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1945년 이후 총격에 의한 미군의 한국인 살해가 가장 빈번했던 달은 64년 2월이었다.
2월 6일, 미군은 토끼 사냥을 나간 소년들을 사살한다. 4,6,9,17,18, 19일에 미군의 총질은 계속된다.
박정희에게 수출제일주의는 일종의 신앙이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였던 이선희는 이렇게 증언했다.
“차관 특혜, 세제 특혜, 금융 특혜, 수출원자재 특혜, 역금리 특혜 등 모든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인위적인 수출 진흥이 이루어졌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수출 진흥에 총동원되었고, 엄청난 특혜가 주어졌다.”
8월 말 금성방직, 대한제분, 삼성물산 등 9개 재벌기업에 177억 원이 집중 대출되었다. 이는 당시 화폐 발행고의 82%, 통화량의 43%, 일반 금융기관 대출 잔액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국회의원 유창열은 이른바 ‘3분(粉) 폭리 사건’을 폭로한다.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이른바 3분 산업과 관련된 기업들이 매점매석으로 가격을 조작하고 세금 포탈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받았다는 폭로였다. 이 사건엔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박정희는 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비리에 21만 5천 톤의 밀가루를 들여온다. 판매 대금은 선거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때 들여온 밀가루 중 일부가 업자들에게 흘러 들어가 ‘3분 폭리’ 사건이 벌어진 것. 일부는 수재민 구호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에게 공짜로 제공되었다. 대선 기간 중 때 아닌 ‘밀가루 잔치판’이 벌어졌고, 박정희는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거 직전엔 태풍 ‘셜리’의 피해를 입은 남부 지역에 집중 살포되기도 했다. 아 놔, 밀가루 뿌려 대통령 된 거임??
4.19 2주년을 맞아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했다.
“4. 19 의거는 국민의 용기와 지혜와 양식의 발전이었다. 도탄에 빠진 민생과 각박한 민심도 아랑곳없이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던 민족의 폭도들을 시대적 양심으로 추방한 민족 사상의 불멸의 금자탑이었다. ....”
여기서 잠깐,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것들은 박정희가 이승만을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던 민족의 폭도’라 부른 것을 부정하는 건가? 박근혜는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면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건가? 새누리당과 뉴라이트는 박정희를 부정하는 건가? 이승만이 국부면 이승만을 ‘민족의 폭도’라 부른 박정희는 빨갱인가?
박정희 정권은 3월 들어 한일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정한다. 야당과 시민들은 반발한다.
3월 22일 장준하 등이 연사로 나선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엔 7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든다. 이 뜨거운 열기는 이틀 후 3.24 데모를 촉발시킨다.
3월 24일, 4. 19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발생한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 등 5천여 명이 모여 ‘한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가두로 진출한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고등학생 및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한다. 미국은 한국의 반일 학생 운동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야당 의원 김준연은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1억 3천만 달러를 이미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4월 2일, “선거자금으로 박정희, 김종필 라인은 2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김준연은 얼마 후 구속된다.
박정희 정권은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공여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골자로 한 김종필 – 오히라 메모를 공개한다. 메모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진다.
4월 10일 서울대, 4월 11일 고려대와 연세대에 각각 배달된 정체불명의 소포엔 불온문서와 100달러가 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이 사실을 폭로한다. 중앙정보부가 학생 회유 공작에 3천만원을 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학생들은 학생 사찰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학생 정보 조직원 YTP(Youth Thought Party), 일명 창사회 등 사이비 학생조직들을 폭로한다. YTP는 중정의 후원과 지휘 아래 학원 사찰을 담당하는 비밀 폭력단체였다.
5월 11, 방탄 내각으로 불리던 최두선 내각이 총 사퇴하고 ‘돌격 내각’이라 할 정일권 내각이 들어선다.
5월 20일, 동숭동 서울 문리대 교정에서 3천여 명의 대학생과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렸다. 서울대 미학과 4학년 김지하가 작성하고 정치학과 4학년 송철원이 낭독한 조사 ‘시체여’가 울려퍼졌다.
5월 21일 새벽 무장한 육군 공수단 소속 군인 13명이 법원에 난입한다. 이들은 전날 밤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한 영장담당판사 자택으로 몰려가 “수류탄을 터뜨리겠다”며 영장발부를 강요한다.
