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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자전거 여행'으로 김훈을 처음 만났다. ‘칼의 노래’는 왠지 내키지 않아 읽어보지 않았고 ‘현의 노래’로 그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개'를 읽었다. ‘강산무진’에는 읽고 싶었던 ‘화장’과 ‘언니의 폐경’이 실려 있어 우선 반가웠다. 그 외에도 여섯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는데,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정서는 허무성이다. 내가 느낀 허무(虛無)는 덧없음이나 무상함의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 혹은 마음속이 비어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의 허무성이다.
‘현의 노래’에서 천착한 시간의 허무성이 ‘강산무진’의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서술과 묘사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관념성 짙어 몸에 와 닿지 않는 그의 생경한 표현들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현의 노래’보다 여기 여덟 편의 단편들은 좀 더 삶에 가까이 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러 군데 공중을 떠다니는 표현들이 걸리지만, 작중 주인공들의 나이와 직업, 비슷비슷하니 비루하고 통속적인 삶들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징그럽도록 세세한 묘사가 더욱 그러하다.
‘강산무진’ 속의 이야기들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연령대에 있느냐에 따라 느낌은 무척 달라질 것이다. 작품 속 인물 주된 연령은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오십대 중후반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아직 살아내지 못한 독자라면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의적인 것인가,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흔 고개를 넘는 중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작중 인물들의 서늘하리만치 담담한 태도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행, 불행이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되어 있지만 그것이 빚어내는 약간의 틈 속에서 한 숨을 쉬고 세상으로 난 또다른 길을 보며, 흘려보내야 할 것들에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체득한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어느 날은 가슴 터지도록 기뻐하는 등의 격렬함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단지 진정한 것들의 거죽이었던 셈이다.
시간은 많은 걸 가르쳐준다고 하던가. '시간'은 한때 정을 나누었던 여인과 그녀의 아이를 사납금을 못 채우더라도 공항까지 자신의 택시로 배웅하게 하고(배웅), 뇌종양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죽은 아내를 화장하면서 시원(始原)의 여인, 그 아름다움의 육체를 꿈꾸게도 한다(화장). 등대불빛으로 막막한 바다공간에 시간이란 지표를 부여하고(항로표지), AD 4세기의 철제도구들을 부식시켜 구멍을 내고, 여인의 골반뼈에 기원화(花)라는 공허한 이름을 부여하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은 사람을 머물러있고 싶은 과거 어느 시점으로 퇴행하게 하고(고향의 그림자), 사랑도 청춘도 스미듯 사라지는 노을처럼 혹은 물을 가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흔적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언니의 폐경). 시간은 또한, 속세로 더욱 묻히라고 말하고(머나먼 속세), 암진단을 받은 아버지에게 유산만을 바라는 아들에게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가면서도 강산무진도의 말없는 풍경들처럼 그렇게 담겨서 흘러가라 말한다(강산무진).
시간은 소멸해가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다. 그 속에서 명멸하는 별들처럼, 흘러가는 물결처럼,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우리네 삶. 그것은 구체적이고 세속적이다. 섣불리 희망을 강요하지 않고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들뜨지도 않는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했다고 바다를 탓하고만 있을 수 없듯이, 냉엄하지만 분노할 수만은 없고 죽음을 곁에서 보고도 살기 위해 한 손으로는 밥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게 삶이다. 모든 건 예정된 것처럼 그다지 슬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누구의 것이든 진정어린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내야 '허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