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한강 지음 / 비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엄마가 집에 돌아오셨다. 일주일이 넘는 동안 병원에서 검사받고 수술날짜 조마조마 기다리고 8시간의 긴 수술을 받고, 이제 집에 계신다. 방금 통화를 해보니, 아직 배변이 순탄해지려면 적응기간이 필요한지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고 계신 눈치다. 6월 27일 아침, 엄마가 병원환자복을 입고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동안 그런 호강 한 번 누릴 틈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오신 분이기에 더욱 낯설어보였다. 수술예정 한 시간 전, 간호사가 오더니 콧줄을 꽂기 시작했다. 위 속까지 내려가야 하는 초록색의 기다란 줄이 사정없이 엄마의 왼쪽 콧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평소에도 통증을 잘 못 견뎌하시는 엄마는 무척 고통스러워하시며 손을 내저었다. 조금만, 다 됐어요. 잘 참네, 엄마. 고통이 언제 예고하고 찾아오던가. 토할 것 같다고 계속 호소하는 엄마에게 그냥 기분이 그런 거니 삼켜야한다는 간호사의 말만 전하며 곁에서 바라볼 수밖에 내가 해드릴 게 없었다. 엄마의 짧지 않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마는 살아오면서 여행가방을 챙겨본 일이 거의 없다. 아니 내가 본 기억으로는 단한 번도 없다. 일주일간의 병원생활을 여행 삼아 엄마는 가방을 두 개나 싸셨다. 콧줄을 꽂은 엄마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나는 옆에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며 엄마의 가방속을 살폈다. 먼저 눈에 뜨인 건 하얀 바탕에 자잘한 꽃무늬가 나염된 팬티들. 곱게 개어 작은 비닐팩에 차곡차곡 넣어오셨다. 노랑꽃, 파랑꽃 두 가지의 색상으로 골고루 새로 산 듯했다. 분명 새것이었다. 수술 전 속옷도 모두 벗어야하고 나중에 수술을 하고 나서는 시큼한 분비물을 받기 위한 커다란 패드를 하고 계셔야 하니 아무런 필요가 없을 껍데기들. 그래도 퇴원하는 날엔 이걸로 갈아입고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그날 내 눈에 처음 뜨인 그 보송보송한 팬티들이 엄마의 마음이다. 그속엔 엄마의 '봄날에 대한 그리움, 여자로서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에 대한 생의 자부심' 같은 게 원색으로 프린트 되어있다. 그 외에도 나무젓가락, 빨대, 영양크림에 헤어롤까지, 그리고 보호자가 덮을 얇은 이불에 쿠션까지. 엄마의 여행가방 속엔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한 가지 깜박, 책을 못 넣어 왔다고...

 수술 후 4일쯤 지나고 거동이 좀 나아지자 병원 가톨릭원목에서 빌려주는 책을 한 권 얻어 읽고 계셨다. 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을까. 어? 이 책 집에도 있는데. 책 읽게 될 것 같지 않아서 안 갖다드렸는데... 3일 정도 엄마는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하셨고 그 바로 아래 보호자침상에 모로 누운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는 병실 바로 앞에 의자를 내어놓고 복도천장의 밝은 형광등 불빛아래서 꼬박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엄마가 좋아하실 만한 시집이라도 갖다드릴 걸 그랬나 싶었는데 이럭저럭 퇴원날짜가 다가왔다. 담도암이 재발하여 들어오신, 옆 침대의 아주머니는, 공부 다 했소?, 이렇게 간간이 창밖을 내다보는 엄마에게 묻곤 하셨다.

 엄마의 수술 하루 전날, 아무 걱정 말고 오늘밤 푹 주무시라고 전화를 드린 뒤, 뒤숭숭한 마음으로 펼쳐든 책이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다. 알라딘의 아름다운 님이 선물로 주신 이 책을 그동안 고이 꽂아두고 손을 안 대고 있었는데 내 손이 자연스럽게 이 책에게 뻗어갔고 흡착된 듯 책장을 넘겨갔다. 부록으로 들어있는 음반은 이미 여러 번 들었고 책표지만 뚫어져라 보았던 책이다. 흑백 사진 한 컷. 반듯한 창이 하나 있고 창밖으론 물방울마냥 아롱대는 나뭇잎들이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위로 ‘가만가만’이라는 붉은 글자는 가볍게 어깻짓을 하는 듯 갸우뚱하니 서 있다. 창가에 놓여있는 낙서장 같은 노트와 가죽손목시계, 열쇠꾸러미, 물을 마시다 남겨둔 유리잔 그리고 여권. 소속이나 존재의 증명수첩 같은 것일까. 작가는 지금 이 창가에서 두어 발짝 물러서 한갓진 벽에 기대어 창밖을 보고 있다. 분명! 그녀의 음색은 속지처럼 고운 라벤더 색이었는데 그녀의 글은 조금 더 연하게 푼 라벤더 색이었다.

