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혁명 - 아기를 지키기 위해 모성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산드라 스타인그래버 지음, 김정은 옮김, 궁미경.이승헌 감수 / 바다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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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총각이,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는 과정의 책을 읽다니...조금은 부끄럽고,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분명히 알고 너머가야 한다는 논리가 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티비에서 수중분만하는 장면은 너무나 충격이였고, 과연 산부인과는 절대적 평온안 장소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이는 총각이어서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부터인가 보다.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여자들이 의사의 부당의료에 속고있다]에서 선진 의료에 대한 맹점을 읽었고, [헬로우 블랙잭]에서 일본 의료계의 현실을 보곤한다. 이는 먼나라이면서 우리나라의 병원일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난, 어쩜 낯선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번 책 역시, 조금은 낯설다. [모성혁명]이라는 제목이 달려있지만 혁명적이는 않는 잔잔하면서 꽤나 지루한 책이다. 한 여성이 결혼하면서 아기를 갖게 되고, 아기를 갖게 됨으로써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보려한다. 그가 보는 세상, 그가 숨쉬는 세상이 우리 아기가 숨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임신 했을 때 부터 차근차근 일상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나쁜 공기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듯, 배속에서 아기의 태동 소리를 들려준다. 어머니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아이에게 더 낳은 것만 주려고 한다. 그를 둘러싸려는 공기는 유해물질이 가득하고, 몸 속에 오래도록 남는 치명적인 독소이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끊임없이, 나쁜 공기는 아기에게 전달된다고 강하게 호소하곤 한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산부인과 자연분만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욜랜다(203쪽)라는 산파가 그를 자기 병원으로  불러서는-아주 소박한 공간에서 손으로 그의 몸을 만지며, 아기와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칸막이를 설치하고, 기계를 들여놓고, 간호사를 부르고, 산모를 줄세우고서는, 산모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으려 하지 않고, 산모는 그 병원의 분위기에 억눌려 오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한 어머니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호기심과 놀람, 기쁨에 가득한 감정을 의사는 기꺼이 받아주며 그의 수다에 맞장구 치지 않는다. 기가 눌린 엄마의 조심성은 아이이게 전해지고, 아이는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현대 의학의 권위에 깊이 길들여진다.

늙은 산파의 지혜로움과 현명한 손놀림, 편안한 어머님같은 자리 대신에 날카로운 메스와 고통을 줄인다며 마취주사를 들고 서 있는 의사들에 둘러 쌓인게 오늘의 얼굴이 아닐까.

(230~237쪽 까지 자연분만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한다.)

지은이는 현대 문명-시멘트와 아스팔트 위에 살면서 이 주위 환경이 아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한다. 즉 그는 주위환경을 둘러보고, 오늘날의 모습이 아기에게 치명적인 악(惡)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조심, 조심, 또 조심'이라는 전제가 깔리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출산이 임박하여 '자연분만'에 눈을 돌리 듯, 아기를 위해 좀 더 낳은 대안은 없었는가에 대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문명의 삭막하지만 편리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체 대안을 찾아간다. 그의 이러한 첫걸음이 큰 출발이기에 발목부터 잡는 것은 잘못 인줄 알지만, 조금 아쉬움은 그가 산책하고 새소리를 드는 것에 대한 느낌과 아기에게 미치는 영향도 함께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런 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태교는 과학이다]라는 부분에 언급이 되어져 있으니, 참고 해도 좋을 듯하다.

'세상이 오염되면 엄마가 오염되고, 엄마가 오염되면 아기가 병든다'

위 명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오염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듯 하다. 아울러 어머니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줌으로써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 가슴은 점점 비워지는 식품저장소가 아니라 저절로 차는 그릇이다."

이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내리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덧붙임: 자칭 타칭,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산부인과 모습을 보는데, 왠지 씁씁하고 과연 미국이라 하여 모든 걸 추종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지은이의 글을 읽으며 강하게 든다. 아울러 총각이여서일까 책이 조금은 지루하다(-특히 환경에 대한 부분) 공감이라는 것은 같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 모자람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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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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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이미 세계화는 이루어졌다.(19쪽)
현재의 세계화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국제 정치'와 '제도적 변수'

->1860년 때 세계화가 늦어진 이유.
1. 주요 선진국들이 IMF와 세계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브레튼 우즈체제'를 통해 국제 자본의 이동 규제
2. 신생 독립국의 무역과 자본 이동을 제약(경제민족주의)
3.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세계화로 인해 대공황이 발발하자, 이를 막기 위해 '규제화된 세계화' 체제를 도입

