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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 - 완결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자연과 사람은 다르지가 않다!!"]

문명과 자연,
내 사춘기 시절에 한동안 아니 아직 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문명이 우위에 설까 아니면 자연이 우위에 설까? 우리는 산에 오르는 것을 정복이라는 말로 간혹 한다.(등정) 과연 그럴까 산은 거기에 말 없이 있었을 뿐이고, 다만 내 발로 올라간 것인데 정복인가? 누구와 싸워서 이겼단 말인가? 분명 싸웠다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산과의 싸움이 아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들은 산과의 싸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차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게 되며, "오직 인간만이 유일 혹은 사랑하사" 자연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는 듯 행동을 한다.

춘천 청계사에는 영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은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자연에 대해 최소한의 인공적인 기형을 가하고, 자연과의 중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게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더 공고히 하는가라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 된 듯 하다. 이제 신발에 밟혀 오는 진흙의 무게는 더 이상을 무거울 수가 없다. 땀을 흘리기 위해서 땡볕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아스팔트로 포장된 사각 안에서 땀을 흘린다. 단순히 땀을 흘리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데스몬드 모리스가 엄마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이 자기 젖을 먹이는 행위 그 밖에 심정적 안정감과 평온함, 심장의 박동 소리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울림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했 듯이, 산을 오르면서 숨 쉬고 땀을 흘리는 것은 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시멘트며 아스팔트를 모조리 벗겨내고 다시 떼를 입히거나 흙을 덮어야 하는가?

내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은이는 나우시카의 눈을 통해, 인간이 오염에 적응하여 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의 모습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은이의 자연에 대한 동경은 그 뒤의 작품이나 앞서서에 잘 나왔기에 더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공산주의의 결정론을 빌려온다면, 기계문명 다음에는 오직 기계에 대한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데, 문명과 자연은 공존을 할 수가 없는가? 자연의 품은 넓으면서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갈 때도 있지만....

살짝 훔쳐보기

나는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씩 엿보기를 한다.

[불의 7일]간이 끝나고-고도의 기계문명은 스스로의 화약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화약은 권력욕에 눈먼 몇 몇 사람들에 의해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고 기계문명은 수천년 뒤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쓰레기는 가져가지 못하여 자연은 정화되지 못한체, 독기를 내 뿜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가? 그네들은 스스로의 적응 능력을 길러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해에 사는 오무는 천천히 자연을 정화해간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더디기 때문에 간혹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라며 외면을 하고, 오무는 공존의 생물에서 금(線) 밖에 서 있다. 이 옆에 바람계곡, 그곳에는 지르의 딸 나우시카가 살고 있다. 오직 이 소녀만이 오무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자연에 대해 차츰 귀를 기우려 간다.

바람계곡은 트로메키아라는 대국에 소후국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네들은 트로메키아가 전쟁을 일으켜 동원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하게 된다. 트로메이카아의 황녀 크샤나는 페지테라는 소후국을 침략하고 왕녀가 가지고 있던 비밀물건을 찾아 나선다. 크샤나는 오빠들의 꾀임에 속아 남하하여 수많은 병사들을 잃게 되고 나우시카를 만나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도 차츰씩 키워간다. 그와 동시에 나우시카에 대한 동화도 이루어진다. 트로메키아의 3왕자들은 토르크라는 남쪽의 대국을 침략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또한 오무는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며 수많은 벌레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르크에 있는 소후국 가운데, 승려들은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네들은 파란 옷을 입은 날개달린 무엇이 와서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 한다. 파란 옷을 입은...

