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울의 아들>, <줄무늬 파자마 입은 소년>, <카운터피트>를 추천하며...
고체가스를 담은 양철통 2015년 12월 촬영.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공노할 기만적인 문구, 그 아래 음산한 철문이 열리는 이곳은 가장 악랄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매년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가 여기서 열린다. 2021년에는 팬데믹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온라인 행사를 진행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신에게 바쳐진 재물이라는 뜻의 홀로코스트Holocoust보다 대재앙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말한 히브리어 쇼아shoah가 맞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를 쓴다는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또 마주한다.
오시비엥침은 폴란드 구도시 크라쿠프 서쪽에 위치하는 소도시다. 오시비엥침역은 유럽 전역에서 영문도 모르고 잡혀갔던 이들을 실은 기차가 마지막으로 지나는 역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당신, 모든 희망을 잃을 것이다.’ 단테의 문장을 떠올리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했을지 모른다. 수용소 안으로 이어진 철로를 따라 기차가 들어가고 그들은 짐짝처럼 부려져 분류되었다. 노동 가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후자는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졌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가져갔던 물건은 모두 빼앗겼다. 안경, 신발, 가방, 의족, 의수에 아이의 인형까지. 이름마저 압수당하고 번호가 주어진 그들에게 소유물은 없었다. 싹둑 잘린 머리카락 더미는 카펫의 재료가 되었다. 어두컴컴한 시체소각실을 보러 가기 전, 유리관 안에 수북이 쌓인 망자들의 분신 위로 퀭한 눈동자들이 경악하는 방문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연극 <목이 마르다J’ai Soif>는 극단 ‘맥’과 아비뇽 극단 ‘발콩’이 2016년 아비뇽국제연극제 출품을 위해 협연한 작품이다. 당시 프랑스문화원 실장이 티켓을 줘서 출품 전에 이 연극을 2016년 5월 20일 부산의 동래문화회관에서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유월 아비뇽에 발길이 닿았는데 연극제 기간이었다. 연극을 보러 간 건 아니었지만 거리에 우리 연극 포스터들이 보여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예수와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동시에 떠올리며 신을 묻고 인간의 고통과 잔혹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음악극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십자가 위의 일곱 가지 말씀’과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토대로 한다. 오월 저녁 줄장미가 혈처럼 붉던 날, 극장 앞줄에 앉아 관람하며 스산한 겨울 수용소 전시실에서 보았던 망령(亡靈)을 떠올렸다. 소름이 돋았다.
소유물이 없다면 우리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이름이 아니면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모노드라마의 배 나온 남자가 던진 질문이다. 강탈된 이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듬해 봄날, 그 이름들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났다.
이스라엘 홀로코스트박물관의 이름은 1953년 건립 당시 ‘야드 바셈(Yad Vashem)’이었다.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멀리 예루살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이름의 홀’에는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깊은 우물이 자리한다. 기억의 심연을 부르는 아득한 공간에서 이름이 공명하고 원뿔형 천장과 벽에 빙 둘러싸인 수많은 사진 속 얼굴을 소환한다. 얼굴을 서로 갸우뚱 기대고 찍은 젊은 부부, 귀여운 표정을 짓는 소녀, 진지한 노인 랍비, 잘생긴 젊은 장교, 눈 맑은 소박한 처녀... 스무 개 이상의 언어로 적힌 수많은 이름을 올려다보며 기이하도록 가슴이 아렸다. 저 아래에서 어디서 들어본 아우성이 들려왔다.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린 검은 물속으로 익사한 이름들의 영혼이 오늘을 연명하는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구조되지 못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귀를 크게 열었다.
녹초가 되어 홀에서 빠져나오며 구조된 자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프리모 레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부정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다가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된다. 폴란드 제3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파시즘을 우리 시대 붉은 신호등으로 삼고자 증언록을 남겼다. <목이 마르다>가 이야기의 기반으로 삼은 이 책은 화학자인 그가 남긴 첫 번째 증언문학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수용소로 걸어가는 길을 ‘여행’이라 부르며 시작한다. 시종일관 섬세하고 면밀한 눈으로 주변과 인물을 파고들며 인간성의 본질에 천착한다. 절멸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생의 값진 소득이라 여기는 힘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 기인하지만, 인간성의 위대함을 과대평가하지도 인간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가 목격한 것은 인간성의 허약함이다. 인간성의 연약함, 인간이 열망하는 자유,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을 증언하며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내린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징후는 우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잔인한 그러나 평범한 악의 얼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얼굴은 모래성처럼 빈약한 실체감에 기반한다. 이미지만으로도 괴력을 발휘하는 집단적, 총체적 두려움이 그 얼굴의 민낯이다. 독일군이나 독일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이 책에 왜 표현되지 않았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는 얼굴 없는 대상에 대고 어떻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가라고 답변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라고 스스로 해석했다.
작품 전체에 장치된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은 『이것이 인간인가』가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는 큰 요인이다.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로 가는 길부터 일 년 남짓의 수용소 생활과 퇴각하는 열흘간의 이야기까지 흘러오면서 내내 ‘지옥’을 연상했음이다. ‘오디세우스의 노래’에서는 인간이 인간인 까닭과 인간임을 포기할 수 없어 감당해야 했을 자멸감이 절정에 이르러 직설적 어조보다 울림이 깊다. 어떤 생생한 증언이나 기록에서보다 극한의 상황에 다다른 슬픔의 극치를 느꼈다. 문학의 힘일 것이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마치 나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 구절을 들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중
담백하고 미려한 문장을 따라가며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하려는 극한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 상상도 안 되어 곳곳에서 멈춰 숨을 고르고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책을 펼쳤음을 나는 사죄해야 한다.
생은 언젠가 종결된다. 프리모 레비는 1987년 4월 11일에 그 일을 스스로 이루었다. 구조된 후 4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꽃봄 낭자한 계절에 스스로 익사하고 말았다. 혹독한 수용소에서도 실행하지 않았던 일이다. 수몰된 이름을 건져 올리고 존재증명을 이룬 세월이 더한 지옥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홀로코스트박물관 앞, 밝게 웃으며 걸어오는 군복 입은 청년들. 2017넌 3월 촬영.
- 빅터 프랭클 박사와 대조되는 삶을 선택한 프리모 레비를 생각하며. 수필미학 2021여름호 게재 원고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