무엇이 세계화인가.
세계의 흐름, 즉 무역의 원활한 흐름을 이루는 세계화는 100년 전에 발빠르게 이루어졌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몰락은 세계화를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각국은 저 마다의 보호 무역과 국내 경제 성장을 주도 한다. 아울러 국제 자본의 이동을 규제함으로써 각 나라들은 경제민족주의를 실현해 간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1980년대를 지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세계화'라는 단어를 밥 먹듯이 줄줄 달고 다녔다. '세계화'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자리잡는 것으로 혹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주 우정어린 이야기로 들렸다. 우리나라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은 조선 왕조 말기의 또다른 모습으로 인식되고 쇄국정책으로 인한 왕조의 몰락을 기억하는 이들은 세계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김영삼 정부의 참모들은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이라, 그네들이 건내는 세계화를 누구보다 열열히 애창하곤 했다. 이렇게 잘 닦여진 '세계화'라는 이름은 국제금융관리가 시작되자, 그 바란 듯이 날개 돋친 듯이 마구 몰려왔고 그 선두에는 IMF가 있었고,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IMF의 실질적 책임 이행자는 미국와 영국으로 대표되는 나라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료나 지식인들은 세계화 하지 못하여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한국 경제는 '투자조절'과 '경쟁관리'를 포기함으로써(22쪽) 즉, 시장 경제의 도입으로 인해, 경제적 우위(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에 선 나라가 한국의 경영권을 취득하고, 시장논리-여기에는 한국재래시장에서 보여지는 정(情)이라는 매커니즘 대신에 밀림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만이 존재한다-를 들이 댐으로써 인해 쉽게 무너져버렸다.

얼마전에 흥미 있는 기사가 나왔는데, 제2금융권의 자본이 사채업자에 들어가고, 서민들은 높은 은행 문턱에 발이 걸려 사채업자에 손을 벌린다고 했다. 즉 제2금융권은 손 안쓰고 코 푸는 격인데, 이는 비단 은행들의 돈놀이가 아닌, 사회 전반의 구조에 덧 씌워져있다. 그것은 비정규직과 용역이라는 고리이다.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맺지 않아, 언제든지 도망갈 길을 열어놓고, 가진자의 행패로 돈이 없는 이들은 항상 끌여 다닌다. 선진자본이라고 하는 이들이, 우리나라 종합 금융사에 돈을 빌려주고, (1년 미만 단기채무)-다시 종금사가 국내에 돈을 빌려주는 돈놀이를 하여(22쪽), 금융위기의 자초에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오늘에는 합법적인 냥, 카드사는 카드로 돈놀이, 제2금융권은 사채업자에 돈놀이, 정부는 당장 눈에 보이는 지표를 내어놓기 위해 소비지향이라며 카드사의 남발과 가드사용의 격려를 권장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초기에는 IMF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을 그 원인을 지나친 정부 개입과 기형적인 재벌체제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주의 체제의 제도적 결함'(25쪽)에서 찾았지만, 지은이의 답은 다르다.그는 영미식 제도로 불리는 '금융 규제의 미비등 지나친 자유 방임정책 때문에 발생'(26쪽)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책 가운데 사막에 통신 시설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 책이 있다. 그곳에는 일본 기업과 서양기업이 동시에 기지 건설을 하는데... 일본인(주인공)은 철저하게 현지화되어 가는데, 서양인들은 자기들의 제국을 건설하여 그 성(城)에 산다. 북인도 라다크에 가면, 마날리에서 5천 미터 산을 두 개 넘고, 버스를 타고 35시간(8시간 잠자리 포함)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곳은 테라스 아래에 서양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내가 본 서양 여행자들은 그 나라 문화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네들의 성을 쌓는다. 이는 강력한 돈이라는 무기와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즉 그네들은 어디를 가나 문화의 이해보다 자기네의 문화를 사업성에 결부시켜 이식시킨다. 라다크에 그네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거리의 카페와 빵집은 어떻게 될까?

