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an Road - The Best Of Native American Flute Music Vol.1
Various Artists 연주 / 알레스2뮤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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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푹 빠져 듣고 있는 음반이다. 모 서재지인의 소개글로 알게 되었는데 이전부터도 인디언의 노랫소리는 나와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저 먼 곳으로부터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귓밥을 끌어당기는 ‘무엇’이었다. 인디언들은 사라져간 쓸쓸한 것들의 상징인 양, 애잔한 감성으로 현대의 뭇사람들에게 원초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Indian'이 아니라 'Native American'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처참한 박탈과 살육의 역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노래가 특별히 심금을 울리는 까닭은 슬픈 역사의 뒤안길에 돌아서서 홀로 삼나무 플루트를 불고 있는 어느 인디언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뜻밖에도 한강유람선을 탄 적이 있다. 잉크빛 어둠이 내리고 있던 봄날 저녁의 강, 저 멀리 사람둥지의 불빛만이 별빛처럼 떠 있고 뭐든 삼켜버릴 듯한 짙은 강물이 우리가 탄 배를 밀고 나아갔다. 음산한 다리 밑에서 무언가 기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강물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나무피리 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선실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디언 복장을 하고 커다란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남자 세 명이 무대에서 부르고 있는 가락과 알 수 없는 나무 악기가 시선을 끌었다. 아, 저 소리! 소리가 만약 보이는 것이라면 이런 건 기시감일 테지. 깊이 공명하며, 소박해 보이는 나무통을 쓸고 나오는 바람의 소리가 나를 머나먼 곳 어느 평원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천 년 아니 수백 년만이라도 거슬러 언젠가 그곳에 내가 있었을까. 그저 눈을 감고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오른쪽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두 가지의 악기를 다루던 청년의 새까만 눈은 탄탄해 보이는 몸과 함께 생명력이 느껴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배가 조금 나오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낙천적인 표정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길지 않은 공연이었지만 경쾌함과 처연함이 교차했던 시간, 이국의 청년이 불던 나무악기의 소리로 남았다. 그 여운을 못 잊은 나는 여러 개의, 길이가 다른 나무관이 나란히 달린, 그와 비슷한 악기를 어느 타국에서 사기도 했다. 조야해 보이긴 해도 한 번씩 꺼내 아랫입술에 살짝 대고 날숨을 쉬면 예의 그 휘파람소리가 난다.


몇 해 전이었던가. 우연히 기(氣)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내 기운은 보라색이었다. 영혼이 성하여 기수련 같은 체험을 하면 남다른 효과를 볼 수 있는 유형이란다. 하지만 정적인 힘이 강하여 자칫하면 에너지가 너무 가라앉을 수 있으니 동적인 활동을 반드시 겸하여 주라는 결론이었다. 그때 난 기수련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자꾸 가는 게 아무래도 전생이 미심쩍다.^^  여담이 길어졌지만, 이 음반은 이런 영혼의 성향에 잘 부합한다. 정적인 본성을 배태하고 있지만 바닥으로부터 일어나는 역동적인 춤사위를 품고 동시에 새벽잠을 깬 동물의 기지개마냥 서서히 일어나는 가락을 갈구하는.


The Indian Road (최근 2,3집도 나왔다)는 내면적이며 명상적인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명상적이라고 했지만 다분히 정적이지만은 않고 너른 벌판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느린 움직임이 있는 쪽이다. 이 음반의 연주자들은 칼로스 나카이, 메리 영블러드 그리고 로버트 미라발이다. 칼로스 나카이는 북미 인디언 플루트 연주자 1세대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거장이라고 한다. 메리 영블러드는 알라스카의 알류트 족과 플로리다의 세미놀레족의 피를 반씩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흑단 같은 긴 머리를 한 그녀가 연주하는 1번곡 <기도>와 2번곡 <안개>의 음량은 깊고 풍성하다. <기도>는 미국삼나무로 만든 플루트로 연주하는데 청명하고 맑은 기운이 몸속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안개>의 리듬은 두꺼운 적막의 안개 속을 거니는 야생동물의 발바닥 같이,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낮게 깔리는 존재의 무게감이 가슴에 스미는 듯하다.


