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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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

 

무서워서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가 말한다고 독자가 꼭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이러다 칼침 맞을라.

혹은 영이의 아빠처럼 삽으로?

 

김영찬 평론가는 김사과를 혹은 그의 소설을 앙팡 스키조(enfant schizo)’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미친년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미친 아해’.

 

표제작, <02> 혹은 <영이>를 비롯한 모든 단편에서 폭력과 분노, 분열을 목도할 수 있다.

분열은 영혼을 넘어 육체로까지 전이된다. (개가 되는 영이의 아빠, <영이> 돼지가 되는 누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카프카적인 변신.

혹은 육체에서 영혼으로.

한마디로 분열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니다. 이제는 잠식할만한 영혼조차 남지 않았다.

 

단편집을 읽으면서 이상을 떠올렸다. 이상은 미친놈문학의 원조 아니던가.

김사과는 21세기 작가답게 좀 더 더 더 더 더 미쳤다.

(리뷰 쓰는 나도 미쳐가는 듯)

 

왜들 이리 미치는 걸까?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치는 거 나쁜 거에요?”

 

내가 미치게 그냥 놔둬. 내가 죽게 내버려둬. 오늘을 견디면 내일이 올 뿐인데.

또 같은 날이 올 뿐인데.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영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세상은 환영이다. 아니, 개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환영이고 거짓이다

브랜드 아파트의 네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환각이고 망상이라는 걸 인식하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스템하의 헬조선. 아무런 희망도 동정도 없는 세상.

미치는 게 낫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김영찬의 말처럼 김사과 소설의 분열증이 구원의 제스처로 반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스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출마저도 값진 현실이 아닌가.

김사과는 분노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웃으면 안 되는데 몇 번이나 웃었던지.



그녀 소설에 유머가 없었더라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특이한 재능이다.

 

 

밑줄 그은 문장

 

p25. 영이는 길고 길게 죽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11pt, 명조체, 오퍼씨티 25% 정도의 비명) 제발 죽여주세요.

 

p32.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p41. 난 비누를 노려보았다. 꽤 오랫동안. 그러다 갑자기 그걸 깨물어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혓바닥엔 온통 비누조각이 달라붙어 구역질나는 향을 풍기고 있었고 비누는 사라졌다. 맙소사. 난 미친 게 분명하다. 난 화장실에서 나와 정수기로 달려갔다. 물을 다섯 잔 연속으로 마셨다. 이제 몸속에서 뭉게뭉게 거품이 피어오르겠지. 비누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난 온몸에서 뭉게뭉게 거품이 피어오르며 죽어버릴 거다. 그건 근사한 생각이었다.

 

 

편의점이 보였고, 난 그리로 들어갔다. 난 더 토할 것 같았다.......결국 편의점의 그 매끈한 바닥에 토하려는 찰나 고추장을 발견했다. 내 손은 그 빨간색 튜브를 멋지게 움켜잡았다. 천팔백원. 나는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뚜껑을 따고 그것을 입에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길고 고추장이 내 목구명으로 밀려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편안해졌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때 나는 셰로토닌이 280배쯤 증가한 상태였다.

 

p90.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면 긴 생머리에 커다란 눈에 뾰족한 턱의 여자애가 부자와 연애를 해요. 여자애는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입고 내 맘에 쏙 드는 신발을 신고 내 맘에 쏙 드는 화장을 하고 내 맘에 쏙 드는 머리를 하고 있어요. 나는 화가 나요. 도대체 저런 구두는 어디서 파는 건가. 아아, 나는 어제 백화점에서 진짜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봤어요. 사실팔만 육천원인데 쎄일기간이라 삼십 퍼쎈트 디스카운트를 해준대요. 다음주에 월급을 받으면 나는 그 원피스를 살 거예요. 이번에 시급이 올랐어요. 옷을 사야 해요. 언제나 옷이 부족해요. 어젯밤에는 근사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남자와 새벽의 텅 빈 학교 캠퍼스를 뛰어다녔어요. 새벽의 캠퍼스는 텅 빈 채로 옅은 안개에 싸혀 있었어요. 아무도 없고 우리 둘뿐이었어요. 나는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한 손에는 도장이 여덟 개 찍힌 쿠폰을 들고 있었어요(그러니까 두 번만 더 마시면 돼요).

 

- 머지않아 흉한 씨멘트 덩어리는 값비싼 브랜드의 아파트로 완성이 되겠죠.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뿌옇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겠죠.

 

p92. 나는 왜 이렇게 늙어가지 왜 이렇게 늙었지 나에게도 빛나는 브랜드의 시절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있다 있다 있다.......더 가지고 싶다 더, ....