난 지은이가 말하는, '지난 40여 년간 세계가 놀랄 정도로 고도성장과 비교적 균등한 분배를 놓는데 커다란 공헌'(27쪽)에 대해 얼마간 동의하며, 'IMF가 요구한 일련의 제도 개혁들이 우리 경제 위기'를 '근복적 제도 결합에 기인'하여서 출발한다면 분명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IMF의주체는 세계 경제 평화를 위해 암묵적으로 인하는 체제가 아닌, 미국에 종속된 체제일 뿐익 때문이며, 서양인들의 문화에 대한 오만함을 눈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겉모습을 벗겨내고 그 실체, 즉 주체를 새롭게 인식해야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논외로 UN이 과연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가 하는 문제도 연결지을 수 있다.

IMF를 보는 시민 단체의 시선은 곱지가 않다.

"대다수의 시민단체는 지난 20여 년간 IMF와 세계 은행이 개발 도상국에 자금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요구해 왔던 재정 긴축, 고 이자율, 상품 및 자본 시장 개방, 민영화. 규제 완화 등의 정책이 대부분의 경우 약속과는 달리 개발 도상국의 발전을 촉진하지 않았았음을 지적하면서 , 동시에 IMF와 세계은행이 해당 국가의 특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교과서적 모델에 기반한 천편일률적인 정책만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54쪽)

지은이가 보는 영미계 분서가들의 한국 기업 모습. 101쪽
세계화를 논하는 이들의 시선 및 반박 114쪽
미국의 쌍무투자협졍에 나타난 그들의 강압적 요구 149쪽
글로벌 스탠더드의 위선(?) 151쪽

신자본주의의 폐해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 이미 논의되었듯이, '고배당과 안전 위주 경영을 바라는 외국인 주주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서, 투자 대신에 수익률(배당)과 현금 비중을 더 높게(81쪽)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기업으로 투자 자본금이 몰려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여기서는 실질적 이야기가 없기에 본인의 추론임)활기찬 투자로 유도 한다. 기업의 투자는 자연스런 실업문제의 해결(추론)로 이어질 것이다. 지은이의 대안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보는게 아니라, 저 멀리에서 몰려오는 큰바람을 보고 있기에 시선이 멀리 간다.

보호 무역에 의한 경제강국이 된 나라, 그리고 사다리 걷어차기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미국이나 영국도 보호무역을 했다. 우선 영국은 양모수출과 모직물 수입에 따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 헨리7세 등 영국의 왕들은 양모에 대해서는 수출 관세를 부과하고, 모직물에 대해서는 수입 관세를 부과하는가 하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외국인 기술자를 스카우트해 오는 등 모직물 산업의 수입대체 공업화를 추진하였다'(58쪽) 그리고 자유무역을 시작한 것은 '자국의 경제적 우위가 공고해진 19세기 중반'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가지 보호무역-잭슨 대통령, 워싱턴, 링컨, 그랜드 대통령, 헤밀턴 초대 재무장관, 프랭크린 어록(41쪽 ~43쪽)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보호 정책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참고 60쪽~61쪽)

지은이는 이러한 '사다리 걷어차기'의 악순환을 누군가가 끊어야 하는데, 일본은 잃을게 너무 많고, 대만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기에, 우리나라(63쪽)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과연?

미국 수출입의 의존도가 편중되어 있고, 인건비가 높다고 무조건 중국으로 등을 돌리는 우리나라가, 정치꾼들은 세 명 모이면 새당을 만들어 '시민을 위해서'라는 얕은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환자들인... 중산층은 내 살기 위해 아둥바둥이고... 지은이는 현실적 인식을 하고 있는가? 낭만적 꿈을 꾸는가?

작은 정부-신자유주의자들의 외침
지은이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에 대해 단호히 거부한다. 이는 현재의 자유방임주의가 공정한 게임이 아니며, 선진 자본주의의 투기꾼에 놀아날 수가 있으며, 부익부 빈인빈 등 극심한 경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경제주도의 정책이 만능인가?

며칠 전에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다룬 [차베스, 미국과 맞짱 떠다]를 읽어보았다. 그는 분명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강한 정부'에 앞장서고 있다. 극심한 절대적 빈곤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가 대통령이 되어 제도 개혁을 우선시 한다. 이렇게 볼 때 '강한 정부'가 분명 옳다고 보여지지만.

'미얀마'의 일년의 사태에 보여지듯, 자칫하면 독재로 갈 수가 있다. 즉 '강한 정부'를 지지하지만 그 위에 서는 자가 어떤 인물인간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을 가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미식에서는 신자유주의자가 그들의 경제를 회생시킬 탈출구 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이를 강력하게 밀지만, 그네들과 다른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은 막무가내로 나를 따르라하는 식이다.