그녀가 부르는 3번곡 <대답 없는 사랑>은 생(生)이라는 오랜 연인에게 바치는 애가처럼 수수한 잔물결을 일으킨다. 스페인 삼나무로 만든 플루트의 선율이 심금을 퉁기는 가녀린 기타소리와 어울려 나직한 울림을 준다. 베토벤이 가장 완벽한 악기라고 칭송했다는 기타는 어느 악기와도 조화로운 장점이 있는데 인디언 플루트와도 멋진 하모니를 낸다. 넓디넓은 평원에 홀로 서서 먼 하늘을 향해 부르는 짝사랑의 노래처럼 높은 곳에 있는 생의 절대자에게 바치는 애잔한 찬가다. 4번곡 <평화와 힘>은 셰난도의 새벽공기 같은 보컬과 첼로의 나지막한 탄식이 부산한 시간을 사는 우리를 평화의 인터미션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누구도 막지 못할 힘이 있다. 진정한 힘은 내면의 평화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막간의 평화를 생활 속에서 부단히 실천하라는 말을 되새김하게 되는 곡이다. 기획서문에서 밝혔듯이 ‘발산’이 아니라 ‘수렴’의 음악으로 승화된 모든 곡들 중에서 가장 그 힘이 강한 것 같다. 5번곡 <내 마음 안에>는 메리 영블러드의 검은 호두나무 플루트 연주로만 울려퍼진다. 단순한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 실감되는 단조로운 곡조의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맑은 기운을 몰고 오는 것 같다.


6번 <탈주의 노래>는 칼로스 나카이의 플루트와 피아노 선율이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곡이다.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How the West was Lost' 라는 다큐멘터리의 삽입곡이었다고 한다. 이 곡은 둘 곳 없는 마음을 파고 들 것처럼 황량하고 쓸쓸하다. 백인이 부르던 승리와 개척의 송가가 이들에게는 비참한 상실의 신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7번곡 <독수리가 와서 날 위해 기도하네>는 독수리 뼈로 만든 휘슬의 음률이 적막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감사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지금도 어디선가 버려진 벌판에 무리지어 앉아 휘슬을 불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을 떠올려보게 하는 것이다. 평원의 너른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기도소리는 주술의 음절처럼 들린다. 메리 영블러드는 9번곡 <독수리의 후예>를 흔쾌히 부르며 ’나는 추가치 알류트족, 독수리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독수리는 힘과 지도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왕의 발톱과 매서운 눈을 가진 독수리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지키면서도 절제된 창법으로 바람을 뿜어내고 빨아들인다. 그녀가 들이쉬는 바람의 숨소리가 플루트의 몸통을 거쳐 내 귓가 가까이 다가온다.


8번곡 <노란 숫양의 노래>는 드럼 소리가 플루트와 어우러져 심장박동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북소리는 관능적인 생명의 소리로, 차분한 플루트 소리는 죽은 숫양에게 바치는 진혼곡의 소리로 죽음처럼 낮고 음울하다. 생과 사의 조화로움과 영혼의 영원함이 북소리와 함께 가슴 두근거리는 감격을 건넨다. '엘 콘드르 파사'의 진혼곡처럼 대자연 아래서 그들이 품은 생명력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아보인다. 그녀는 이렇게, 정적인 선율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선율로 흥분을 몰고 온다. 호흡량이 무척 커야할 것 같은 대담하고 격렬한 선율에 인디언들의 원초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 같다.


10번곡 <유바 Yuba>는 드럼의 활기찬 리듬이 썩 매력적이다. 적삼나무 플루트로 메리 영블러드가 불었고, 현대 창작곡이다. ‘유바는 마이두 인디언 부족의 조상들이 살던 마을이 있던 지역으로 시에라에서 흘러오는 큰 강줄기가 깃털 모양의 강과 만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차가운 강물이 영혼을 새롭게 충전시킨다고 믿었다. 가볍고 리드미컬하게 타고 흐르는 선율이 강물처럼 자연스럽고 시원하여, 재즈곡처럼 분방한 리듬에 자유로운 영혼을 담았다. 그녀가 연주한 13번곡 <갈가마귀 달 아래서>는 기타의 선율과 어울려 동물과 인간의 영혼이 소통하는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만든다. 14번곡 <벽들이 말을 한다면>은 피아노와 신디사이저가 플푸트와 어울려 흐느끼듯 울리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디언들의 비감을 표현해 내고 있다. 마지막 곡 <퓨마와 늑대의 춤>은 격렬한 춤을 연상하게 하는 다소 웅장한 리듬이 내부로부터 솟아나온다. 광활한 대지의 한 가운데 야생의 생명이 어울려 돌아가는 춤을 보며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오래 전 보았던 영화 ‘늑대와 춤을’과 '라스트 모히칸'이 문득 과장되게 살아나고, 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의 위대한 심장을 경악과 분노로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곡은 두 개의 자장가 곡이다. 반복되는 낮은 가락이 입에서 맴을 돈다. 11번곡 <나바호족 전통 자장가>와 12번곡 <이로쿼이족 자장가>. 단순한 멜로디에 정겨운 보컬이 잠 못 들고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우리의 어지러운 영혼을 토닥여 잠재운다. 내일을 위해 오늘 평안의 수면으로 이끄는 이들 자장가의 가사에는 ‘네 인생에는 너 홀로 넘어야 하는 많은 언덕들이 있단다.’와 같은 구절로, 오래도록 지혜로 이어져온 자연의 가르침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체로키 인디언의 현명한 교육철학이 생각난다. 북미 인디언 최고의 가수라는 셰난도의 목소리에 담긴 운율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 친근하다. ‘잘 자거라, 잘 자거라 나의 귀여운 아가야,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착한 아이, 너를 사랑한단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던 기억. 이들의 자장가는 소란스러운 마음으로 복닥거리며 사는 우리네 가슴에 조용히 침잠하는, 소박하고 고결한 영혼의 소리다.


