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자, 세상과 소통하다 Beyond Travel Beyond Language 1
방희종 지음, 김시훈 그림 / NEWRUN(뉴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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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주 오랫만이다.


책을 펼치고서 글 하나하나 읽으며, 내 목 등뒤에서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느낌. 아주 조심조심스레 다가갔는데, 그는 선뜻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가이 맞이해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나는 '맞다' '맞다' 속으로 글 한자를 띄엄 띄엄 읽을 때 마다 소리친다. 속으로 고함 지르고,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떠남을 그려보고, 내 지난 길을 되돌려 본다. 옆에서 일하는 이가 '뭐가 그리 재미있노' 물어보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여행에 대해 무수한 정의를 둘러세우고, 그 의미를 '도(道)'라 할 만큼 포장을 하며 설득하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는 '이상주의자'이거나 '대책 없는 혹은 현실을 모르는 이'라는 철부지 어린아이를 보는 시선이였다. 난 그에게 여행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길을 나선 이가 있다면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야기를 엿들어보며 홀로 좋아라 한다.

그리고 '하우아시아' 내게 아시아를 들려주었고, 안나푸르나를 그려주었고, 네팔의 퍼수파티나흐와 사두를 소개해 주었다. 두 번의 배낭 여행, 아시아의 길을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쩜 '하우아시아'의 만남 때문이였다면, 난 성급하게 온라인으로 일어오던 그의 글을, 가을비가 내리는 오늘밤, 어둠이 사위를 감싸는 늦가을 밤, 커피 한 잔 책상 위에 놓아두고, 메모지를 꺼내 놓은 다음, 그의 이야기를 새겨 듣는다. 그리고 몇 번이고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미소를 짓는다.

두 번의 만남,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난 아무래도 오늘 밤 안에 이 책을 다 못 읽겠다. 한 쪽 읽고 미소짓고서는 그곳을 무아지경 동경한다. 그리고 한 이야기를 듣고 마냥 웃기만 한다.

나도 유난히 네팔을 좋아하고, 발티스탄을 그리워하고, 카라쿨 호수의 천막과 카쉬가르의 오래된 골목, 히말라야를 무지 무지 좋아라 한답니다.

그의 여행기록 http://www.howasia.net 내 여행기록 http://nacafe.co.kr

내가 담은 사진 몇 장.


티벳 라싸에 대해.


작은 티벳, 라다크의 곰파와 하늘


히말라야를 닮은 순수한 나라. 네팔 포카라


사막의 오아시스, 카쉬가르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카라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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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40일 간의 낮과 밤 - 에베레스트.안나푸르나 트레킹 입문
김홍성.정명경 지음 / 세상의아침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의 아주 사소한 일기,
어쩜 어린아이가 첫 일기를 쓰고 선생님에게 억지 검사를 맡기 위해 내미는 느낌.
이 글에는 감정의 과잉 대신에 아주 차분하게, 글이 적혀내려가면서, 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나와 세계에 대한 성찰이 숨어 있어 읽기에 큰 부담이 ㅇ벗다. 즉 그의 글길을 따라가면 순례가 끝이나고, 책속에 펼쳐진 사진을 보면 쿰부에 닿게 된다. 간간히 고소 증세에 대한 지은이의 염려와 똑부르지게 이루어짐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도 좋을 듯 하지만...

여행은 개인의 문제이다.
'우리는 순례 엿새 째 되는 날도 하루 종일 하이랜드 셀파 리조트에서 빈둥빈둥 놀았다(66쪽)'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그의 글은 객관적 진실성이 보장되지만, 적어도 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읻. 하루 종일 리조트에서, 고소 증세를 위해 놀 것인가, 잠시라도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흉내를 낸다 한들 어떠랴, 그 자세가 있은 다음에 성찰이 따라오게됨이 순리이니, 성찰의 깊이를 논하기 앞서 행위를 먼저 이루어야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 나눠봄도 좋을 듯 한데...
(어쩜 지은이는 네팔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타성에 적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분명한 것은,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사진으로도 빠질 듯 하니 글이 얇다면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듯 하다.