5월 23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한 서울대 학생 송철원이 청년 4명에게 산 속 외딴 건물로 끌려가 2시간 동안 구타당하고 담뱃불로 지져지는 등 심한 린치를 당했다고 폭로한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5.16에 대한 부정, 박정권 퇴진요구로까지 번져졌다. 5월 24일,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는 <5.16을 비판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화폐개혁, 환율개정, 농촌 고리채 정리 등 졸렬 무정견한 경제정책과 새나라, 빠찡꼬, 오토바이, 교포재산반입, 증권파동 등 갖가지 부정사건으로 총파탄에 이르는 국민 경제를 일본 자본주의자의 더러운 손에 주무르려 발악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더러운 배설물로 한국 경제가 자립된다는 거짓말을 강변하고 있다. 이제 5월 쿠데타 정부는 자기 내부에 자기혁명을 가능케했던 –부패, 무능, 독선, 부정 등 온갖 독소가 터질 때를 기다리며 화농해있다. 반민족적 탄압, 기만, 부정, 무능, 부패 정부에 양심적 국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6월 3일 전국적으로 1만 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한다. 오후 4시경, 경찰 백차와 트럭을 탈취한 시위대는 청와대 앞 최후 저지선까지 위협한다. 군사정권은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6.3 사태 이후 군사정권은 학생 데모가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며 ‘반국가단체 불꽃회’ 학생들을 구속한다. 역시나 조작극이었지만 불꽃회 사건은 6.3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정권은 언론의 ‘굶주림 보도 사건’, ‘앵무새 사건’등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에 상정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대구매일신문>만이 끝까지 반대한다. 박정희는 유성에서 언론계 대표들과 회합을 갖는다. 이른바 ‘유성 타협’. 타협이라기보단 언론의 굴복이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싸고 윤보선파와 유진산파의 갈등이 심화된다.
8월 14일 중정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중정 김형욱이 조작한 사건이다. 오죽하면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등 사건 담당 검사 3명이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까지 제출했을까. 박정권은 힘으로 밀어붙여 12명의 피고에 대해 대법원에서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형을 선고받게 하는 데 성공한다. 아무래도 박정희는 앙심이 남았나보다. 박정희는 10년 뒤 ‘인혁당 사건 시즌 2’로 무고한 시민 8명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에 처한다. 사형 선고가 떨어진지 불과 18시간 만에.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는 월간 <세대> 11월호에 통일에 관한 글을 기고한다. 야당 의원들이 이를 문제시삼자 황용주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형욱은 황용주를 구속한다. 박정희는 왜 황용주를 토사구팽했을까? 64년 중 박정희의 공보비서관 박상길이 ‘양민학살’ 진상 규명을 건의했을 때, 박정희는 이런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나도 빨갱이로 몰리는 판에 내가 그런 걸 손댈 수 없지 않느냐.”
박정희는 오히려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 구속했다. (이후 1987년까지 민간인 학살 문제는 제대로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결국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이 늦어진 것 역시도 한 명의 남로당 프락치 변절자의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었나?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인 리영희는 11월 21일 자 기사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안건을 아시아, 아프리카회의에서 검토 중”이라는 내용을 실었다고 반공법 혐의로 구속 기소된다. 이게 왜 구속 사유가 될까? 북한이 대한민국과 동격으로 유엔에 초대되거나 동시가입이 제안되는 따위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에서 한 이야기일지라도 ‘적성국가, 단체 고무찬양’이 된다는 것이다. 같이 구속되었던 편집국장 선우휘는 무혐의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반면, 리영희는 두 달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9월 27일에 창간된 <주간한국>은 대성공을 거둔다. 당시 최고 부수 일간지가 20만 부도 못 미칠 당시 <주간한국>은 43만 5천부를 팔아치웠다.
5월 9일, ‘라디오서울’RSB이 개국한다. 9월 15일 사장에 홍진기가 취임함으로써 라디오 서울은 삼성 계열사로 편입, 나중에 ‘동양방송’(TBC)으로 개칭한다.
64년은 라디오 DJ가 등장한 최초의 해다. 64년 동아방송의 최동욱에 이어 66년 문화방송 이종환이 등장함으로써 라디오는 DJ 전성시대를 맞는다.
삼성은 라디오 방송에 만족하지 않고 12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 TV 방송인 동양TV(DTV)를 개국한다. 50년대 후반부터 부산지역에선 일본 TV 시청이 유행했다. DTV는 채널 7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NHK가 채널 7을 사용하고 있었다. NHK와 DTV의 채널이 겹치자 부산시청자들이 반발, DTV는 채널 9를 사용하게 된다. 부산과 영남지역의 보수화는 일본 극우 TV 방송을 보던 때부터 연유한 것일까. DTV는 곧 TBC로 명칭을 바꾼다. TBC가 삼성거였다니. 전혀 몰랐다.
64년 최고 흥행 영화는 김기덕 감독,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었다. 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의 주제가였던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도 인기를 끌었다.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신성일과 엄앵란은 그해 11월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