나우시카는 오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나우시카 앞에서는 전쟁의 참상과 현실에 대한 허상 등이 무수히 나타나, 또 다른 [불의 7일간]을 예언한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나우시카

이 작품에서, 큰 주제를 이끌고 가고 있는 사람은 제목에서 나타났듯이 나우시카이다. 그는 트르메키아의 소후국 바람계곡의 딸이지만 자연의 딸이기도 하다. 그에게 적은 없으며 모두가 친구이자 아픔이다. 그는 외모나 냄새 등으로 친구를 나누지는 않는다. 이런 포용력은 부해에 살고 있는 오무와도 닮은 것이 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부해에서 스스로 숨을 쉬며 정화를 해 가는 것이다. 나우시카 역시 싸움 속에 스스로를 던져서 평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무가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떠남은, 오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우시카는 흙이며 나무이고, 물이며 불이고, 해이며 별이다. 나를 가두려 하지마라. 나는 자유롭고 자유로이니(自然) 어디 한 곳에 내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어느 한 부분 내가 아닌 것이 없다. 그는 메시아이다. 그가 가는 곳에는 오직 선(善)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 한다.

크샤나는 나우시카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트르메키아의 왕녀이다. 그는 오직 전쟁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를 만나게 됨으로서 차츰 전쟁이 아닌 공존과 자연으로 동화되어 간다. 적개심이 가득 찬 곳에서 살아온 크샤나가 나우시카를 만남으로 인해 바뀌어간다는 건 나우시카가 구원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샤나에 의해 동생과 자기 나라를 잃은 아스벨에 대한 초첨이 너무 희미하게 비추어진다. 유파와 승정은 삶에 대한 지혜자로서 나우시카에게 수호자가 되어준다. 그네들은 나우시카 곁에서 보필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조금은 아쉬운 점
[불의 7일]간 뒤, 세계에 퍼진 환경에 대한 아무런 의문점 내지 치유가 없이 스스를 가두고 사람들은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등장으로 세계(自然)의 틀이 부셔지고 만다. 즉 나우시카는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태어남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며, 전쟁을 통해 전쟁이 안좋은 것인데 왜 하는걸까라는 유아적인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평화, 평화를 간절히 구한다. 이는 나우시카에 대한 메시아적 입장을 너무 강조함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우시카가 없다면...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이의 중재자가 나우시가라면... 그는 분명,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만 메시아로서 예언적 존재로 비추어진다. 이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과 무계급적인 평등이 사라지고 나우시카 그리고 사람으로 나뉘어지는 계급을 만들어 낸다. 지은이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더 부해속으로 던져 버리고,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려라 한다.(혹시 지은이 스스로 '큰바위 얼굴'이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메시아적 입장에 비중을 두게 됨으로서, 권력욕에 물든 인간이 어떻게 침잠되어가는 가에 대한 접근은 없으며,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 논리만이 버티고 서 있다. 크샤나의 비극은 권력의 무대에서 자란 한 인간의 비극인데 인간에 대한 연민보다 나우시카에 대한 동저이 더 강한 것은 위의 논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메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트로메키아의 군대 동원령은, 명분이 필요없다. 또한 이분법적 논의로 보면 '모두가 원래 악당'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 악당은 원래 그런 것이니, '미랄라'의 집권욕 또한 이와 같다. 황제이기에 나쁜 놈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족장 딸이며 , 어린 여성이지만 메시아기에 예외이다. 그리고 그의 차지(소)족 장의 딸은 신비함을 더 하고 권위에 둘러 쌓인 인간이 아닌 눈높이를 맞춘 인간으로 들어낸다.

지은이의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대후국의 권력과 자치(소)국의 권력에 오른자가 틀리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치국의 여성에 대한 동경 내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이 부분이 이 책이 지니는 한계이며, 여기에서 출발하게 되면 지은이의 주제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은이의 환경 아닌 사람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크샤나의 자리가 너무 흐지부지한 것이 조금 아쉽다.