뫼(山)를 등정(登頂)하는 것일까? 나는 경외하며 코라(순례)도는 것일까? 네팔 안나 푸르나 앞에 서기 앞서, 티벳 강 린포체 앞에 서기 앞서 난 내게 묻고 답을 얻을 것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초모룽마, 순례라는 말에 큰 동감을 가지지만 아쉬운 점은, 여기서 한 발 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별외,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나는 정복함에 두느냐 경외함에 두느냐에 갈린다고 생각한다. 정복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신'적인 존재이기에 지구를, 그의 의지대로 재창조할 수 있게 한다.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계시다면, 그 신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사람' 역시, 지구 상에 '신의 아들'이 되며, '지구의 신'이 된다.

동양은 이와는 다르게 본다고 생각한다. 도올 김용옥의 책( '앙코르와트.월남을 가다' )을 오후에 잠시 보았는데, 그는 두려움과 경외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근함을 같이 본다고 했따. 두려움이 경외감으로 대등하고, 경외감은 친근함으로 전이된다. 즉 호랑이는 두려움의 존재이지만 꽃감보다 무섭지 않은 친근한 존재이다. 동양의 사고는 두려운 존재는 겸손함과 같고, 그 겸손은 다시 친근함을 옆에 앉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자연 앞에서도 함부로 함이 없으며, 친근하게 다가간다. 티벳의 강 린포체를 코라 도는 사람과 지리산에 오르는 남명 조식 선생님의 행위는 겉모습은 다를 지언정 그 근본은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인간의 자아성찰로 이루어진다. 어쩜 동양에서는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일 것이다. 이는 정복과 재조합을 통한 창조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있는 서양의 사상과 크게 엇난다.

* 동양과 서양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데, 동양은 유,불교 문화권으로 서양은 흔히 말하는 기독교 문화권으로 할 때, 이슬람 문명이나 여타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는 협소함에 머무른다. 그렇기에 위에 별외에 들어간 동서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유,불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기준으로 삶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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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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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슴 시린 말과 오늘날 우리 예(藝)에 대한 인식

설핏 보았다는 풍문을 단서로 물어물어 문 앞에 당도하면,
"도둑질도 손 떼면 가만 두는데 왜 들추느냐" (1권 44쪽)

한 평생 가슴에 시린 한이 우물에서 건져 올려지는 듯하다. 가만히 잠재워 둘 것이지, 왜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느냐는 환청이 와락 덮쳐온다. 소름이 끼친다.

그의 글은 참 낯설다. 그는 '전통 예술이 상아탑으로 들어간 후, 무대의 명인은 묻히고 교육의 명인만 남은 듯'(29쪽)하다며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만나고, 그들의 삶을 다시 마중 나간 이들도 화려한 명성이라는 게, '유랑극단에서, 굿판에서, 환갑잔치 집에서 얻은 것'이 전부이지만 뼛속까지 '예(藝)'가 묻은 '개비'이다. 하지만 그 궁핍이 삶의 한 가운데 흐르고, 지방에 머무르니 쉬이 잊혀지고 먹고 살기 위해 권번에 든 것이 남 손가락질이 되니 다시 한으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도둑질'이라는 비유어가 삿대질처럼 쏟아져 나온다. 울분이 머리보다 먼저 앞선다.

