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탄생


요새 오는 책들 귀퉁이가 자주 찌그러져 있다. 찢어지고 구겨진 것도 있다. 그냥 읽어도 되지만 새 책이니 새 책다운 모양새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다. 책 포장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이앞에도 세 권이나 그래서 교환 신청해 받았는데 이번 박스에서도 이 책 포함해 세 권이 그래서 교환신청 해두고 읽는다.

다음달에 있을 대장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넷이서 속닥하니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케이크와 꽃과 와인에 세이로무시가 있는 조촐하고 맛난 저녁이었다. 식사 후 비건 베이커리 집의 쌀로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폭신폭신 느끼하지 않은 맛에 감탄사 연발.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우리는 각자 뽑아온 대장님의 글 중 한두 문단을 낭독했다. 나는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와 레이크 루이스를 배음으로 깔아드렸다. 지금 이 나이도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칠십 년을 넘기는 생은 또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 늙음을 피해갈 수 없는 대장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장을 재생하고 남기게 될까. 작품을 완성시키고 재생시키는 건 독자의 몫. 좋은 독자를 품는다는 건 작가로서 축복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중에 비행기를 탈 때마다 중요한 통장이나 열쇠 그런 것들을 남편이 아니라 딸아들에게 말해두고 떠난다고 한 분이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비행기 탈 때는 아들 딸 갈라서 엄마 아빠가 대동하고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사고가 나 죽은 이들도 있다고. 헉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난 바로 9.11을 떠올렸고 세상의 일은 내 재간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라고 평소처럼 생각했다. 난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사는가 싶다가 방금 “오, 윌리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래 밑줄긋기.
이거지! 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나 계획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이다. 방만한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나는 그냥 불안해 하지도 애쓰지 않고 운명의 뜻대로 살 것이다. 그러고 싶다.

오, 윌리엄! 영문판 표지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동네 번역본 받아보니, 표지 깔끔하다.

나는 윌리엄이 우리가 독일에 갔던 그해 여름에 내가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당시에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나 자신을 충분히 잘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윌리엄의 어머니는 바로 전해에 돌아가셨고, 우리 딸들은 각각 아홉 살, 열 살이었다. 딸들이 두 주 동안 여름 캠프를 떠나서 우리가 독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나면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두려워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나중에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들이 우리 옆을 쌩쌩 달려가는 아우토반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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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2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출판 기념회에서 구라모토 피아노 선율에 맞춘 프레이야님 낭독^^
오😍프레이야님 ^^
오디오 플레이 올려주세요😻

프레이야 2022-10-22 20:57   좋아요 2 | URL
ㅎㅎ 그냥 속닥한 자리였어요.
오래 봐온 분들이라 오붓했어요. 저 낭독하다가 울컥해가지고 또 ㅎㅎ

stella.K 2022-10-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
엄창난 말이군요.

그런데 왜 대장님께선 마지막으로 책을 내시다는 겁니까?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입니다.
뭐 이런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는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작가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말이 옳다면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하여.ㅋ

프레이야 2022-10-22 20:58   좋아요 1 | URL
아뇨 ㅎㅎ 출판기념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굽요. 수필집 포함 저서가 아주 많습니다. 이번엔 미국 수필 번역집과 메타에세이 비평집 두 권요. 글이 수필이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분이시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ㅎㅎ 열정이 엄청나신 분.

stella.K 2022-10-22 21:0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근데 대장님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이리 말씀 하시니 궁금한데요? 어떤 책인가..?흠

프레이야 2022-10-22 21:04   좋아요 1 | URL
11월에 책 나오고 사정이 허하면 소개해 볼게요. 저녁이면 제법 추워요 스텔라 님 ^^

바람돌이 2022-10-22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이런 문장 보면 정말 프레이야님 작가 맞으심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까요? ㅠ.ㅠ
저도 그냥 운명의 뜻대로 사는 쪽입니다. 그걸 피하려고 한다고 피해질 거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다른 비행기를 타고 하는 사람이 있나봐요. 신기하네요. ^^

프레이야 2022-10-23 00:21   좋아요 1 | URL
긴장되면서도 감동하시는 것 같아 찡했어요 ^^. 사는 일이 갈수록 두려움이 많아지지요. 저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많아서일까요. 저도 놀랐어요.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부부가 다른 비행기를 타려고 했다가 말았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문장을 보는 순간 어제 들은 그 얘기가 떠올라 더 놀랐네요 ㅎㅎ 날마다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어떤 것들! 새롭고도 낯익은.

페크pek0501 2022-10-23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이 난리?인지 저자를 보고 알았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3 20:18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렇지요 페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