난 '강한 정부'를 꿈꾼다. 그렇지만 정부의 강한 의지 위에 선두마차를 끄는 이들의 가치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세계화'의 문을 열였고, 노무현 정부는 이럴 수습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경제는 대기업의 논리에 맞아 돌아가고, 정치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은 재야, 비판사회, 정당 마저 손을 놓는 자포자기에 빠져버린다. 중산층은 저 하나 열심히 하여, 이 모순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발버둥 치지만 총체적 결함에 빠진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는 건, 강한 비판 정신을 지신 시민이 다시 일어서고, '내 아이 하나만이 아닌, 우리 아이가 잘 사는 세상'을 꿈꿀 때, 대한민국은 세계의 부러움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서 쫓겨나듯 했을 때, 과연 그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면 쉽게 분명 얻는게 있으리라.

가치관의 충돌, 재벌 개혁의궁극적 목표가 '주주 자본주의'라 했을 때, 기업은 누구의 소유편이며, 이익은 누구를 위해 쓰여지는가는 첨예한 대립을 낳을 것이다. 법적인 해석은 '기업의 주인이 주주'이다. 하지만 영미계를 제외한 여러나라들은 '주주란 직접 금융의 조달자로서 경영진, 노동자, 채권자, 하청업체, 지역사회 등 여러 이해 당사자 집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160쪽)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시장 만능주의, 작은 정부를 통해 추구하려는 건주주의 이익 극대화라고 할때, 국가 관료나 학자, 재력가들이 외치는 주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미국의 정치 관료들이 외치는 주주의 설정 테두리는 어디까지인가? 몇 몇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보여진다. 국가관료가 제 잇속을 채우고, 기업가가 자기 돈벌이에 급급하고, 학자는 자기 자리에 연연하며, 국가 관료와 기업가에서 그네 타기를 한다면....

지은이는 주주 자본주의 바로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아갸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155쪽 ~166쪽) 깊이 새겨볼 만 하다!!

정부주도형 국가
정부주도형 국가는 싱가포르, 오스트리아(부정부패가 적기로 이름나 있다), 일본, 프랑스

1997년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일단 위기를 벗어나자 정부 관료가 다음으로 요구 한 일은 헐값에 외국나라에 팔아넘기는 일이였다. 즉 서민들의 세금으로 우리나라 기업을 어느정도 숨통을 틔우자, 그네들은 서민들과 어떠한 이야기도 없이 값싸게-외국기업에게, 왜 국내 기업은 안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의문이고, 장사를 하려했으면 최대한 비싸게 파는 것인데... 난 정말 이해가 아직도 안가는 부분이다-그렇게 빨리 처리 했어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로 남아있다. 이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에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잡음이 들리는 이유도 하나 일 것이다.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의 가치관이 신자유주의나 강한 정부에 앞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정책을 만들어 내고, 지향하는 것은 제도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이다.(97쪽)

지은이가 보는 선진국제도는 '미국식 제도'가 아니라 일본의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조관계, 관련기업 간의 상호주식 보유, 종신 고용제', 독일 '은행 중심의 금융제도', 프랑스 '엘리트 관료의 주도에 의한 적극적 산업 정책과 국가의 금융기관통제, 스페인,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국 제국의 '노사정 합의를 통해 투자, 임금, 사회복지 지출수준을 정하는 소위 사회적 조합주의' 이탈리의 대기업과 고부가 가치 중소기업들의 상호 조화 등이 선진제도(129쪽, 127~128쪽)라 생각한다. 즉 일반적인 미국의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실질적 서민경제를 일으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사회복지를 일궈내는 제도를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선은 넓고 무엇보다 깊이가 있다.