그의 글은 참 낯설다. 처음 문장을 읽어 가는데 매끄럽지도 못한 게 한 자 한 자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 두 번째에는 예인에 대한 존중, 즉 '옛 명성을 접고 초야에 묻혀 근면한 촌부'로 남은 이들에 대한 겸허한 마음 가지일까 생각했는데, 모든 게 다 맞고, 모든 게 틀리다. 그의 글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신명나게 굿판을 벌린 이들에 대한 아픔을 그는 장이 끝난 다음에, 그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책머리에서, '초야'에 묻힌 이들을 불러내어, 잊혀져 가는 그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주십사 하며 적은 글을 엮었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네들의 아픔을 들려주고 있다. 즉 그의 글에는 신명나게 춤추는 이와 이 신명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 가며 누구보다 아파하는 지은이가 앉아 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150원 짜리 커피를 마시며,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무엇을 느끼고 책을 읽다 말고 밖으로 나와 높아만 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괜스레 눈물이 날 듯 한 가을 하늘이다.

책을 들어설 때에는 쪽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겠다고 자만했는데……. 이는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를 안다는 어리석음과 별개가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예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분들의 춤을 단 한 번이라도 유심히 보았는가 내게 물어본다.

"'즉흥'은 흔히 이야기 하는 임기응변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그 무대만의 무언가를 조성하는, 까마득히 잊혀진 기법의 이름이 즉흥이었다. 특별히 크고 미적은 동작은 없다. "

즉흥, 이는 창조이다. 이는 틀을 깬 행위이기에 매번 같으면서 틀리다. 장자가 꿈을 깨고 난 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사고하는 동물이 아닌, 자연(自然)이 되어있다. 글을 쓰는 이가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을 의식하지 않고 몸속에 녹이고 난 다음에 적듯, '즉흥'은 몸속에 녹아든 행위가 몸밖으로 들어남이다. 이는 지은이 말처럼 '해서'가 쓰기의 기본이라면 '초서'는 그 마침이고, 지은이의 춤은 초서의 다른 의미가 된다. 얼마나 깊이 춤을 보고, 그 드러남을 온몸으로 품어야 그이의 초서 춤을 볼 수 있을까. 나는 몇 개의 언어로 앎을 들어내고 지은이의 글을 읽지만 그네의 춤은, 분명 몇 권이고 보아도 '초서'인지 '해서'인지 모를 것이다. 이는 머리는 아는 앎과 몸으로 느끼는 앎 사의 괴리이다. 난 조금씩 지은이의 글을 읽어가며, 머리에서 몸으로 내린다.

책을 읽어가면서 조금 아쉬운 점은 한 예인의 삶을 통째로 들어놓으려 하다 보니, 방이 모자라고 이야기는 넘쳐난다는 느낌이다. 즉 선택과 집중 부분에서 크게 갈린다. 춤 하나를 이야기 하며 그 속에 서린 삶의 아련한 부분 만 그려주었으면 하는데, 여러 삶의 편린들이 흩날리고 있다. 짧은 글 속에 긴 삶이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난 그의 글을 읽으며, 글이 과연 얼마나 깊을 수가 있나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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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 세트 - 전4권
야마자키 도요코 지음, 박재희 옮김 / 청조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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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한 인간으로 겪어야 하는 선택의 문제.
우리는 이상이라는 앞날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현실은 이상으로 날아가게끔 발돋움을 해 주지 않는다. 즉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기득권의 세력은 큰 힘이고, 이를 싸워나가야 하는 건 개인적 존재이며, 많은 이들의 시선이고 가족의 안위를 볼모로 삼아야 하는 지극히 불편한 가시 울타리 안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이를 놓아두면 기득권은 그들이 지닌 힘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며,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억눌리며, 나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맹목적인 신념과 다른 이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연민으로써 자위를 하며 하루하루 지낼 것이다.

사또미 슈지와 그 형 세이이찌, 그리고 사또미 아내의 대화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며 소시민 적인 삶과 이상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이다.      - 3권 15쪽 -

한 스승 두 제자.
한 스승 밑에 두 명의 제자가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리킨다. 의사는 신이 아니며 사람이기에 묻고 또 묻고 의심나면 지속적으로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고.

