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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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의 행사, 지식

 

소유는 고정된 체 어떠한 외부적, 내적 충돌을 회피, 억압하며 물리적 암기를 강요한다.

존재는 유연체, 외부와 자아의 부딪힘이 자연스럽고, 힘으로 억누르지 않는다.

 

지은이는 소유로 나아가는 사회 현실에 대해 크게 걱정과 비판적 견해를 읊는다.

 

1.

소유는 어떻게 우리 생활에 스며들었나. 12년의 교육은 암기 위주이며 어떤 사고를 비판적으로 하는 것을 경계한다. 몇 해 전에 이명원이 김윤식의 논문을 비판했을 때 '아들이 아버지를 찔렀다'는 시적 언어가 비수가 되어 나돌았다. 지식은 권위와 결부되었고, 권위는 소유와 뭉쳐져 있다. 즉 내 지식은 절대적 소유의 진리가 된다. 12년간의 암기 위주ㅡ지식 습득은 비판적 사고라는 혁명을 죽임고 동시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물질의 소유가 행복인냥 무의식 중에 가둔다. 즉 공부를 하는 것은 대학을 나와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여기에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삶의 근원적인 목표나 행복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지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더 허기진 아귀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힘차게 달린다는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여, 너는 나를 소유하고 있는 괴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괴물에 구속되어 있는가?

 

소유가 존재를 억압한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행복지수가 크게 높지 않더라도 당연하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지식의 꾸러미'(71쪽)를 행복의 척도인냥 내세우지 않고 지식을 인식하여, 우상을 만들지 않고, 스스로 사념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킬 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로서 갖도록 훈련하는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의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71쪽)

 

어느 고등학교에서 서울대를 더 많이 갖느냐가 명문으로 둔갑하는 현실은 학생과 우리에게 존재를 인식케 하지 않고, 무엇을 소유케 세뇌하고 있다. 감옥으로의 사색에서 지은이는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겨울밤, 단 한명의 거지가 떨고 있어도 우리에게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 고등학생이 시험을 비관하여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하며 울때, 스승이 울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죽었다.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는 한 세대 전의 역사는 굿굿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2.

모든 새로운 발걸음은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이토록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두려움을 안고 태어나는가? 환경에 의해 길러지는가? 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은이는 그의 입을 통해 [자유에로의 도피]의 주제라고 했다. 나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화두로 읽는다.

 

'발걸음이 실패의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안위이며, 가진 것 즉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어디인지 모르나 내가 가진 것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다. 즉 바람이 자유로운 것은 형체가 없고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 앞에 발걸음이 주춤한다는 것은 나는 '소유적 자아'를 지니고 있으며 '존재적 자아'를 멀리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지은이가 소유를 수동과 집착, 존재를 능동과 자유로 말한것과 같다.

 

약관의 나이가 지나고, 입지가 지난 다음에는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 절대적, 불가항력적 울타리라는 환경이 존재했더라도 지금 내 의지가 환경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내가 두려움 앞에 멈춰설 때 소유냐 존재냐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소유와 존재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어디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음이 존재한다. 위의 글은 학습과 기억, 대학이 만들어내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물음을 정리하였다.

 

책의 아쉬운 점은 지은이가 너무 같은 말의 반복과 사유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소유냐 존재냐』의 물음, 즉 존재로서의 자아를 가지고 사는 곳이 라다크가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다람살라의 선물』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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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석의 사진이야기
박주석 / 눈빛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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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태어나서 무엇을 담아왔는가에 대한 물음.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빛과 내 인지 과정에 다른 왜곡 현상 때문, 즉 착각을 진실로 믿는 보여지는 것으로 존재하기에 예술성이 획들할 수 잇다.
이는 지은이가 집착하는 '환영' 즉 인간의 놀이를 통한 재창조라고 말하고 있다. 아쉽게도 여기에는 총체성의 구현이라기보다 단순한 '왜곡'과 '변형'(22쪽)의 정의만 존재한다. 이는 지은이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써, 그가 사진을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보여주는 책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평생 사진을 찍어온 이가 있다. 그는 사진의 구도, 조작의 미학을 보는게 아니라 인간, 가장 인간적의 순간을 담아 삶의 고귀함을 이야기 하려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을 넘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책 제목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우연찮게도 지은이의 최민식이라는 사진작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시대의 강물 위에, 사진이라는 배를 띄운다. 배는 수 많은 풍경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어딘가에 닿아 발을 내리지 못함은 나를 끌지 못하는 풍경 때문이라라.