 

p103. 너는 정말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야 아니 니가 인간이기는 하냐 이 그래프를 좀 봐 사회성이 팔이라고 도대체 평균이 오십사고 가장 낮은 녀석도 십구야 그런데 그 십구인 녀석이 누군지 아니? 정은호! 정은호라고 그 약간 모자란 정은호 아이큐가 칠십칠인 정은호도 사회성이 십구가 나왔는데

 

한문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너 오엠알 카드 마킹 삼번으로 통일했다며

 

p123.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느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퍼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나느 할아버지 그 개새끼가 미웠다. 언젠가 그 개새끼한테 복수할 거라고 굳게 결심했다.

 

p125. 일곱 시 반에 젊은 여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여자는 말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재수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원에 갔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여덟시 반에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스물세살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대학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아홉시 반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와 맥주를 열 병 마시고 갔다. 여자와 남자는 말했다. 우리는 노래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습니다.

 

열한시 반에 나이 든 남자가 와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회사에 다닙니다. 나는 딸이 있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내 딸을 미국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나는 빚이 많습니다. 나는 오늘 회사에 갔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새벽 두 시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고 싶은 사람 아홉 명과 살고 싶은 사람 아홉 명 다 합쳐서 아홉 명이 샤넬에 왔다 갔다.

 

p129. 우리는 중국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중국산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중국산 쏘시지가 들어간 김밥을 중국산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와 함께 먹었다. 천국에 김밥천국이 있다고 생각해봐. b가 말했다. 아니면 김밥천국이 진짜 천국이라고 생각해봐. 그것은 중국식 대화였다.

 

p146. 처음에 그건 씨발, 오빠, 제발, 이 개 같은 년, 잘못했어, 용서해줘, 이게 어디서, 꺼져, 와 같은 짤막한 단어들이었다. 그 위로 엄숙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드리워졌다. 김씨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재킷을 벗고 허리띠를 풀더니 벗어든 신발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최씨의 새로운 남자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전봇대 아래 서 있었습니다.

 

김씨는 신발을 집어던지더니 최씨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음소리, 비명, 빠른 발소리) 그것을 보고 최씨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뛰어오기 시작했습니다. (, 흐느낌, 주먹질) 저희 취재진이 끼어들어 만류해 보려고 하였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괴성, , 흐느낌, 괴성, 욕 다시 욕, 주먹질)

 

p157. 한에게는 그의 인생이, 새벽부터 밤까지 야구게임기 앞에 서서 날아오는 공을 끊임없이 쳐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갚아야 할 돈이 많았다.

 

p231.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강남구 신사동 사백칠십삼다시칠번지에 있었다.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용산구 이태원동 오십칠다시십이번지에 있었다. 하지만 지정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서울은 평양에 있었으며,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은평구 뉴타운에 있었고,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롯데월드에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서울은 뉴욕 주 뉴욕 시 파크 에버뉴와 렉싱턴 애버뉴 사이에 있는 이스트 씩스티 쎄컨드 스트리트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서울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완성된 지도는 미국식 아침식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p234. 우리가 그동안 만들어온 월간 <예쁜 기계>와 주간 <기계>, 격주간 <기계인간>은 모두 실패했다.

 

p235. 우리는 결국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고 한다.

 

p243. 결국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 매순간 삶은 타인들에게 증명되기 위해 갱신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쓰이는 이 글과, 저 책,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지어지는 아파트를 위해서, 부서지고, 다시 생겨나는 서울은 이미 혁명의 땅이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미래에 고정되었고 그래서 천천히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꿈과 환상이 도시를 지탱한다. 꿈의 장면은 디즈니랜드,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악몽, 새벽의 버스와 지하철, 광고판에 붙은 청사진, 구호, 그리고 깃발들, 네온라이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 꿈은 벽에 걸린 스크린 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된다. 돌아서면 탁자 위에 미국식 아침식사가 놓여 있다. 깨끗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파트다. 그것은 살아 있다. 새하얗게, 태어나는 중이다, 영원히.

 

p245. 더 이상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영혼이 없으므로, 그리고 그 점에서 나와 도시는 평등하다. 우리는 같은 고통으로 고통 받으며, 영혼이 없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환상과 고통, 그리고 그걸 위로해줄 마취제이다. 다시 거울이 거울을, 도시가 도시를 비춘다. 모두가 모두를 반사한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다. 우리에겐 거울이 있다. 도시는 이제 지도 밖에 존재한다. 내 곁에, 공간 밖에 존재한다. 꿈과 테러로 둘러싸인 채, 거울 속에서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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