한 제자는 타고난 메스 실력으로 의학계를 놀라게 한다. 그의 솜씨는 천의무봉이라 할 정도이며, 이제 그는 시간과 다툼을 벌인다. 얼마나 빨리 수술을 집도하는가에 대한 열정에 두 눈이 활활 타오른다. 다른 제자는 메스 실력 보다는 끊임없이 환자 곁에 머무르고, 그가 의심이 가면 그 끝을 파고들며 뿌리를 찾아내려 한다. 그들 관계 속에 이해타산이 거미줄처럼 걸린 이들이 있는데, 그네들은 타고난 메스 실력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학교수로 승진시키고, 의술학원에 당선시킨다. 그는 자기의 든든한 동앗줄을 잡음으로써 이를 십분 활용하여 가난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자기 증식을 하는 '암'과 같은 사회에 발을 내디딘다. 그는 죽음까지 몰랐다. 그의 친구 사또미가 '너무 밖으로 돈다'고 했을 때, 그의 충고를 새겨 듣었더라면…….

한 사람을 본다. 끊임없이 차오르는 자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앞으로 질주 하지만 그가 나아가는 것이 바이러스처럼 자기 증식을 통해 세포분열을 거듭하여, 자기를 파멸시키는 곳임을. 사또미 슈지가 소신 있는 이야기(-법정 진술)를 통해 끝내 대학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대학 밖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 자기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천부적인 메스 솜씨를 자랑하는 자이젠 고로우, 자기가 진찰한 환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은 사또미 슈지, 난 어느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의과대학이라는 곳에 사람이 몰리면서, 서로 다른 줄서기가 이루어지고 구조적 문제를 통해 한 환자에 2~3분 진찰이 오고가며, 교수를 수행하는 무수한 사람들은 환자와 의사에 선 벽으로 남는다.  난 의과대학이라는 곳이, 판사의 판결처럼 좀 더 높은 교육적 잣대를  통해 모법으로 삼고 싶지만, 그곳에도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를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하얀거탑]은 여는 일본 만화책에서 보여지는 이상론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1960년대 일본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의사와 환자의 오진과 근무태만에 대한 이야기를 법정 깊숙이 들고 간다. 의학 지식에 대해 깊이가 없는 젊은 변호사(세이구찌)가 높은 벽을 넘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아울러 인간의 모습, -자이젠 고로우의 외로움, 아즈마 교수의 딸의 사또미 슈지에 대한 동경 등은 인간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다루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다양한 모습을 잘 그려낸다.

아직도 의료분쟁이 일어나면, 공룡과 개미의 싸움처럼 보이는데……. 지난 2주 동안 난 책을 읽으며 자이젠과 사또미를 보았고, 발로 뛰는 세이구찌와 자기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이가와 등 여러 인간 군상을  보았다. 뒤로 갈수록 한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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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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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에 복무하는 자는 바다에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볼리바르-

한 사람의 이야기.
1989년 2월 초, 카를로스 안데레스 페레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IMF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물가의 급상승, 서민의 파산으로 이어지는 경제가 이어지자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1992년 MBR-200(볼리바르 혁명운동 200)을 이끄는 차베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지금 수도에서 우리의 계획은 실패하고 우리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동지들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으나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다.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깊이 생각하라. 나는 동지들의 충성과 용기와 헌신에 감사한다.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나 홀로 지겠다. "(56쪽)

짧은 인사로 그는 감옥으로 수감된다. 글을 읽는 순간, 문득 눈가에 뜨거운 무엇이 맺히는 것을 느낀다. 처음 읽을 때에도 그랬고, 지금 읽는 순간에도 그렇다. 계획은 실패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없는 '완전실패'인데, 난 왜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가에 뜨거운 무엇을 토해해는가. 그의 진정성이 무엇이길래, 나는 왜 이렇게......

