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2009년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황안나 지음 / 샨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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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쉽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내일이면 한살 더 먹게 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 술이 한잔 두잔 늘어난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건 '꿈'이 아니라 어느 술집에서 만난 '허탈함'이다. 몇 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왕년에는 잘 나갔다고... 하지만 오늘은 조금 어깨가 늘어진 것 뿐이라고. 언제나 나를 위로하는건 지난 날의 나인가.

어느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몸이 근질근질하여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베개송사를 나누는 아저씨한테는 아무말도 않고 나선다. 가장 가까운 이의 걱정이 그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하는 기우 때문이다. 그는 한달에 채 안되는 동안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 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겹고, 발 바닥이 아파오는지... 아픔을 이겨내고, 눈물을 머금고 그가 가려고 한 길에 다 왔을 때, 그는 어느 술집에서 '왕

년에' 대신에 '내년엔'이라는 희망과 꿈이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며 긴긴 설레임으로 추위를 떨쳐낸다. 술집에는 두 명이 사람이 앉아 있다. 한 분은 '왕년이'를 부르고, 한 분은 '내년이'를 부른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긴긴 겨울밤 동안 안주삼아 꼭 꼭 씹는다.

할머니는 무슨 일을 하기에, '사나흘'이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깐 내가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 열흘정도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자 오늘은 이것을 보았구나, 이제 사흘 지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낯선 자리의 풍경을 보고도 날을 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흘이 지나자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고 눈은 편안하다. 집은 먼먼 나라에 사는 외딴 섬이다. 나는 미지의 바다로 낯선 선장이 되어 있었다. 바다에서 나는 마음껏 향해를 하며, 더 넓은 세계를 품었다. 처음 책을 읽고 마주친, '사나흘'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 그이 말이 진실로 옳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을까. 무엇을 하든 이 '사나흘'만 넘기면 된다. 그래서 지은이는 스무날이 넘는 동안 나라땅을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국토 순례, 해남~통일 전망대"라는 깃발을 달고 걷는다. 길에 목적이 있으면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목적지에 닿느냐, 못닿느냐'하는. 그는 충분히 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시절,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오기와 자존심, 그리고 증요였다(82쪽) 그에게 중오도 삶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아래까지 내려갔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분명 길 위에서 서러지거나 발이 부러터지더라도 그는 툴툴 털며 일어날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길에 나서지 못한다. 그의 가방이 무거워서이고, 걱정이 무거워서이다. 하지만 가방이 가벼운 이는 쉬이 길을 나선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국토 종단에 따른 자아성찰'이다. 지은이는 길에 '목적'을 던져 주었고, 옆길로 세지 않는다. 간간히 자기 삶을 들려주는데, 때론 이 이야기가 더 정감어리다.(목적에 따른 여유부족) 국토 종단은 이미 나에게, '박카스'처럼 식상한 음료인지 모른다. 길에 목적이 있으면 무조건 앞만 보며 걷게 된다. 너무 빨리 걸어서 다행이 아니라, 너무 늦게 들어와 행복하다고 해야 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 일탈이며, 벗어남이라면 길에서 집을 찾지 말고, '일탈'을 꿈꾸어야 한다. 어쩜 지은이는 스스로 걷지 못할까라는 두려움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걷게 된다면 분명 그의 걸음은 느릴 것이며, 깊은 혜안이 담겨질 것이다.

"그러니깐 왕복 4킬로미커, 십리를 헛걸음한거다. 누구를 타하랴(104쪽)"

『내 나이가 어때서』는 초등학생의 일기와 지난 삶에 대한 일기가 섞여 있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지난 내 삶을 되돌아보는 길인가 보다. 그는 길 위에서 '지난 그를 만나' 수 없이 혼자말을 한다. 길을 나서게 되면 나를 돌아보게 되나보다.