인간의 한계, 즉 그는 권력욕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덧에 걸려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메시아이며,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은 여린 순수 소녀이다. 질적으로 다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나오는 여성으로서의 구원자에 대한 모티브가 여기에서 들어나며, 남성은 폭력, 권력이라는 이분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여성을 예언자 혹은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사람에 의한 꿈의 건설이 아닌 신에 의한 구원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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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1 - 스완네집 쪽으로 - 콩브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1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각색 및 그림, 정재곤 옮김 / 열화당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지난 시절의 풍분한 감성이여, 나를 바람이 부는 곳으로 데려다 주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샀다!
어제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티비에서 보여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네들에게 명품을 왜 좋아하냐고 물으니, 명품을 통해 자기를 들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를 안정화-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그들은 스스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위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오후 늦게 도서관을 향하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 이 만화책 15000원인데……. 정말 비싸다"
" 비싸면 싸지 말지."
이 책이 초판이 찍혀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 초판이 한 3000부이니, 즉 우리나라에 이 책을 가진 사람은 3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 그 중에 내가 하나라는 거야. 그리고 출판사의 이미지는 아무리 어렵거나 얇아서 비싼 책이라도 가치를 보장하거든"

티비를 보면서 난 명품을 사는 사람들을 머리가 비었거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알게 모르게 금(線)을 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남들이 그어 놓은 금을 넘지 않는 곳에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보기에는 이런 내 행동이, 내가 본 티비 속의 인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미 익숙한 제목만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내용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형성된 이미지의 조합은 책을 잡는 순간부터 그 가치가 높다고 선입관을 한층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높아서일까요? 책을 잡고 나서 덮은 다음의 마음이, 어디 들어갔다 나온 뒤의 느낌이라고 할까나……. 물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을 읽었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잠에서 깨면,
나는 잠을 충분히 잘 수가 없고, 깊은 밤중에 홀로 깨는 습관이 있습니다. 밤에 일어나면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수많은 별들만큼의 지난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 그리고 알 수 없이 흩어진 별 무리처럼 내 기억들의 단상도 흩어져 있습니다.

나는 어린 소년이며, 우리 가족들은 저녁 만찬을 즐기고 나서는 이야기 만찬을 다시 피웁니다. 내 그리움의 어머니는 단꿈을 꾸기 위한 키스를 어른들과의 만찬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키스를 기다리는지 알지 못합니다.(-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정신적 그리움이 다른 무엇인가로 표현되지 않을까?) 할머니는 만찬이 끝나면 정원을 돌면서 내 앞날에 대한 일들과 건강을 비손합니다. 어떤 날은 스완씨가 만찬에 오곤합니다. 이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저녁 7시의 소년이 되며, 어머니의 키스를 그리워하며, 어른들의 풍요로운 만찬의 밤에 있습니다.

꽁브레의 시절, 그의 곁에 머무르는 세계는 불순성. 세상에 순수함은 없으며 오직 드러냄과 숨김이라는 커튼을 통해 스스로를 가두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스완씨에 대해서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하지만 스완씨에 딸에는, 봄날에 고개를 내민 새순처럼 사랑이 싹틉니다.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지내며, 어른들의 드러냄과 숨김을 가만히 엿보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환상을 가졌을 때 얼마나 허망한가를 게르망트 쪽을 산책하면서, 게르망트 저택의 공작 부인에 대한 환상에서 잘 보여집니다.

지은이의 자서전이 아닌, 소설적 플롯으로 접근할 경우 몇 몇의 복선이 깔려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옮긴이가 잠시 언급을 하였듯이 두 산책길-스완씨네 집과 게르망트 쪽이 지니는 의미, 스완씨와의 알게 모르게 부딪히는 점, 벵테이유 씨가 죽고 나서 자기 딸이 보여준 행동, 분홍색 주근깨를 한 여자아이와 만남, 게르망트 저택 공작 부인에 대한 환상 등등……. 무수한 복선을 안고 가는 작품.