수 없이 가슴에 되풀이하며 새긴다. 계획은 실패하고 권력은 장악할 수 없다. 하지만 기회는 기필코 다시 온다.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내 동지들의 충성과 용기에 고개 숙이며,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진다. '나는 동지들의 충성과 용기와 헌신에 감사한다.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나 홀로 진다'

그리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볼리바리안 위원회', '능동적 기권-보이콧', '민중을 위한 제헌의회에 찬성하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기 위해서 선거가 있기 전부터 MBR-200은 '볼리바리안 서클'이라는 기초 조직을 두어, 아래로부터의 이야기에 귀 담아 듣는다.
'볼리바리안 서클'은 하부 토대로서, 위로는 볼리바리안 조정자, 광역볼리바리안 조정자를 걷쳐 전국 지도부를 둔다.

볼리바리안 서클과 우리나라의 지역자치제.
"볼리바리안 서클은 종종 정치적인 사안을 토론하기 위해 지역회의를 조직한다. 이 회의는 볼리바리안 서클 맴버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중요한 자리이다."(101쪽)

우리 나라에 풀뿌리 민주주의라 불리는 지역자치가 시작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과연 소기의 목적, 혹은 그 뜻을 이어가고 있는가 잠시 생각을 가져보면 깊은 회의에 빠진다. 지역자치의 대표격인 시장, 군수는 중앙정부의 어느 당에 소속되어, 당을 등지고 나온가가 선거에서 무엇보다 우세하다. 지방자치와 중앙 정부의 당과는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들이 당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아울러 '당'은 지역자체에 자기 '당원'이 당선되도록 선거전까지 물밑 힘을 보태주면, 그는 '당'에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종속적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자칫 세세하게 지역자치를 자기들의 이권으로 규율하는 전도된 일상으로 바꿀 우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다른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바다 건너에 있고, 미국이라는 커다란 나라에 비해 아주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그 가치와 실험, 혁명은 미국보다 작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볼리바리안 위원회'와 '지역자치'는 크게 다른 뜻이 아니다. 그 쓰임에 따라 180도 달라질 뿐. 볼리바리안 서클은 최소 위원회의 조직을 통해 서로 토의하고 의견을 내어놓으면, 다시 광역조정자를 거쳐 전국지도부에 상정되는 이른바 아래로써의 혁명이라면, 우리나라의 오늘은 위에서 아래로의 강압적 요구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이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보여짐을 아주 낯선 나라를 통해 얻고 배운다.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49개의 주요 개혁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권법'( -의회의 승인 아래 1년 간 대통령에게 법안을 승인하는 권한을 주는 법, 참고로 [로마인 이야기] 3권에서 한니발과 전쟁을 치르는 로마와 비교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듯, 그리고 우리나라의 발목잡기, 말싸움, 파행의 국회를 보며 더 낳은 대안을 찾는 것도 좋을 듯 하다)을 발동시킨다.(129쪽)

나는 차베스의 개혁의지를 읽으며, 그의 강력한 민중에 선, 추진력을 읽는다. 장하준 교수는 나라의 일관된 추진력, 그리고 민중에 의한 개혁발전을 강조하곤 했다. (-그의 입을 빌린, 내 관전임) 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어떻게 빈민층에 다가가는지, 정부의 복지정책(182쪽 ~200쪽)을 읽어내며,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또한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통해 '신좌파의 국제적 연대'를 생각한다.

