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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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읽은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20년 만에 다시 집어 든 그의 책 <여자의 빛>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정말 잘 쓰는구나.’

 

로맹 가리처럼 살고 싶었건만.

두 번의 콩쿠르 상 수상, 여배우와의 결혼, 권총 자살.

내가 로맹 가리였더라도 권총을 입안 깊숙이 쑤셔 박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철학적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분명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자유를 획득했다.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자면 자유죽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딪힌다.

달러 밖에 없던 그를 위해 여자는 프랑화를 건네주고,

남자는 그녀로부터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받는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찌나 작업을 잘 하는지)

 

남자는 파일럿이다. 그는 공항에 가는 대신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와의 잠깐의 해후 이후 그는 공항으로 가지만 또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간다.

 

당연한 수순의 섹스. 그러나 ‘8층에서 몸을 던지는 듯한 섹스

리디아는 6개월 전에 남편과 딸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미셀 폴랭은 시간을 증명하기 위해 우연히 만난 세뇨르 갈바의 공연을 보러 바를 찾아간다.

세뇨르 갈바는 침팬지와 푸들이 파소도블레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을 한다.

 

파소도블레에 맞춰 침팬지와 푸들이 춤을 추는 동안 미셀의 아내 야니크는 이미 죽었을까. 야니크는 불치병에 걸렸다. 그녀는 고통 없이 죽길 원했고 오늘이 그날이다. 그녀가 죽는 동안 미셀은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 그날 미셀은 리디아와 세뇨르 갈바를 우연히 만났다.

 

리디아는 미셀의 전화를 받고 세뇨르 갈바의 공연이 열리는 바를 찾아가고 그를 그의 남편에게 데리고 간다. 리디아의 남편은 교통사고 이후 베르니케 실어증에 걸렸다. 생각은 적절한 음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미셀은 리디아의 남편에게 소리친다.

 

이것 보시오 난 신자가 아니오. 신이든 원숭이든 인간의 삶을 미리 정해놓는 것 같진 않소. 신이나 원숭이가 별거 아니라는 건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그들의 후손들만 봐도 알 수 있소. 이따금 바나나가 있고. 우리로 하여금 삶을 계속하게끔 부추기려고 자그마한 보상을 던져주는 거라오.”

 

 

미셀은 리디아를 데리고 그의 집을 찾아간다. 계획대로 야니크는 죽었다.

 

미셀은 자신의 물건을 찾기 위해 세뇨르 갈바의 호텔을 찾아간다. 세뇨르 갈바 역시 죽어 있었다. 갈바의 제자가 침팬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침팬지는 턴테이블의 전축을 켜 파소도블레에 맞춰 분홍색 푸들과 춤을 춘다. 세뇨르 갈바의 마지막 공연.

 

리디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미셀은 도움이 필요한 젊은 금발 아가씨의 신발 끈을 매준다. 금발의 여자는 미셀에게 말한다.

이리오세요. 길 건너는 걸 도와드릴게요.”

 

<여자의 빛>은 사랑에 관한 희비극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소도블레에 맞춰 춤을 추는 침팬지에 불과한 것일까.

삶이란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들에게 던져지는 바나나 같은 것?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여자의 빛이 있다.

(여자들에겐 남자의 빛’? 그런 게 과연 있을 수 있을까? )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 있군. 여자의 빛이 있어.

다른 남자들은 그것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메모한 구절

 

P16. “세르비아어로 죽음이라는 말이라오. 스므르트. 나는 일곱 개 국어를 할 줄 아는데 사물에 최고의 이름을르 붙이는 슬라브 어족의 말들이 으뜸인 것 같소. 세르비아어로는 스므르트, 러시아어로 스메르트, 폴란드어로는 뭐더라...... 이 단어들은 살무사나 파충류를 연상시칸다오. 하지만 죽음을 뜻하는 우리네 서구 단어는 너무 고상하오. 프랑서어 모르, 스페인어 무에르테, 독일어 토드 모두 말이오. 하지만 스므르트는.....사람 다리 위로 지나가는 역겨운 방귀 같지 않소. 독 있는 전갈보다 더 유독하게 느껴지고 말이오.