책을 읽고 나서 처음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당히 심어져 있는줄 알았다. 하지만 지은이는 '내'라 적고 있지만 그의 걸음걸이를 들려주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나이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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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마음 - 동양의 그림과 이상향에 대한 명상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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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메모하고, 다시 정리하지 않은 체 올린 글입니다. 어떠한 감상에 예찬이 아닌,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기에 글이 험하거나 아집이 짙을 수가 있습니다.


1.

" 원형의 구속력과 구체성과의 긴밀한 관계가 회화의 주제와 기법의 유연성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21쪽)


세밀한 묘사를 추구하는 기법으로 인해, 원근법은 기이한 형상을 불러와 물러서야 할 이물이 된다. 그림은 오직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어야 하며, 여기에는 왜곡-눈에 의한 착시조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근거를 '동양화 전통의 단조로움은 산수화의 규범적 성격(19쪽)'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이야기 한다. '동양화, 규범적 성격' 나는 솔직히 두 언어의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지은이의 많은 암시와 내 이해력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나 보다. 나는 지은이가 말하는 그림의 구체성 근거를 '역사적 사실성'이라고 불렀으면 한다. 우리나라의 기록문화는 대대손손 전해 내려와 어느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동시에 후손에게 귀감이 되길 바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하늘 우이ㅔ 사관 있다는 말처럼, 임금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이가 '사관'이였으며, 이런 전통은 '낙서'라 의미로 변용되어 널리 애용되기도 한다. 사관의 기록은 헛튼 글을 덜하고 더했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그림이 사실성을 추구하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내 주관적 상념이기에 어떠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덧붙입니다. 잠시 지은이와 내 생각이, 엇나는 부분이 있어 전통을 잇는 기록으로 여기 몇 자 적어 두고 다시 읽어간다.


2.

" 이러한 사상들은 사상이라는 관념의 자체에서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원초적인 삶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개념화되고 체계화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36쪽)


이상 국가 조선에 대한 조선조의 사상을 말 할 때, '원초적인 삶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견이 있음을 몇 자 덧붙여 본다. 조선의 건국이념 및 이상을 추구한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의 사상적 토대가 자생적인가, 역사적 기원과 얼마만큼 흐른 뒤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가 민족 국의 기원이라는 설명은, 시민혁명을 바탕에 된 지국의 근대국가를 말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존재한 '상상된 공동체'라는 이상향에 대해, 나는 기우뚱거려진다. 진경산수화가 그려진 시기가 조선 전기가 아님은, 그들의 예술, 삶이 원초적인 체험과는 유리된 한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기본 구도에서 명백한 것은 명당이 아늑하게 보호된 곳이라는 점이다."(50쪽)


이는 명당의 개념을 그림으로 이해한 경우라고 생각되어진다. 옛날 사람들이 단순히 아늑한 자리를 찾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달에 해가 기리면 불길한 징조이며, 전쟁에서 연에 불을 붙여 놓게 날린 다음 끌어당긴 전략은 그 상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가 얇을 때에는 신적인 외부적 힘에 의지하고, 그에게 기대게 된다. 이러한 기댐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신비함과 더불어 상징적인 의미로 변이된다. 우리나라의 풍수사상 역시, 어떠한 상징체제를 가지고 있지 마당에 그림을 그린 다음 아늑한 장소를 명당으로 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은이는 '조산(祖山) 주산(主山) 조산(朝山)'을 '천자와 왕(51쪽)'의 상징체계로 읽어내지만, 더 들어 가지는 않는다. 그는 '민주의 원리' 즉 '어머니의 자궁에 의하여 예시되었던 보호된 생존의 상태로 숨어들어가려는 사람의 충동(52쪽)'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 조상의 사유체계를 지배한 것이, '음양오행'이라 할 때에, 음은 죽은 사람이고 양은 산 사람이 된다. 음이 하늘 높이 닿기 위해 윗산을 찾아 올라가는 풍습을 담고 있다.(죽은 사람, 음 + 하늘, 양 = 조화) 이는 티벳의 조장에 담겨진 그들의 바람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볼 때에 명당의 요건도 음양오행에 토대를 둔 상징적 의미로 찾아야 할 것이다.