짧은 글을 신문에 기고해서인지, 글의 중복이 심하다. 아울러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전작에서 그는 '강력한 정부의 개혁의지'를 천명했고,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선진국의 보호 무역을 통한 자국경제 양성 후 작은 정부, 시장 경제를 논하는 이들에 대해 옛날의 그들 모습을 환기시켜 주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책, [개혁의 덫]은 앞의 책에서 크게 발전되지 않았으며, 그의 논조를 다시 반복하는 글에 머무르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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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낸 20년
청전 지음 / 지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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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우리는 두 번이나 마주칠 수 있었지만, 인연의 끊이 닿지 않아 제가 그곳에 머물렀지만 마주치지 못했고, 아니 스쳐지나갔더라도 저는 '앎'이 없어 그냥 냉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맥그로드 간지'를 떠올리면, 티벳의 망명정부, 달라이 라마, 그를 따라온 티벳 사람들의 고난 등입니다. 난 북인도의 한 곳에서 티벳을 꿈꾸며 그리워하는 그들이 무척이나 궁금했고, 또한 나라 잃은 슬픔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달라이 다라를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다람살라의 선물]에서 실연에 빠진 지은이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뵙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지은이 만큼 달라이 라마를 먼곳에서다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리하여 티벳, 네팔을 너머 북인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여행자를 한 명 만났습니다. 그는 인도 델리로 떨어졌지만 코코넛 플리스보다 티벳탄 꼴로니를 더 그리워했으며 티벳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저 처럼 달라이 라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전 그의 책을 읽으면 누구나 그에게 빠져 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분을 만나뵙고서는 결단을 내리시고, 스무해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닷새 동안 그 거리를 머물고 떠났으니...

스님의 이야기를 듣으며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라마승 등이 선진 경제국에 유학가서는 그곳에서 삶을 뿌리내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티벳 라사를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환상을 가진 듯 했습니다. 3,650m라는 높은 도시, 넓은 티벳 고원, 삭막한 산 속에 피어난 포탈라궁, 시린 겨울을 뚫고 피어나는 숭고한 아름다운 같은 티벳인들의 오체투지, 라마승의 세상과 등진 듯 한 깊은 토의에 빠지는 모습, 하늘이 부셔지는 나무초 호수, 세계의 기둥이 쏫은 강 린포체(수미산, 카일라쉬), 타시달레라고 부르며 내 아닌 다른 이에게 행운을 비는 순박한 사람들. 하지만 라사에 들어가니, 라사는 티벳의 라사가 아닌 한족의 라사로 보였습니다. 티벳인들은 가난과 극심한 힘겨움에 지쳐있었고, 아무나에게 달려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벌리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내가 그린 티벳과 달라 애써 지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열흘을 바코르 거리에서 그네들과 함께 코라 돌며 알았습니다. 겉모습은 땟국물이 흐르며, 옷은 누더기 같지만 마음은 아주 순박한 사람이란 걸.

첫날과 둘째날에 내가 본 것은 한족이 지은 건물이며, 열흘이 되었을 때 제가 본 것은 티벳의 마음이였습니다. 중국의 의해 침략당했지만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오체투지하는 이들, 그런 순박한 이들이....

선진자본주의 삶이 어떤 것이기에, 그네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이는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다시 듣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물론 제가 자기들을 위해 물 한 그릇 떠 놓지 않은체, 그네들의 순수함만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티벳인들이 품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맥그로드 간지(-책에서는 '다람살라'라 표기)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제가 머무른 거리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박수폭포를 보고, 코라를 돌곤 했습니다. 아주 작은 동네이지요. 조금 아쉬운 것은 티벳 어린이 학교에 들지못했다는 것, 좀 더 티벳인과 친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페 리'의 분위기도 전 좋았습니다.

전 스리나가르에서 레(라다크의 수도)로 가지 않고, 마날리에서 올랐습니다. '레'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환상을 가졌습니다. 지은이는 두번째 여행에서 자립자족이 무너지고 선진 경제국의 자본에 의해 자유로울 수 없는 그 땅을 이야기하는데... 전 그의 첫 여행 느낌을 품고 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날리(2,000m)에서 레(3,500m -5,000m 산을 두개 넘어)로 가는 길은 제가 다녀본 길 가운데 가장 '흥미만점'의 길이였습니다. 로컬버스의 48번 자리.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달리는 기사 아저씨. 포장되지 않은 길. 이런 길을 달려 그곳에 가면 어떤 분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술사'이며, '영매사', '의사'였습니다. [다람살라의 선물],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에서 두 지은이가 만나뵙고 온 이야기가 나옵ㄴ디ㅏ. 제가 여행을 가기 전에 스님의 책을 읽었다면 스님도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여행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밤 늦게 들어가, 이틀을 머무르고 다음날 알치, 라마유르를 통해 빠져 나왔습니다. 처음 여행이고 워낙 오지인지라 무척 겁을 먹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쩜 더 순박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여행이 끝나고 간혹 들곤합니다. 스님의 책을 읽으며, 이번에는 나도 스님처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론리 플래닛 등을 보면, 판공초나 누브라 밸리가는 길 등의 비싼 돈이 드는 관광지는 나오지만 라닥인으로 들어가는 길은 못 본 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의 책은 또다른 여행의 의미를 알려주는 듯 합니다.