 

p34. “ ....우리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바다에 띄운 병 편지가 누군가의 손에 닿기를 기대하는, 가능성이 희박한 그런 도움을 구하도록 선고받은 존재들이라오. 게다가 이제는 더 이상 바다가 없다오. 오직 병들이 있을 뿐이오. ”

 

p38, 39. “ 여성성이라는 모국을 잃은 사내가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 타자, , 무국적자.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모국을 앗아갔군, 친구. 당신의 샘, 당신의 하늘, 당신의 밭, 당신의 과수원을. 그 나라에서 그녀의 금발은 유년의 은신처들보다 더 안전하고 은밀한 곳이었다. 그녀의 금발이 내 두 눈을 가려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동안 나는 순간순간을 누렸다. 궁극적인 지각, 존재 이유라고 해야 할 그런 순간들을. 그 존재 이유가 그녀 아닌 모든 것으로 확장되었다. 마침내 가시를 버리고 돌을 담금질하는 데 어떤 결핍감, 어떤 박탈감이 필요한지 알 게 된 것처럼.

 

내겐 여성이라는 모국이 있었고,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 나라는 삶이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낸 것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다른 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미소짓는 들판의 꽃들로 판단컨대 삶 역시 즐거움을 필요로 한 것이다. 함께 브리악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던 때가 생각난다. 시간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를 낮춘 채 밖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어찌나 잘 훈련되어 있던지 마을에 간 그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야 비로소 짖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커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 지상에 새겨진 오래된 길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련다. 나는 지금 행복의 진부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독특하게 창조해내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결합하는 그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다를 것도, 독특할 것도, 귀할 것도, 예외적일 것도 없었다. 영원성과 지속성 그리고 커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의 기억보다 더 오래된 존재들이었다. 태고의 맛을 지니지 않은 행복은 없다. , 소금, 포도주, , 신선함과 불, 둘이 함께 있으면 서로가 땅이고 서로가 태양이다.

 

p43. 나는 여객기 조종석에서 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가슴속 내래이터의 충실한 중얼거림을. 추억을 잃어버린 이들은 더 이상 오래된 프로프터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당신애 왜 거기 있느냐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어째서 세상은 그리고 자신들이 미쳤다고 주장했던 그 많은 유명인들은 거기 없느냐고 당신에게 묻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마치 당신이 우주의 불심검문은 발화자가 없는 질문이라고 주장하기라고 한 것처럼. 지상의 육체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숨을 가르고 떼어내고 벌리고 들어 올리고 둘로 나누어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그만큼 손실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몸이 둘이라면 언젠가는 반쪽이 되어야 한다.

내가 당신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한 거야?‘

지독한 방해지. 당신이 여기 없으니 말이야.’

p50. “ 이른바 조련 경연 대회 같은 걸세. 하지만 누가 그걸 주최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주최자들은 자기들만의 올림포스 산에 앉아 즐기고 있으니까. 모두들 불가능한 걸 해내야 한다는 게 그들 요구일세. 심지어 모자 상자에 들어가 앉는 사내도 있다네. 우리 곡예사들 중 한 사람이지. 신인지 원숭이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올림포스 산 위에 앉아서 우리 공연을 내려다보며 즐기고 있다네. 그뿐일세.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하고 싶었네. 우리 모두는 걸어 다니는 명작들이야.”

 

p56. 그것은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피로감이 뚜렷이 드러나 있긴 했지만 두 눈 깊숙한 곳에 여전히 뭔가 남아 있었다. 불굴의 그 무엇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패배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므로.

 

p64. “아뇨, 미셀.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때때로 믿음이 산을 옮겨야 한다는 과제만을 내주는 경우도 있어요. 여성성에 대한 신앙, 그게 결국 무엇으로 귀착될까요? 한 남자를 살도록 돕는 거예요. 하지만 내겐 그런 소명이 없어요.”

 

P69 “그러니 내일 나와 함께 떠납시다. 지나치게 경험에 의존해 오히려 빗나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마시오. 나와 함께 떠납시다. 불가능에게 기회를 주시오. 불가능이 어느 정도로 신물을 내고 있는지. 불가능이 어느 정도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고 있소.”

 

p87. “저 애는 신을 믿지 않아요. 저 애는 붙들고 살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어떤 가요?”

복도에서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소냐, 제 아픈 곳을 찌르시는군요.”