3.

" 조화가 깨진 것은 사람의 삶과 자연의 균형이 깨어졌다." (129쪽)


" 사실 우리는 계속적인 생각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재를 보존하고 전통예술을 되살리면서도 생활 자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144쪽)


이에 충분히 공감하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 문제를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교육의 문제로 본다.)


그림에서 평상심을 얻는 것은 앞서 말한 심리적 위안에서 한 발 짝도 나아가지 않았다. 지은이가 바라보는 동양화는 '마음의 평화'에 기대 있으며 이는 자연의 사실적 회고를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식하는 자연, 즉 나와 자연의 일체-물아일체의 경지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동양의 수많은 그림을 통해 총체적 시선을 얻은 다음에 글을 풀어내었겠지만……. 인용되는 글귀는 너무나 한정되어 믿음성이 부족하다. 이는 사실 논거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부족과 동일시된다. 그는 동양에 대한 시선을 어떤 특정시기와 특정 나라에 한정하고 있으며(-동야이라는 언어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음) 그림은 몇 몇 작품에 불과하다. 또한 동양의 그림을 서구의 눈을 계속 읽어가려 한다.


언어의 힘겨움, 낯선 시선 등은 글 읽기를 부담스럽게 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면, 지은이의 글은 다듬어지지 않은 구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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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능선에 서면
남난희 지음 / 수문출판사 / 199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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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얼마만큼 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가는,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른다! 지금 누군가-나에게 백두대간을 건너라하면 걸을 수 있을까? 나는 온갖 핑계를 되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이는 할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도망갈 계책을 찾고 있음에 나타난다. 그러하지 않고 '가겠다'면 어떠한 길이든 찾게 될 것이다. 궁즉통, 궁한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만큼 인가를 지은이의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십대 중반, 여성, 그리고 계절은 한 겨울이며, 날짜는 두달이 넘게 걸린다. 길 위에는 혼자이며, 일주일에 한번의 지원부대 도움밖에 없는 길.

그는 당당히 이 길 위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걷는가'에 대한 수 많은 물음과 회의, 두려움과 외로움, 눈물 그리고 지원부대의 만남에 오는 설레임, 헤어짐 뒤에 오는 미칠 듯한 씁씁함. 그는 혼자 걷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 아름답네, 아름답네'라고 말한 어떤 이의 글은 미문(美文)이다. 홀로 걷는 지은이에게는 여유가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공간을 담지 못하고, 가야하는가에 대한 회의와 맹목적으로 그를 돕는 이에 대한 부단감만 짐지워져 있다. 지은이는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산길을 걷는다.

어떠한 아름다운 문체를 구할 수 없다. 화장을 하고 곱게 드러낸 얼굴도 없다. 오직 아름다움이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 속에 일을 마무리하는 자아만 있다. 이는 아름다운 문체 보다 화장한 얼굴보다 더 아름답다. 사람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은 나에 대한 무게에 억눌리지 않고, 당당히 맞써 이겨낼 때 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의 글은 아름답다.

70여일 넘게 부산 금정산에서 설악까지 걷는 미친 행위의 계획은 무모했고, 그의 걸음걸이는 요감했다. 설악에서 한 없이 우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길을 걷지 않고 얼마나 많이 돌아왔던가. 나는 해 보지 않고 할 수 없다고 얼마나 많이 주저 안았는가. 그의 글은 역사적 기록을 넘어서, 한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 자연에 대한 생각이 담겨져 있는 보배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쓰여진 글이기에, 걷고 나서 그의 마음과 몸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목적에 대한 결과를 요구하는 듯 하지만, 여유없게 걷는것에만 집착하니 주위를 둘러볼 수가 없는 한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달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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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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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설은 이름, 현학적인 제목. 책을 접하고도 그냥, 많이 팔리도록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잡고 몇번이나 살포시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의 제목을 몇 번이고 되내이면서, '설마', '설마'라고 다가가기를 주저했다.