사진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 우리는 사진을 이렇게 본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문에 머물러 있다. 애초에 담은 사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좌우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깊이 빠져 들지 못하고 풍경을 주마간산격으로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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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상 겨레고전문학선집 1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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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열하를 무더운 여름밤에 걷넌다. 여행은 짐짓 큰 물을 만나기도 하고, 이색적인 것에 눈이 멀고, 낯선 일들과 밤에 술을 마시며 글을 나누고,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한다. 그리고 자랑을 하다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황제를 만나지 못할까 초초해지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왜 이리 느긋한지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열하를 따라간다. 

연암은 열하를 건너며, 과장이나 왜곡을 통한 형상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그가 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다. 때론 낯선 풍경에 낯선 이름으로 답답하게 읽히는 부분이 있지만, 이는 그의 시절로 돌아가 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길 위에서 글을 적고, 그가 걸은 만큼 본 것을 적기에 사념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낯선 풍경을 접하고, 혹시라도 뛰어넘을까 이렇게 하인에게 타이런다.

"다음부터는 무엇이든지 처음 보는 것이거든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 가릴 것 없이 지체말고 고해 바치렷다!(187쪽)

이렇게 호기심 많은 불혹의 어른이 쓴 일기는, 충실하다.

연암은 여행 중에 사효수라는 아홉살짜리 어린아이를 만난다. 그는 "더위도 곤하고 또 졸리기에 말에서 내려 좀 걷어서" 가다가 먼발치에서 오는 아이를 길을 막고 선다. 그러자 아이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니 이름을 묻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묻는다. 그는 갈길이 바빠 아이랑 많은 이야기를 건내지 못했지만, "길을 가면서도 사 소년의 얌전하게 생긴 모습과 동작이 생각에 떠오르면서 눈에 늘 삼삼했다"(262쪽)고 말한다. 이런 순수한 마음은, 어린이 같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순수하면서도 때론 엉뚱하기도 하다. 7월 13일, 신민둔에 들러 글 자랑을 하려다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흔히 길가 점방 문 위에 써 붙여 놓은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고 쓴 넉 자 간판을 보고 내 속짐작으로 장사치들이 응당 지킬 본분을 자랑 삼아,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는 서릿발이나 다름없고 눈보다도 더 희다는 뜻으로 저런 간판을 걸었나 보다 생각했고,"(196쪽)

이리하여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는데, 전당포 주인이 고개를 쩔쩔 흔들면서 "당토 않은데!"라고 하자, 괘씸해하여 분을 삭히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 소흑산에 들러 글을 쓰는데, "조선의 명필이다"(208쪽)라는 소리에 표정이 바뀌어 허뭇해 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점방에 걸어 둘 네 글자를 써 보겠다며 자청하여 예의 그 [기상새설]을 쓴다. 그러자 주인이 가만히 보고서는,

"우리 점방들은 단벌로 부인네들 머리꽂이만 사고 팔고 할 뿐이지. 가루 점방은 아닙니다."(212쪽)

'기상새설'은은 밀가루처럼 하얀 것을 판다는 의미인데, 그가 너무 앞서서 해석을 하고 쓴 것이다. 또한 옹졸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오늘 여바란 듯이 써 내려갔지만 집을 잘못 찾아 들어온 것이다. 어찌 불혹(不惑)을 넘긴 이가 글에 미혹됨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런 그의 글을 통해 솔직함과 한 사람의 인품을 본다. 그는 스스로 잘났다고 내세우지 않고, 그가 본 모습을 차분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열하일기(上)는 중국에 대한 예찬으로 장돌을 깔았다. 그는 수레며, 벽돌 등에 대한 쓰임새를 유심히 보고 우리나라에 가져와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비가 와서 떠내려가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풍경에 대한 묘사도 이어간다. 고단한 일상 속에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을 소탈하게 적어내려가는 짐짓 그 무게를 지루할 수 있지만...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있어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연암의 글솜씨는 더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으니, 과장하고 숨김 또한 없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그의 글솜씨는 과히 '따라가면 좋겠네, 따라가면 좋겠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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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 정끝별 여행 산문집
정끝별 지음 / 화니북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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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글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유에 의한 창작이지만, 발품을 팔지 않고 가벼운 머리로 쓰면 진실되지 못하다. 머리로 쓰는 언어는 사념이며, 거짓이 농후하다. 하지만 몸으로, 발로 꾹 꾹 눌러쓴 언어는 실천이며 선(禪)이 된다.