스님은 너무 초조해 하지 마라 하시며, 가장 낮은 시선으로 세상의 아픔을 보듬으려 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잘났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조용조용 걸으시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강 린포체를 찾아가는 길은 제게는 다시 설레임입니다.

제가 여행을 꿈꾸고, 티벳인을 생각한 것은 전남 대원사의 티벳 박물관에서 본 '강 린포체'의 사진 한 장 때문입니다. 결국 시가체에서 히말라야 계곡 속으로 떨어져 네팔로 드는 바람에 강 린포체는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에 깨달았습니다. 그때 가지 않은 게 더 좋았다는 걸. 그때 여행했다면 전 4륜 구동의 랜드크루저 타고, 편안하게 갔다 산을 돌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산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여행. 시가체에서 강 린포체를 이어지는 800km는 그냥 건너가야 하는 '다리'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전 스님처럼 티벳인들 속으로 들어가고, 내가 줄 수있는 그 무엇을 건내주고, 그네들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립니다.

세상이 자꾸자꾸 삭막해지고, 어설픈 글로 스스로 존귀하다고 할 때, 스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기만 하십니다. 큰 사람을 만난 듯 합니다. 다음 번에 다시 길 위에 선 다면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10월 24일 깊어가는 가을에.
열린사회의적 올림.

추신: 책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맥그로드 간지, 라다크, 티벳의 이야기가 펼쳐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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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이성형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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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편
"이 리포터는 좀 오래된 이야기인 하지만 비단 렌터가 회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면..."(41쪽)

이런 식으로 글쓰기는, 솔직히 최악이다. 어느 기자의 오래된 경험담이며, '렌터카 회사에서만' 벌어지는지 아닌지 검증이 안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에, 모든 사회에서 벌어지는 듯이 이야기한다. 즉 그가 직접 보거나, 여러 회사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도출한 것 없이, 남의 오래된 이야기 하나로 전체 사회를 흉보고 있다. 좀 더 신중한 노력이 필요하다. 난, 그의 글에 대해 조심스러워진다.

"택시를 잡았다. (중략) 그러고 보니 쿠바는 정말 주인이 없다. 누구에게나 들어오고 싶은 사람에겐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63쪽)

조금 부담스러운 글. 정부가 운영하는 택시는 현대, 메르세데스, (소련제 리다는 안들어온지 오래) 그리고 구소련이 물러나고 나서, 들어온 차가 '유럽 한국 그리고 일본차'라는 이유만으로 쿠바에는 주인이 없다? 이 '주인'이라는 말이 어떤 말인가? 개방? 이 개방의 개념은 어디까지인가? 지은이는 카스트로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항하는 이 나라를 무척이나 짝사랑하는 듯하다.

도대체, 쿠바에 대해서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시장 경제 체제의 도입이 문앞이니 물건 팔로 가자고? 무엇이 쿠바의 문화인가?

전체적으로,
통일된 글쓰기는 이루어지지 않고,
정보는 다리 건너 집의 것으로 짓고,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들려주지 않고,
머리속에 맴도는 이야기를 앞뒤 없이 늘어놓는다.

페루 편

정당의 이름에서 그들의 이념이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페루'라니? 이들이름포에서 페루 정치의 위기를 읽는다. 대표적인 정당의 이름이 이 정도면 페루 정치에 사실상 근대적인 정당 개념은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71쪽)

한나당, 열린 우리당은 차이는 무엇인가? 지은이는 이들의 정당에서 이념이나 특징을 읽고, 정당의 정치 이념이 정치인들과 행동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수시로 바뀌는, 우리 정당사의 이름은 정치적 혼란인가? 가치관의 수정인가?

그네들의 정당 이름이 '낯설다' 혹은 '우리와 다르다'하면 이해하겠는데, '근대적인 정당 개념이 없다'는 지은이의 생각은 무지 편협적이다. 어떻게 한 나라의 정당 이름으로 그 나라의 정당사를 논할 수가 있는가?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설득시켜 달라.

그는 내게 이렇게 들려준다.

"모두 선거에표를 동원하려는 동원주의 운동체의 이름이지 권력을 교대하는 다원주의 정치체의 일부로서의 정당은 아닐 것이다."