 작가, 한강을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차분하고 맑은 음색만큼 그녀의 글들이 내게 가져다준 위로감이란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잔잔하였다. 무덤덤한 척 했지만 떨고 있을 엄마 그리고 나.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았다 말할 수 없는 젊고 어여쁜 작가의 글이 조근조근 들려주는 목소리가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줄이야. 고통이 느닷없이 찾아오듯 위무도 그렇게 느닷없이 덮쳐오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인연이란 적절한 '때'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숨소리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을 것 같은 한강의 섬세한 마음결을 따라 서서히 내 마음이 풀려갔다.

 

 마음의 파장이 몰고 오는 리드미컬한 손길,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글도 노래다. 세상의 모든 음파를 몸의 현으로 받아서 되돌려 풀어주는 그녀의 글은 충분히 소소하고 그래서 더욱 값진 공감대를 울려댔다. 유년의 기억과 성장기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그녀가 놓치지 않고 몸으로 담아내는 체험과 정서, 성년이 되어서도 녹록하지만은 않을 생의 편린들이 그녀의 노래 같은 글 속에서 소박한 빛으로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걸 나누어 갖는 나는 뜻밖에 다가오는 위로의 말들에 눈시울이 젖어왔고 떨리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어 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흑백 사진첩을 넘겨가며 울고 웃던 사연들을 들은 듯, 누구에게나 있었음직한 추억의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가장 마음에 든 장은 ‘2장 귀기울이다’이다. 그녀의 미려한 마음의 현을 울려댔던 노래들, 그 하나하나의 가사와 사연 그리고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고유한 감정의 선율과 누구와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내가 좋아하고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하는 'You Needed Me'를 비롯해 이십대 시절 언젠가 딱 한 번 주왕산을 오르며 직장후배와 불렀던 ‘보리밭’까지. 그리고..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 let it be...

 내가 요즘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이적의 3집, 두번째 노래 ‘다행이다’이다. 엄마는 수술 후 이틀이 지나자 거울을 수시로 보며 머리를 빗고 기미가 늘었다느니 얼굴이 얄궂다느니 엄살을 부렸다. 수술을 마치고 난 직후 중환자실에서 본 엄마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가슴이 아팠는데 이틀이 지나자 엄마는 환자 같지 않게 복사꽃 같은 혈색이셨다. 그렇게 엄살섞인 말을 하는 건 얼굴이 참 좋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손빗으로 빗곤 했는데 한 번은 뒷머리를 내 손으로 빗어드렸다. 숱이 없고 모발이 약한 엄마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너무 부드러워 부서질 것 같았다.

 그대를 만나고/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그대를 만나고/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그대를 안고서/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다행이다/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그대를 만나고/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꼬리말 : 이번 엄마일로 마음 써주시고 기도해 주신 그대, 아름다운 님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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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8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08 20:38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전 일주일간 매일 들락거리고 몇밤은 밤새고
그랬던걸로도 고단함이 쌓이더군요. 할머니 병간호까지 지극으로 하셨다니
토닥토닥.. 님, 살아갈수록 장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싶어요. 그중에서
도 건강은 더욱 그렇구요. ^^

비로그인 2007-07-0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술 후에 여자환자분이 머리를 빗으면, 담당의사들이 그걸 보고
'오.. 많이 회복되셨구나.' 한답니다.
어머님의 회복 속도가 빠르시군요. 다행입니다. 혜경님.


프레이야 2007-07-08 20:39   좋아요 0 | URL
네, 한사님, 그런가봐요^^
드시고싶은게 많은가본데 조금씩 가려가며 적응하시면 좋겠어요.
아직 장기능이 정상이 아닐텐데 마음이 앞서가니 말에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07-07-0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참 열심히 사시는것 같아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셔도 그걸 그대로 넘기는 법 없이 이토록 긴 글로 감상을 얘기하시니 말여요. 그토록 열심히 사시는 분이시니, 삶도 내치지 않을거라 보여집니다. 어머님의 회복은 그래서 당연한 듯 보여집니다. 다행이예요 혜경님.