소설적 플롯, 혹은 운명의 곡예
나는 우리가 운명의 실이라는 길 위에서 곡예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 의지로서 앞길을 나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실에서 한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운명을 거부하기 위한 몸부림마저 곡예일 뿐이며,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를 믿든 안 믿든 모든 것은 운명이며, 이를 개척하든 안하든 자기만의 곡예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삶 역시 이러한 운명의 금(線)위에 놓여져 있고, 줄타기를 한다면 단순한 플롯이 아닌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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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 기소가와 5 - 완결
스즈키 아츠무 지음 / 세주문화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기소가와는 부인의 의지를 이어받아, 성선설 성악설은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으로서 존재를 믿을 뿐이다. 이들은 사회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서 같이 공존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 들지 못하거나 자칫 외도를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우리가 말하는 나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동네에 지장보살이라고 불릴 정도로 마음씩 고운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한날, 지나가던 청년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보고는 울컥 하는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경찰에 잡힌다. 기소가와는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근본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실마리는 풀리지 않는데, 동네 주민들의 탄원서가 들어오고, 더욱이 상처를 입은 피해자 마저 탄원서를 쓴다.

  기소가와는 지장보살이 불리는 다나카라는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몇 번의 사건이 사건이 더 일어났을것이라고 단정하고 조사를 하여, 해 마다 한 건 정도의 사건이 있음을 밝힌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이 다나카와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며 가정하고, 심리학자에 자문을 구하자, 라틴어의 「가면」「사람」이라는 어원을 가진 "페르소나"가 특이하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는 과거를 잘 조사해보라 하며, 페르소나는 성장과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건내준다.

 

 

 

 

 

 

 

 

 

 

 

 

 

 

 

 

 

 

 

 

 

 

 

 

 

 

 
  지장보살이라 불리는 피고인은 외아들로서, 이혼한 재판장의 아버지 밑에서 홀로 키워진다. 그리고 덩치가 큰 편도 아니다. 재판관인 아버지는 한 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일은 바쁘고, 어머니의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또래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무엇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재판관인 아버지는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한다-물론 재판관이기에 어느 정도의 보상심리가 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집단에 대한 동경과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이성적 판단. 한 평생 그를 괴롭히는 거리감이 된다.(3권)

  검찰관 기소가와는 읽어가다 보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곳이 죄의 댓가이기도 하지만 더 낳은 모습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임에도 틀림이 없다. 하지만 유유상종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연대성을 가져,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걷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기소가와는 감옥이라는 특정구역만이 죄의 댓가와 그 사람을 우리 속에 공종하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결과론적으로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동기론적으로 찾아가기에 어쩌면 검찰관이라기보다 심리관으로 보는 것이 일면 타당할 것이다. 심리검찰관(?)..^^

  그리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심리에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중용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 같이 어울려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한 쪽으로 잘못 들어서거나 기울지게 되면 범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범죄의 동기 가능성은 주변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심리학자가 말하는- 어린아이가 t.v에 나와 영재라는 격려와 칭찬을 듣다가 성인이 된 뒤에 자기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갖 태어난 어린아이는 생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습득(자기화)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에게 한 쪽 눈을 가리고 지식이나 부모가 원하는 것만 보여줄 경우 그 아이는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성년이 된 다음에는 부적응자로 남을 수가 있다고..



 

 

 

 


  우리 사회가 위와 같은 부모의 모습인지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틀을 맞추어 두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낙오자가 되거나 범죄자일 뿐이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누구나 한 번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혹은 우리사회는 얼마만큼의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가는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어떠한 행위에 대해 결과만을 검증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가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행동에 집착하는 결과만을 안게 될 것이며, 서로를 멀리하게 될 뿐이다.

  검찰관 기소가와는 단편적인 사건을 풀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이지만 그 곳에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법정에서 벌어지는 결과론적 행위보다 조금더 인간적인 면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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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숲 -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시리즈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이 며 칠인가? 설마 보름달이 뜨는 달은 아니겠지...


 


그네들은 보름달이 뜨면 울부짖는다. 불로장생을 얻지 못해서,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서, 물길이 차서 자기네 집을 뺏겨서, 신과 사람의 경계에서 지내야 하는...