동원주의 운동체? 권력을 교대하는 다원주의, 그의 말이 다시 나를 어지럽게 한다.

사회 경젝적, 지리적 공간의 특성을 보면 그 사회의 얼개를 대강 파악할 수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대강 파악하는 것이 아니며, 수 없이 묻고 되물으려는 비판적인 자세와 이를 찾기 위해 수 많은 자료와 사람과 부딪혀야 한다. 그러하고도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지은이는 '얼개를 대강 파악'하며 이를 전제화하려 한다. 난 그의 거만이 부자연스럽다. 어떤 지은이는 어떤 사료를 찾을 때, 2차 자료가 아닌 1차 자료를 본다고 했다. 즉 2차 자료의 인용은 책에서 쓰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어느 노학자의 자세와 젊은 지은이의 시선이 너무 틀리다. 난 느리더라도 노학자의 글쓰기가 참 좋다.

사설 보완회사와 정치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군 별로 신뢰감을 주지 못해요. 말도 잘 바꾸고요"
아하! 루르데스 플로레스가 백인이구나. 짐짓 눈치를 챘다. 역시 피부색과 출신이 문제였다" (73쪽)

문화를 담아내는 여행기를 쓰시나요? 소설을 쓰시나요? 페루 리마에서 한 일은 사설 보안회사를 만나, 짐작으로 정치 이야기를 담아내는게 전부!!

그런 왜 이런 생각을 가질까? 이 생각의 토대는 어디에 두고 있는걸까?

"꾸스꼬에 오서 보니 이상하게도 이곳 사람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별로 친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디오들이나 피부색이 짙은 메스티소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팁을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할 터인데, 왜 그럴까?" (89쪽)  

그에게 친절은, 경제적 산업적 화페 가치가 높은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이 다가와, 굽실 거리며 아부하는 모습일까? 난 이런 모습에서 지은이의 거만함을 보는 듯해 가슴 아프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그에게는 '물건을 팔거나 팁을 받으려 애 쓰는 모습'이라니... 가슴 아프다. 그리고 페루는 이런 게 일상인가? 그렇다면 이 일상의 헤게모니와 이들의 경제 상황의 역할을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를 극복할 방안은 없는가? 이들은 이런 삶에 대해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는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캐내지 않음에 나는 그의 게으름 대신에 오만함을 읽어낸다. 단지 한 소설을 통해 추론 한 것이 '극단적인 피해의식'(90쪽)이다.

음반 가게에 들어가 야뿌의 음반을 보고,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진다.

"어! 칠레의 것이 왜 이런 촌골짜기까지 들어와 있나? 가격표를 보니 멕시코 가격의 삼분의 일 정도이다. 불법복제본이 아니냐고 시큰둥해서 물어보니 아니란다."(107쪽)

이런 사고를 하고, 이런 글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그의 가치관이 나는 너무 낯설다. 조금 미안해 하는 마음도 글로 표현하지.

그는 관광지를 둘러다니며, 그가 아는 옅은 지식으로 (-어디서 엿듣거나 본 것 등)글을 쓰 간다. 하지만 음악이 흐르면 그는 열심히 노래 부르 듯 이야기 한다. 그는 분명 남미 음악에 빠져있다. 하지만 음악 또한 그의 머리에 들어있지 쉬이 밖으로 울려퍼지지 않는 노래이다.

온갖 추측을 기정 사실화하고, 그가 연구한 자료보다 주워 듣은 이야기를 앞에 세우고, 사람속으로 들지 않고 관광지와 호텔을 돌아다니는 그의 여행기는... 깊이 동행을 하지 못하고 페루에서 발길을 돌린다.

아주 가벼우면 쉽게 읽을 수가 있는데, 왜곡되어 있으면 어렵게 읽힐 뿐이다. 깊은 연구를 한 다음에 다시 뵙고 싶다. 그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 나 보다 조금 어려운 마음을 간다면... 적어도 이런 글귀는 한번 새겨 보시길.