- “너희들 도시의 길은 너무 밝다! 너희는 별이 겁나느냐?

   너희 음악 소리는 너무 크다! 너희는 바람의 속삭임이 두려우냐?“ -

곡마다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지고 귀가 열린다. 막힘 없는 풍경 속에서 자연과 일체되어 자연속에서 가르침을 얻고 살아갔던 그네들을 떠올려본다. 눈을 감고 들으면 시공을 넘는 여행을 하는 듯하다. 어쩌면 다른 시간, 머나먼 이국의 귀퉁이에 사는 한 사람이 갖는 동경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Native American'의 플루트 소리는 그들의 애절한 영혼을 훑고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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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2-1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음반 제가 찾던 음반인것 같은데요. 작년엔가 남미 인디오 음악이 너무 좋아서 다른 음반들을 몇개 샀는데 실패했거든요. 근데 님의 글을 보니 제가 찾던 분위기의 음악일것 같은 느낌이 확 드네요.

프레이야 2007-02-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 음반은 북미인디언음악을 담았습니다. 좋더군요.
2,3집도 신청해두었어요. 남미와 북미 인디언 음악에 조금 차이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요^^

글샘 2007-02-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고 싶은 것이 왜 이리도 많답니까? 엄청난 뽐뿌질의 연속...ㅠㅡ

프레이야 2007-02-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지름신보다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뽐뿌신이 강림하셨나 봐요.^^

짱꿀라 2007-02-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 인디언 노랫소리요. 저는 생소하기만 한데요. 아마 적합지를 못해서 그런가 보네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1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그러게요 왠 인디언 노랫소리요^^ 인디언이라 부르지 않고 내이티브 아메리칸이랍니다. 근데 생소한 그 소리가 들어보면 아주 귀에 익은 느낌이 들어요. 왜일까요. 그게 참 신기해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 선율이 마음을 편안하고 맑게 합니다. ^^

달팽이 2007-03-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음반을 들었을 때
내 영혼이 갑자기 마구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느낌들이 납니다.
뭔가 나의 마음 속의 선율과 딱 맞아떨어져서
온몸을 울리던...
뭐랄까..
내 몸이 악기가 되어버린... 그런 느낌요..
몇 번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음악입니다.

프레이야 2007-03-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정말 그랬어요. 이 음반 님의 서재에서 알게 되었지요.^^
내 마음속 선율과 딱 맞아떨어져서 온몸을 울렸다니, 정말 님의 명상적인 마음과
잘 맞는 말이에요. 우리몸도 하나의 악기가 아닌가요! 나무로 만든 플루트의 소리가 정말 몸속에서 공명하는 것 같았어요. 마음이 부산스러울 때면 찾게 되는 음악이에요. 2,3집도 구입했는데 3집은 아직... 아끼고 있습니다.^^

풀꽃선생 2007-06-2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뒷골목에서 거리공연 하던 인디오들 본 적 있어요. 그 음악의 신비함이 너무 낯설었는데... 들어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6-27 22:24   좋아요 0 | URL
풀꽃선생님, 이탈리아 뒷골목! 정말 그려보는 풍경이지요.
뒷골목들을 다녀보고 싶은 꿈이랍니다. 이 음반,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3집까지 나와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