 


영원을 얻는다는 어떤 것일까?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거... 전생을 믿거나 후생을 믿는 사람,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전생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의 자기 모습을 전생에 의한 인과(因果)로 보고, 내세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기만 합니다. 후생을 믿는 사람 역시 내세를 위해 정진하지만 오늘의 모습이 어제의 모습으로 인한 모습이라는 전(全)인과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다름이 하나 존재합니다. 전생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윤회(輪廻)라는 것을 믿습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지만 영원한 끊임이 없이 돌고 도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에 자기가 죄를 짓거나 남(自然)을 헤하게 되면 다시 후세에서 오늘의 모습보다는 나쁨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후생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에만 정진하면 됩니다. 즉 오늘과 내일 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잠시 뿐이 오늘이 스쳐 지나가면 우리는 영원한 내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영원불사가 후생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분명(必)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후생의 일을 현생에 끌어내린 이야기. 즉 현생에서 도를 닦고 후생에서 오늘 보다 낳은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닌, 맹목적으로 현생에서 불로자생을 원하는 것입니다. 왜 불로장생을 원하는가?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의 숲』이나 『인어의 상처』는 둘 다 불로장생을 꿈꾸는 사람들과 인어고기를 먹고 오백년을 넘게 살아온 주인공과의 이야기가 큰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어고기를 얻은 처녀를 키워 인어들이 사람고기를 먹어서 젊어지려는 이야기, 힘으로 인어고기를 구하고자 하는 해적, 쌍둥이 동생의 야욕, 어릴 때에 인어고기를 먹고서는 영원히 어린이가 되어버려 외로움을 안고 사는 아이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이 인어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不老長生


(현재 나이에서 멈추어버림. 하지만 독성이 강하기에 부작용도 심각함)


인어가 인간고기를 먹으면, 다시 젊어짐回春


(늙은 외모를 한 인어들이 처녀를 키워서 잡아 먹을려고 함)


 


인어를 찾기 위해 인어의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할머니들을 맞닥드립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묻는다, 같이 온 사람이 있냐고? 주인공이 없다고 하자, 신속하게 벌어지는 할머니들의 행동은 섬뜩한 연출로 표현됩니다. 이런 긴박감은 책을 읽는 내내 내 곁에서 누군가가


'넌 숨을 쉬지는 마, 소리내면 우리도 들킬지 몰라'라고 속삭입니다.


 


책은 읽는 내내 긴박감과 반전, 섬뜩함을 그려내면서 재미나게 읽혀져 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던 동화같은 환상의 인어를 찾으면 큰 불협화음만 얻게 될 것입니다. 지은이가 그리는 인어는 사람처럼 늙어가며, 젊음을 찾기 위해 살인도 멈추지 않습니다. 또한 이야기가 끝날 때에 벌어지는 반전은 허를 찌르는 듯 한, 재미!!!


 


하지만 기교나 연출 등은 분명 훌륭하지만 삶에 대한 성찰은 조금 못합니다. 뭐 만화책이 재미 있으면 그만이지라면... 하지만 나는 만화책도 하나의 책이기에 삶의 풍경을 담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러한 체취를 많이 느끼거나 느끼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조금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인공이나 사람들이 불로장생을 원하는데, 불로장생에 대한 고뇌가 없습니다. 주인공은 오백 여 년을 넘게 살아오고, 인어를 찾아 무슨 해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해답이란... 죽음입니다. 즉 언어의 독으로 죽을 수가 있는데, 누군가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순순히 목을 내어 주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오백 년을 넘게 살아왔으면서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리고 자기가 찾는 답이 죽음-여기서 꼭 죽음으로 한정 짓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평사람들처럼 늙고 병들고 죽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이라면 순순히 걷는 것도 옳을 터인데... 그리고 필사적으로 살아났다면 왜 사는가에 대한 회의는...