지은이의 글은 사념에 의한 긴 여운을 안겨준다. 그는 감수성 여린 사춘기 소녀처럼 글을 써 내려가지만, 삶에 대한 통찰은 머리에서 나온 거짓에 불과하다.

시를 잉태한 그곳에 찾아가, 과연 무엇이 이토록 언어를 다듬는가 눈여겨 보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없이 가볍다.  꾹 꾹 눌러 쓴 글이 아닌 사념과 사념을 넘드는 글은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돈다.

긴글은 생략한다. 다만 아래에 너무나 아쉬운 글을 그의 입을 빌려서 붙여둔다.

"백담 계곡을 왼쪽으로 끼고 매표소에서 부터 백담사 한 마당까지 오르는 길은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교교하기만 했습니다. 뒤늦은 공양인지라 보살님의 퉁박을 반찬 삼아 먹은 시래깃국은 한없이 맑고 구수했습니다."(172쪽)

"등명과 남쪽으로 이웃해 있는,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정동진 역에 먼저 들렀습니다. 역 앞 진입로는 포장마차와 선물가게와,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모래시계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던가요. 인간의 손이 타면 이렇게 쉽게 망가지나 싶습니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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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눈물 땅의 희망 - 물과 바람과 길을 찾아서
최창조 글, 홍성담 그림 / 궁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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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은이를 알게 된 것은 조금 오래 되었다. 그는 서울대라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풍수에 미쳤다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들었다. 그가 말하는 풍수는 '기복(기복)'과는 다르고 "치유의 지리학(18쪽)"이라는 자생풍수라 했다. 즉 절터는 가장 아름다운 장송에 터를 잡고 '세상 사람들아 나 보러 온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을 때 약한 부분을 치유하여 제 자리를 찾게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그의 눈높이였다.

여행을 하면, 비움에 대한 집착을 가지면서 또다른 한편 욕심이 생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혹은 거대 도시의 아파트가 아닌 우리나라의 땅을 보고 싶다는.  이는 기복 신앙이 아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함이며, 전체를 토막내어 부분으로 보는게 아니라 전체를 보려는 총체적 실험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부분이 많이 서툴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 총체적 눈높이를 가지려고 하는데... 딱딱하지 않은 글은 너무 쉽게 씌인 느낌이다.

"생명력의 원천인 땅의 영기를 무시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파괴하는 오늘의 상황은 원칙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시대에 해당한다."(35쪽)

이런 논의는 충분히 받아들이지만 청와대의 자리(68쪽)를 놓고 대통령의 자리에 대한 글쓰기는 결과론적으로 다가온다. 대통령으로 행한 정책을 시시비비 가리지 않고, 그의 치세에 가장 안좋은 것을드러내 '내 말이 옳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ㅎ다. 그의 말이 옳다면, 청와대를 걷친 모든 이들, 그리고 거칠 이들은 힘겨움의 연속이 된다. 풍수가 갖는 실체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 사이에 대한 논의도 빠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그는 무분별하게 키재리를 하는 시멘트 벽이 바람을 막고, 공기를 막아 세운다고 했다. 즉 이렇게 쉬운 혹은 일상과 가까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인다. 계속 읽어가면서 부딪히는 부분이, '잡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생각은 가다듬지 않았고 글은 다독거림이 없으니,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걷는 기분이다. 아울러 그림 또한 부담스럽다. 어떠한 예술적 가치나 심미적 위안, 상징성을 띄고 있다하러다도, 나는 지은이가 설명하는 동네에 대한 알림표시로써-사진 혹은 지도-의 그림이 더 와 닿겠다. 지은이는 손바닥 보듯이 땅을 ?어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나에게 모두 낯설다. 그리고 그림도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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