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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 시간 ㅣ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11
알폰소 루아노 그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글,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요즘은 글짓기라는 말 대신 글쓰기라는 말이 합당하다고 하여 ‘글쓰기’ 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글짓기라고 하면 작위적이고 도구적인 느낌이 나고, ‘짓기’보다 ‘쓰기’가 확실히 자연스러운 욕구를 대변하는 것 같은 낱말이긴 하다. 초등학교 때 글'짓기'시간이 종종 있었다. 요즘은 환경 글쓰기 대회 같은 게 많이 열리지만 그때는 ‘반공 글짓기’가 가장 많이 열렸다. ‘반공’이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했을 아이들이 써내는 글이란 그저 주입되거나 학습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뻔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짓기 시간>>이라는 제목은 책내용의 분위기에 잘 맞다. 부정적이라 해도 제목이 주는 향수는 책표지의 그림과 함께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지난 현대사와 아주 흡사한 집단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내용에 놀랐다. 이런 소재도 그림책의 이야깃감이 되구나. 다시 한 번, 소재의 내적검열이란 장치가 더 무서운 억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책의 소재라고 해서 한정하려 하지 말고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겠다.
이 책에서는 “군부독재", "반독재”,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 거야. ” 이런 글들이 표현 그대로 나온다.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도 않고 특정 시대를 지목하지도 않고 특정인물을 지목하는 내용은 더구나 없다. 자유와 인권의 탄압을 소재로 하는 그림책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거의 상징과 은유로 표현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모호한 관념만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책은 구체적으로 명료한 표현을 쓰고 문제로 바로 들어가게 하므로 아이들과 오히려 쉽게 이야기를 풀 수 있었다. 이런 장점을 안고, 조금은 이르다 싶은 3학년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역시나 아이들은 군부독재, 반독재, 이런 용어부터 물어왔다.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너무 복잡하지 않게 이야기를 해주니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고 더욱 관심을 갖는 아이는 눈망울을 빛내며 책상 가까이 몸을 당겼다. 이 책을 아이들의 눈높이로 소화하자면, 우선 ‘독재’라는 단어부터 이해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사가 짓밟히는 행태가 아이들 주변이나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함께 토론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가장 쉽게는 학급토의시간의 예를 들었는데, 안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음에도 모두 묵살하고 반장은 자신이 좋은 쪽으로 투표도 없이 결정해버리는 경우다. 아이들에게 네가 반장이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니 다수가 가야할 방향과 소수의 바람, 모두를 안고 갈 수 있는 현명한 대답들이 나왔다. 기특하게도..
<글짓기 시간>의 작가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다. 작년에 91세로 저 세상으로 간 칠레 군부독재의 주역 피노체트, 그의 독재를 피해 아르헨티나와 독일 등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을 하였고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으로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를 쓴 작가다. 그림책으로 나온 ‘글짓기 시간’은 알베르토 망구엘이 편집한 단편 선집 <신의 첩자들: 압제에 저항하는 이야기>에 실렸던 작품으로, 어린이를 위해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피노체트는 1973년 유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당시 칠레 대통령 아옌데를 자살하게 한 장본인이다. 1990년 대통령직을 넘기고 군 총사령관에 머물다 1998년 다시 종신직 상원의원으로 진출했다. 그는 2006년 11월 25일 91세의 생일을 맞아 집권 기간의 ‘정치적 책임’을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해 12월 10일 심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칠레 시민들은 산티아고의 거리에 몰려나와 환호했다. 피노체트 집권 시절 고문을 당했던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지 않을 것이며 3일간의 공식 애도기간도 없다,고 밝혔다.(동아일보 2006-12-12) 한편 놀라운 것은,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그가 사망한 산티아고 군병원 밖에서 그의 초상화를 내걸고 추모행사를 열었다는 기사내용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박, 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해주었더니 아이들이 경악했다.
<글짓기 시간>의 화자는 열 살 아이 페드로. 갈색 머릿결과 균형잡힌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남자아이다. 생일선물로 고무공이 아닌 가죽축구공을 받고 싶은 평범한 아이다. 페드로와 친구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느닷없이 받아든 글짓기 제목은 “우리 식구가 밤마다 하는 일”이다. 검은 안경을 쓰고 군복을 입은 로모대장이 들어와 내어준 이 제목 앞에 페드로와 친구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지고 그들이 속삭이며 나누는 대화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배어있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동안 페드로의 고민하는 마음을 잘 보여주는 건 글보다 그림이다.
다른 좋은 그림책이 그렇듯, 이 그림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림의 힘이다. 글은 상당히 자제되어있고 많은 말을 감추고 있다. 군부독재시절, 밤마다 듣는 라디오방송이나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이야기도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했듯, 이 책의 글은 늘 누군가의 무서운 눈초리와 밤말을 듣는 쥐새끼를 의식하는 것처럼 아껴서 풀린다. 그런 속사정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그림들이 묵직한 감정을 전한다. 어른들의 고민, 아이들의 불안 그리고 드러내어 말하진 않지만 누구나 느끼고 있는 부당함에 대한 분노, 억눌린 생각과 감정. 착 가라앉은 색감과 세밀한 표정의 묘사 그리고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억압된 분위기가 모든 걸 전달해주고 있다. 체스와 체스판으로 끝낸 마지막 장의 여운은 앞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게 절망 속에서도 밝은 기운을 불어준다. 그림은 알폰소 루아노의 작품인데 글의 어조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면서, "르포적인 상상력을 펼치고 싶다" 고 말한 그의 염원대로 조화로운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출했다.
우리 식구가 밤마다 하는 일! 페드로가 얼마나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확인해 보시기를 권한다. 스프링공책을 부욱 뜯어내어 쓴, 그 애의 글을 읽어볼 때는 마지막 글귀 ‘알림’을 주시하시길... 흐뭇한 반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