 


어쩌면 지은이는 영원을 살면서 인어고기에 얽힌 사람들의 기이한 사연을 들려주려나 봅니다. 그리고 영원불면은 무해하거나 일반 너희들이 먹으면 죽거나 야수가 될 수 있으니 먹지마라고 반복적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단편이라는 태생과 이야기의 단락이 끝어지는 일회성 이야기, 앞 내용과는 단절되는 이야기 등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불로장생에 대한 이야기를 얽힌 실타래처럼 풀어 갈 수가 있지만 지은이가 어떻게 마무리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시리즈가 3권으로 나왔으니, 2권을 읽는 난, 마지막 권에 무슨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영원히 살아서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방황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지금 여기서 죽는게 편안하다"


라는 지은이의 말은, 영원불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한낮 마이동풍(馬耳東)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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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별 2004-12-0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만화책으로 나왔군요^^;;

전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는데.. 소재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만화책도 보아야겠네요^^

열린사회의적 2004-12-08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가 있는 줄은 몰랏는데...^^; 예전에 해적판으로 나온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은 정식판인거죠...
 
이사 - 단편
히로아키 사무라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무한의 주인이라는 작가적 이미지가 많은 작용을 하였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 그의 그림체만 느껴질 뿐 무한의 주인에서 한 발 더 낳아간 삶에 대한 진지성을 쉽게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익히 무한의 주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나에게 그의 그림체는 각인되었다. 그리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수 없는 주인공 만지의 고통, 부모님의 복수를 향한 린의 처절함은 커다란 카리스마가 있지만, 항상 내가 궁금한 것은 주인공이 말하 듯이... 죽을래도 죽지 않을 때에 찾아오는 고통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아직도 만화가 진행형이기에 쉬이 답을 주면 내용의 참신성이나 재미가 떨어질 수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그의 성찰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어설픈 짐작을 하곤 했습니다. 만약에 이 어설픈 짐작이 정답이라면, 무한의 주인에서 이사로 이어지는 지은이의 작품은 하나의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아직도 바다가에 발이 묶인 배에 불과합니다.

도노라는 주인공이 좋아하는 아카기 선배는, 그에게 마음이 없습니다. 아카기 선배는 단순히 학년 선배 이상인 듯, 삶의 행동이 도노의 순진성과는 차별을 이룹니다. 아키기는 청춘 해외 협역대로 잠비아에 간 다키라는 남자친구를 2년 동안 기다릴려고 합니다. 한편 도노와는 소꿉친구인 마유는 이런 도노를 보면서 힘들어하며, 도노의 친구이자 그룹 밴드인 소스케는 마유를 걱정합니다.

서로 엇갈린 듯 한 사람은...

커다란 비바람이나 폭풍은 없습니다. 도노는 하늘땅만큼 사랑을 하지만 표현을 할 줄 모릅니다. 아카기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알고 그가 믿는대로 행동을 하지만 진정 자기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랑치이며, 마유와 소스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 사랑이 자기에게 왔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사람. 서로의 상처를 통해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봅니다. 큰 극적인 반전은 없지만 차분히 읽어가기에는 부담이 없을 듯합니다.

하지마 조금 아쉬운 점은, 아카기의 사랑의 결론에서 보자면 예정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이사"일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 점은 책을 덮는 순간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이사를 위해서 아카기와 다키의 사랑은 파멸이였으며, 이 파멸은 도노와의 새로운 시작을 여는 계기가 되며, 마유와 소스께의 사랑을 키워가는 운명인 것입니다. 즉 아카기의 사랑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인 등장은 책을 덮고 나서도 "왜"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왜 그가 등장했을까요? 또한 이탈리인과 도노를 놓고 술 내기를 하는 장면도 의문입니다.

앞서서 삶에 대한 진지성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지은이가 그림 구석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숨박꼭질을 하듯이 "話頭"를 던졌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입니다. 책을 읽으보시면 아시겠지만 너무 숨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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