, 당신도 그렇다는 거군요. 믿고 살 만한 걸 전혀 갖고 있지 않다니, 참 유감이에요.”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분명 뭔가 남아 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군요.”

 

p103. 피로가 불쑥 몸속으로, 핏속으로 들어오자 신뢰와 확신의 파도가 소리 없는 노래처럼 내 안에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그건 그저 나로 하여금 이 삶을 계속하도록 부추기는 두 번째 숨결일 뿐.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우리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과거에도 패배시킬 수 없었고 미래에도 패배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 각자는 안다. 나를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 속에 말이다. 쇠는 깨어지고 우리는 자신의 손금대로 살아가리라.

 

p107 “그건 사랑이 모든 걸 이해하고, 모든 것에 응답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기 때문이라오. 사랑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소. 교통수단을 바꾸려면 정기권, 곧 카르트 오랑주를 구하면 되는 것처럼 말이오.”

 

P110 “ 우리는 나약함으로 터져 나갈 지경이지만, 그것에서 온갖 희망이 나온다오. 나약함은 언제나 상상력을 살려냈소. 강인함은 스스로 자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소. 재능이 있는 건 언제나 나약함이오.......나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소. 내 두 손은 풍차요. 그렇고 말고. 내 믿음은 어쩌면 정신 나간 자의 다행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소. 그렇소. 하지만 우리는 지독히도 나약하기 때문에 패배당할 수가 없다오.”

 

p123 “난 삶이 어떤 수준에 오르지 못할까 봐 불안해요, 미셀”.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불행히도 메아리를 꿈꾸지 않는 돌들이 있고,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일들이 무척 많아요.”

 

p125. ‘당신을 나 없이는, 여자의 빛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다른 여자를 위한 자리가 완벽하게 준비된 셈이지. 나는 도둑처럼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당신은 내가 여자로 남아 있도록 도와줘야 해. 나를 잊어버리는 가장 잔인한 방식은 바로 당신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이런 얘기를 그 여자에게 해줘.....’

 

빵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고, 물은 샘을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심장은 피에게 자신이 무엇으로 사는지 설명하지 않소. 오래전부터 우리는 생명 없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고 있소. 여성적인 입술의 부재가 석회화해 무생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오. 따라서 사람들이 줄곧 슬퍼하는 것은 대지가 먼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그게 먼지든 신이든 나는 전혀 관심이 없소. 왜나하면 어느 쪽이든 여자가 아니니까. 나는 때때로 랭스나 샤르트르 대성당을 보러 가기까지 했소. 어떤 식으로 번지수를 잘못 찾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오.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삶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 맛과 가장 가깝소.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거기요, 거기가 바로 내 존재의 출발점이오.”

 

p126 “당신은 좋은 주먹을 갖고 있군요. 이 주먹을 뭐에 쓰죠?”

주먹을 꿈꾸는 데 쓴다오. 주먹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호메로스가 한 얘기요.

 옛 사슬들이 새 사슬들에게 하나의 전설을 들려준다오. 그래서 사슬 간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는 거지.”

 

p129. “당신 계산을 하고 있군, 리디아. 주판알을 튕겨가며 희망을 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모르겠군.

사랑이란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모험이야. 거기서는 신중해지는 순간 길을 잃지. ”

 

p145.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집은 바닷가에 있어서 바다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주의 깊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는 세월 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새로운 세계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아무도 맛본 적 없는 행복,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즐거움, 여자의 빛이 아닌 다른 지복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래된 메아리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불멸하는 것으로만 살 수 있다.

 

밤이 우정에 차서 다가와 내게 자신의 잠을 조금 나누어 준다. 눈꺼풀이 감기자마자 모든 기억이 다시 흠 없이 떠오른다. 낮이면 나는 형 같은 바다를 친구 삼는다. 인간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데 필요한 목소리를 가진 것은 바다뿐이니까.

 

p157. 지붕들 위로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주위의 사물들이 나를 자기들 흐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과 우주와 광년이 벌이는 작업이 거기 있었다. 하늘은 짐짓 표정을 꾸며댔지만, 그 광대함은 그의 뜻을 배반했다. 진짜 하늘은 손으로 가릴 수 있을만큼 작으므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품위 있고 자존심 강한 수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수많은 여자들의 건조한 눈빛에서는 기도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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