'사랑' 이 정체는 무엇이기에 지은이는 그곳에 이를 배웠다고 자신있게 ʼn?있나. 그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곳도 아니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갔다와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을 보여준다. 사람 사는 곳이 뭐 별다른게 있겠나 싶기도 하고, 헬레나-호지라는 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라다크'는 너무 빨리 흡수되고 있다고. 설사 그가 본 것이 기이하다해도 과연 물질 앞에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수 많은 이들이 손한번 내밀고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의 여행은 특별하다. 나는 노작가의 관광버스를 타고 남의 풍물 시장을 돌 듯 하고 돌아와서는 전부 다 아는냥 떠드는 것 보다.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고 그래서 땟국물이 흐르는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는 이런 여행이 더 맛깔스럽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행자 스스로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게 고통이라고 인지하고서 발을 뺀다면, 여행은 끝이 난다.

2.
사는게 무엇인가? 여행이란 무엇인가? 낯설음과 같음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때론 우리 이웃 같아 마음 아프고, 우리 지난날 이야기라서 더 절실하고, 지구상에 이렇게 가슴 아픈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슬프다. 하지만 내 슬픔은 감상이고 그들의 슬픔은 현실이다. 무어라 말 해야 하는가? 그건 하나. 그들을 이해하고 그와 내가 다르지 않음에 나누는 것 뿐. 하지만 내 마음은 급하나 내 몸이 느리니, 나는 알고서도 더 행하지 榜?죄를 쌓고 있다.

지은이는 젊어서 혹은 돈이 많아 낯선 곳을 동물원 구경하듯 다니지 않는다. 누군가 다가와 '초콜렛 초콜렛'하면 달라붙는 아이가 귀찮아 선심스듯 던져 주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게으르거나 천성이 되먹지 않는다고 쉬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스쳐 지나간 아픔을 보고 보듬는 아름다운 눈과 손을 가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거나 도움을 받는 경우는 없다. 사람은 서로 품고 사는 것이다. 내 물질적 풍요를 나누면 상대방은 내게 정신적 여유로움을 건낸다. 사람은 물질적 소유에 의지해 살 수도 없고, 정신적 풍요로움에 의해서 살 수도 없다. 어느 노학자가 말했듯이 '새들은 두개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사상이나 이념에 한정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3.
새삼스레 그곳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지은이를 닮고 싶다. 그의 행위가 무모하고 그의 발이 낯선곳을 쫓아다니고 별빛 속에 잠자더라도 그를 따라걷고 싶다. 그는 내게 수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듯 하고 그 이야기는 t.v화면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몸에 짙게 베여있기에. 오늘 밤 어디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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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안치운 지음 / 디새집(열림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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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좋아하시나요?

 

초등학교 때 까지는 열심히 뒷동산에 올랐다. 겨울에는 난로감을, 학교 산에 가서 땔감을 주워오기도 했지요. 나고 자란 곳이 농촌이고, 우리나라 농촌은 배산임수라는 말 한마디면 다 통한다. 우리 동네 역시 뒷동산이 있었기에, 뒷동산은 놀이터다. 무덤을 오고 가며 묏등잡기 놀이를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집을 짓는다. 가을이면 밤 따러 가고, 겨울이면 밤나무 가지를 잘라 새총을 만들기도 했다. 갈비가 많이 쌓이면 자루를 가지고 가서 한 포대 담아와 부뚜막에 쑤셔넣고. 이렇게 내게 산은 어린시절 추억의 뒷동산이지만, 학교를 졸업하면서 점점 멀리했다. 내가 학교를 시내로, 도시로 나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산과는 점점 멀어졌다. 그런 내가 산을 찾은 것은, 돌아오기 위한 길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 부터 같이 뛰어 논 놀이터이기에, 그 발걸음도 당연히 가벼웠다. 하지만 어릴 때 그냥 오르던 산을 이제는 오를 때 마다 묻곤한 다.