겨울밤 단 한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추신: 제목은 글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쿠바라는 이미지로 인해 상업적으로 전략한 제목을 선택한다. 우리는 '체 게바라'의 사상이나 이념은 몰라도 그의 얼굴에 열광하고, 그의 여행기를 읽듯, 그리고 쿠바의 혁명은 '체'에 멈춰었고, 카스트로는 독재자이고 쿠바의 아바나는 영원한 혁명의 이데아이다. 지난 과거의 낭만에 젖어 오늘의 현실을 외면하는 건, 상업적 이미지가 만들어낸 허구임을 직시해야 한다. 적어도 아바나를 읽고, 쿠바를 좋아한다는 건 체의 사상이나 혁명을 읽고, 독재자라 불리는 카스트로를 조금 읽은 다음에야 한다. 너무 쉽게 쿠바를 팔아먹는 출판 시장의 한 모습을 보며 씁씁함을 되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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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 2023-06-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악의적이네요 ㄷㄷ 중남미 많이 다녀본 사람으로서 이성형 선생님 지식이나 경험이 그렇게 허술한 건 아닌데 대체 그럼 누가 여행기를 써야하는지? 시중에 나와있는 중남미나 쿠바 관련 여행기를 한번 보세요 90%가 3류에도 못미치는 글입니다

지나다 2023-06-1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행기를 누가 논문 쓰듯 하는지. 41페이지에 인용없다고 비판하는 건 정말 기가막히네요 ㅎㅎ 세상은 넓다 정말
 
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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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들의 건국에서, 한니발 전쟁을 통한 지중해 장악,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로 통해 비대해진 로마를 수술하려 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넘치는 열정 앞에 비대해진 권력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안은 비대해진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도화선이 되고, 그를 이어 영웅들이 밤하늘 별처럼 나타나기 시작한다.

1.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한니발과 전투, 전사戰死)
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스카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 대전)
                                   (스카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과 결혼)
3. 테비리우스, 가우쿠스 그라쿠스 형제 (외조부-스카피오 아프리카 누스)
*1~ 3 직속관계

4. 드루스수
5. 마리우스, 술라, 킨나
* 5 동시대 인물

6. 술라의 제자 ->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7. 킨나 - 율리우스 (장인-사위관계)
* 1 ~ 7 연대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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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라쿠스, 스카피오 가문과의 관계
2. 마리우스, 술라 그리고 루쿨루스와 폼페이수의 군속관계
3. 전쟁을 통한 험난한 시기에, 다행스럽게도 영웅은 영웅을 잉태한다. 이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엄청난 책사와 모략이 쏟아진 점과 비슷하며, 이러한 영웅의 움직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그나라의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그라쿠스의 가문이 개혁을 이끌다 두 형제(크라쿠스 형제, 3)의 죽음으로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희대의 명장 루쿨루스(6)에 부하가 없어, 그의 사상이나 전략을 이어받지 못하는 점 등은 역사적 비운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권에서 로마의 역사발전을 외부의 적, 한니발에 의한 전쟁으로 인식하는 건 영웅주의(한니발 도취)에 해당하며,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로마인에 대한 인식접근을 깊이있게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이는 야코프 부르크 카르트(273쪽)의 말을 빌린 점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이런 아쉬운 가운데, 지은이는 깊은 혜안을 가진 화두를 하나 정도 던질 줄 알고 있다. 이는 다문화 시대에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화의 전형성이라 생각한다.

"로마인이 실증적으로 인류에게 가르쳐 준 것 가운데 하나는 각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하는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143쪽)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미트라디테스의눈으로 볼 것인가(267쪽, 침략주의-영웅주의) 혹은 오리엔트(킬리키아)에서 동생에게 보낸 키케로의 편지처럼 '전쟁과 내분에서 구출'(272쪽) 해 주는 평화의 사도(문화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세금만 로마에 지불, 외 적으로 부터 공동대응 발판 마련, 이를 토해로 한 문화적 다양성 수용)로 볼 것인가는 개인적 몫으로 남을 것이다.

난, ...경계한다.
2권에서 이어지는 한니발 전쟁의 '전쟁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전쟁을 이끌고 가기 위해 그들의 개혁법안이 현실과 충돌했다는 이야기 한줄에 전쟁의 이야기는 몇 백 쪽에 이른다. 난 전쟁의 영웅을 쫓고 있으면서, 그네들의 문화나 삶에 대한 형성은 새겨 들을 수가 없다. 또한 전쟁은 아주 쉬운 영웅을 만들어 낸다. 이는 지휘체계이며, 피라미드로 형성된 계급의 꼭대기에는 지휘관이 자리하며, 그는 영웅 아니면 패웅으로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긴 긴 전쟁동안, 전쟁 영웅은 아주 쉽게 출현하고, 이를 끌고가는 이야기는 자칫 '군국 영웅주의'의 부활을 암시할 수 있기에 3권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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