T.V 동물왕국을 지나가다 보면, 똑같은 장면이 스쳐 온다. 초식동물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으면, 육식동물이 어슬렁 거리며 다가와 그들을 집어 삼킬 듯 바라본다. 초식동물은 언제나 경계의 눈으로 육식동물을 바라보며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 늘 같은 식이다. 초식동물이 머리를 모아, 한 마리 육식동물과 맞서 싸운다면 기필코 이길 수 있을 터인데...... 그들은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따로따로 다닌다. 난 동물왕국이 저 밀림에 사는 게 아니라 우리 곁에 있음을 자각한다. 미국이라는 육식왕국은 무엇이든 집어 삼키려 하고, 그 근원은 '힘'이다. 그러면 가난한 나라들은 미국에 대항하기보다 빌 붙거나 도망칠 궁리를 한다. 미국이라는 힘 밖에 모르고, 자국민이 세상 그 무엇보다 우선시(솔직히 여기까지도 의문이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하늘 땅 만큼이니, 아마도 미국 내 소수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된다는 깡패국가에 우리는 대항하지 못하는 동물왕국에 사는 초식국가이다. 난 이를 벗어나기 위해 조지 카피아피카스 교수의 말을 빌려, '신좌파'와의 연대를 꿈꾼다. 이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각 나라의 자주권을 인정하는 대안적인 국가 공동체인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과 뜻을 같이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아쉬움은 그의 정치적 조직력이 결속되지 않은 상태-이는 그의 권력구조에 기생하는 '꾼'이 아닌 시골에 사는 농부에서 학교 선생님, 직장인, 근로자, 학생 등에 이르는 광범이한 연계구조-에서 갑작스레 당선이 이루어졌으며, 그는 '참여'라는 허울좋은 구호를 내세웠지만...... 뒤늦은 전략이며, 이미지 정치 구호일 뿐이다. 참여는 대선전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그의 정책 노선은 그를 탄생시킨 토대들의 논의에서 벗어날 때 뜨끔하게 나를 채찍질 해 달라고 권고 했어야 한다. 참여는 토대이며, 그 위에 서민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가장 겸허히 받아들이며, 강력한 개혁을 주지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고 차베스는 매우 전략적이다. 볼리바리안 위원회를 거쳐 문제점과 대안을 찾는 참여의 토대(시민들은 더욱 깊이 정치에 참여하고 따끔하게 비판하며 그를 위해 비판적 지지로 남아있을 것이다.)위에 싸움의 전략-기존 정치 세력을 벗겨내기 위해 제헌의회 소집을 추진한다. 하지만 그는 독단을 경계하기 위해 시민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기 위해 다른 손에는 대통령 탄액소추를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또한 '각 나라의 자주권을 인정하는 대안적인 국가 공동체인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을 내세우는 점과 다르게 우리나라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며 미국과는 형제애를 과시하려고 한다. 한 없이 기회주의자적이고 나약한 모습의 표본으로 남을 듯 하다. 미국과의 무역이나 방어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구 상에 과연 미국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묻고, 언제까지 종속적인 관계로 남아있을 것이며, 가난한 이웃 나라의 고통을 외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항상 옳은가?
민족이기에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은 베네수엘라 보건부가 그네들의 의사에게 '월급 600달러를 지급할 테니 빈민 거주 지역에서 무료 의료 혜택을 줄 것을 호소'했을 때, '극소수'의 의사만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 자원 봉사를 경험한 쿠바 의사들은 2003년 부터, 한 달 생활비로 250달러를 받고 빈민가에 살면서 병원비나 그 밖의 의료 시설을 운영'(197쪽)한다고 했다. 신좌파는 세계의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친구로 생각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부정부패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든 이들-민족도 포함-을 경계해야 한다. 민족이기에, 넓은 아량으로 돌아서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을 넓게 보며 지구를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물건을 하나 더 팔아 먹으려는 장사꾼의 속셈이 아닌 '내 이웃이자 친구'라는 개념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항상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개혁의 날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무엇보다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난 아주 작지만 큰 힘을 가지고 희망을 설계하는 나라를 보며, 내 나라를 꿈꾼다.

덧붙임:

책이 아주 읽기 쉽게 평이하고, 그의 단순명료하여 한 사람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는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나는 그의 정책과 노선을 존중하기에 기꺼이 수용한다. 다만 앞으로 더 베네수엘라의 오늘을 연구해야 함이 옳다고 본다.

책이 너무 평이해, 반나절만에 읽고 무엇인가 부족하여 다시 펼쳐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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