프레이야 2007-11-08 08: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격려 고맙습니다.^^
여덟살 연상의, 당신보다 훨씬 늙은 남편을 애처로워하는 모습에서 보았어요,
부부의 정을요. 마음은 있으면서 다정하게는 못 대하시는 그 어쩔수없음도요^^
그래도 모든게 다행이지요...

로드무비 2007-07-0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의 꽃무늬 팬티, 성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모두 눈물겹네요.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프레이야 2007-11-08 08:00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 머리밑이 훤히 보이는 머리 보며 안쓰럽더이다.
기원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7-07-0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마음고생 많으셨던 혜경님도 한 시름 덜으시길 바랄게요.
:)

프레이야 2007-07-09 12:41   좋아요 0 | URL
체셔님 기도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아직 마음 다 놓을 상태는 아니지만
얼마나 다행인지요..

2007-07-09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09 12:43   좋아요 0 | URL
님, 지금 그대로 얼마나 좋은 엄마이신데요.
고민하는 건 그만큼 나아지려는 것이지요. 아자아자, 힘내시고요..
고마워요^^

소나무집 2007-07-0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함께 밤도 새우셨군요.
한강은 대작가 한승원의 딸이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작가지요.

프레이야 2007-07-09 12:49   좋아요 0 | URL
네, 차츰 한강을 만나볼 테에요.^^
밤이면 앓는소리를 하시곤 했어요. 수술부위 통증은 무통주사로 견디기
쉬었는데 가슴이 답답하다고 숨을 못 쉬겠다고 그러셨어요. 입술도 탄다고
계속 손수건에 물 적셔서 드렸어요. 물은 마실 수 없었으니..
제가 아이를 낳았을때 옆에 며칠씩 있어준 사람이 엄마인데...

2007-07-09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09 12:46   좋아요 0 | URL
어머니 일은 잘 되시리리 믿어요!! 제 동생도 무탈하니 잘 지내거든요.
너무 걱정 마시라 말씀 드리세요. 미리 걱정한다고 이로울 게 하등 없지요.
님도 마음 굳게 먹고 기다리시구요.

홍수맘 2007-07-0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제가 위로 받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좋은 책을 만나고 가네요.
어머님의 회복소식도 종종 들려주실 거죠?

프레이야 2007-07-09 15:41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나봐요. 타이밍 같은..
다른 때 같으면 그저그랬을지도 모를 책인데 아주 적절한 때 위로가
되었어요. 엄마는 아직 다 회복된 건 아니지만 차츰 좋아질 거에요.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 가뵈려구요. 같은 시내이지만
좀 멀어요. 그래도 어쩌고 계신지 마음 써여 안 되겠어요.

2007-07-09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09 15:42   좋아요 0 | URL
속삭인님, 네 같이 기억될 거에요^^
쾌차해서 저랑 연극 보러도 다니고 예쁜 옷도 입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장표 꽃무늬 팬티 입으시고..^^

백년고독 2007-07-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일이 있었군요.
이제 다시는 병원에 가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

이 책 읽으면서 한강이라는 작가는 참으로 다재다능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프레이야 2007-07-09 15:43   좋아요 0 | URL
백년고독님, 고맙습니다.^^
정말 다재다능하다 싶어요. 소녀같은 인상에 강인함이 묻어나더군요.
글도 여린 듯 강했어요.

2007-07-11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1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kdagi 2007-08-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의 글은 대부분 심각한 것만 접해서 쉽게 읽히지 않았는데 님의 평을 보니 읽고 싶어지네요. 어머님도 앞으론 병원에 가시지 않길 바랄게요. 님도 건강하세요.

프레이야 2007-08-06 00:00   좋아요 0 | URL
전 한강의 글이 이책으로 첫만남이에요. 편안하고 위안이 되는 글이었어요.
참 맑고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어머님 일, 감사드려요.^^
지금 잘 견디며 싸우고 있어요. 장기전이라 생각하라고 말씀드릴 수밖에요..
님도 건강 챙기며 일하시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