요.
전 님의 재해석시가 더 멋지게 나올 거라 믿는데요. 님의 시를 읽고파요..
넘 오래 되었다구요..ㅎㅎ

향기로운 2007-08-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우고싶네요^^ 조선인님덕분에 좋은 시 알게되어 기뻐요^^ 혜경님의 재해석 시도 좋아요~

프레이야 2007-08-16 18:28   좋아요 0 | URL
향기로운님, 전 시 잘 못 외우는데 이건 짧으니까 ^^
조선인님 덕분에 저도 한 번 적어보고 좋았네요. 헤헤..

비로그인 2007-08-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치는 마음을 일으켜주는 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9   좋아요 0 | URL
민서님, 덥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지치는 요즘이죠.
조금 일으켜 세워드렸다니 기쁘지요^^

비로그인 2007-08-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께서도 이 시를 암송하시는군요..
제가 읽었던 몽혼(=꿈길)을 소개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21:29   좋아요 0 | URL
한사님, 아직 휴식중이신거에요?
너무 반갑습니다. 가서 보고 추천 누르고 왔어요.
김원숙의 그림이 서늘합니다.
저를 위한 특별한 그림과 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봤을때는, "돌이 모래가 된다는"표현이 참 유치하게 느껴졌었어요... 좋은 경험(!)을 한 지금은, 제 마음을 투영해서 읽게 되네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2:06   좋아요 0 | URL
어머, 제이드님 고등학교때 배우셨군요.^^
그 좋은 경험이 뭔지 대략 알 것 같아요. 덥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