 

어쩜 왜 산에 오르는가에 대한 물음이 늘 가로막고 서 있다. 흔한 말로 땀을 흘리며 올랐다가 내려서는 길,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며, 자동차로 부지런히 다녀도 참 볼 것이 많은데 굳이 산으로 가느냐는 물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산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부터, 뒷동산에서 한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그리고 알았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한결 같다는 것을.

 

산, 여행을 하면서 산은 내게 하나의 화두이다.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산에 볼 것이 많아서 혹은 욕심을 비운다는 선문답을 찾기 위해. 아니다. 그냥 걷는 걸음에 불과하다. 조금 좋은 풍경이 나오면, 보상심리로써 네 걸음걸이와 맞바꾸려 하곤 한다. 즉 그곳에 가는 것은 산이 나에게 '특별한 무엇을 줄 것이다'라는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철 따라 철쭉을 보고, 단풍을 보러 길을 나선다.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왜 오르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고 나는 내 아닌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우린다. 그네들은 무엇 하러 오르는 것일까? 지리산에 가보지 않은 내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은 것도, 우리 조선들은 지리산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어디로 갔다 오면 부족한 글을 남기곤 한다.

 

나는 안치운이라는 이를 모른다. 연극을 공부했다더라. 하지만 내가 그의 책을 읽는건, 『지리산에 가련다』를 읽을 때 처럼, 그에게 산은 어떤 의미인가를 훔쳐보기 위함이다. 내가 갔다 온 주왕산 응봉산을 보고, 가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해남을 읽어본다. 두번째이다.

 

소설책이랑 인문사회과학서적은 한번 읽고서는 두 번 잡지를 않는데, 입맛이 끌리는 기행문은 두 서번 되내여 본다. 『풍경의 발견』을 시간 나면 한 산씩 타고 오르는 것이 그의 글맛은 어떤 맛일까'라고 간을 보기 위해서처럼. 『그림움으로 걷는 옛길』역시 맛을 음미하기 위한 읽기이다. 그가 걷는 길이 옳다 그르다는 시시비비가 아니라, 나보다 먼저 걷은 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혹시 내가 놓치고 지나치는 걷은 무엇일까라는. 신영복씨는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이라는 언어를 놓지 않았던가.

 

추적추적 창문 밖에는 밤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고 하지만 일주일째 낮게 드리운 구름이 강아지 오줌 마냥 찔금찔금 뿌린다. 나는 어디를 가지 못하고 안치운의 산길을 걷는다.

 

산길은 감상과 사변에 녹아있다. 어디를 어떻게 갔다는 식의 나열을 숫자 세워가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걸어간다. 걸음 걸이는 가벼운 듯 하지만 진중한 느낌이다. 문득 내가 쓴 글을 불러온다. 어디를 어떻게 갔는지가 먼저 와서 나를 끌고, 그가 본 것을 들려준다. 걸음걸이는 꼭 꼭 눌러서 걷고 있으며, 무거운 듯 하면서 어딘지 가벼워 보인다. 그렇기 때문일까. 문체는 뛰다 걷다, 뛰다 걷는 듯하고 본 것을 말하며, 어린아이가 소풍을 가 듯 들뜬 느낌이다. 안치운은 사뿐사뿐 내딛는 문체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발걸음은 녹녹한 연륜이 베어있다. 대체로 그의 걸음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기에, 어디를 간 듯 안 간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어디를 꼭 갔다 왔다고 들려주며, 나랑 같이 나서자고 꼬시는 중이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비를 맞고 걷는 이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러면 이 비속에라도 나서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 가려서 배낭을 꾸린다. 가을비가 걷히면 단풍이 짙어지리라. 단풍이 짙어지면 붉게 물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에 가는 이들이 많을 것이리라. 그라면 어떤 생각일까? 나는 왜 그곳에 가보고 싶은 걸까. 책을 덮고서 톡 톡 때리는 창밖의 비를 바라본다. 어둠이 살살 내려온다.

 

바람부면 날이면, 그 카페가 그립다.  http://naca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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