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
에버하르트 뫼비우스 지음, 김라합 옮김 / 보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은 꿈 보다 아름답다"]


"이 곳 벤포스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한 아이의 망가진 과거를 치료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191쪽)

실바 신부의 관심이 "새로운 것, 미래, 목표(189쪽)'에 무엇보다 관심이 많은 것 역시 위와 관련지어 볼 일이라 생각을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존중,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부여, 이웃에 대한 따스한 배려...

벤포스타를 가다.
1971년 함부르크에 있는 '어린이 극장'에서 어린이 스커스를 갖는다고 합니다. 서커스단의 곡예사들은 생각보다 어린, 여덟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의 사내아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기예나 기술보다는 그들이 "인구 2천명의 어린이 나라에서 왔다"는 말에 지은이-뫼비우스-는 그곳에 가고 싶은 꿈을 키웁니다.

"독일에서 10주 동안의 무차초스 서커스 초청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무차소스와 그 아이들의 어린이 공호국을 현장에 가서 연구해 보고 싶다는 바람. 그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그 아이들의 공화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바람뿐이었다. 1972년 7월 나는 아내와 함께 에스파냐로 갔다. 우리 부부는 4주 동안 벤포스타는 물론이고 어린이 공화국이 세운 부속 시설들까지 모두 방문했다.(11쪽)"

그리고 지은이는 여행 기록을 여기에 남겼습니다.

나는 무엇을 꿈 꾸어야 할까 고민을 할 때면, 이미 본 것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어린이 공화국'의 존재 가능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로만 구성된 나라가 어떻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솔직히 책을 덮고서도, 과연 이 책의 내용만큼이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라는 삐딱한 금(線)을 긋어 놓고 봅니다. 이렇게 보는 내 시선에, 지은이와 다른 나를 보게 됩니다.

"'무차초스가 산 에스테반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실바는 벌써 부터 아주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산 에스테반에 남녀 아이들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며 생활하고 일하며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 도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실바의 생각이다.(41쪽)"

남녀 아이들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되며, 스스로 결정을 할 줄 아는 자율성과 책임성. 우리는 너무 애지중지하면서 새장의 새처럼 아이들을 가두어두는 것은 아닌지요? 12년 동안의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던져주는 것은 무엇인지....

"실바는 현실주의자일까 몽상가일까? 실바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현실이 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오물에 무릎까지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실을 아름답게 마주할 마음이 되어 있는 사람만이 꿈을 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41쪽)"

현실이 꿈 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벤포스타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 큰 꿈을 꾸며, 무엇을 그릴 것인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 년 안팎의 교육 기간 동안 아이들은 일반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은 물론이요 인간 행동의 잘못된 모습들까지 두루 보고 겪게(161쪽)"는 '큰 모험을'을 합니다. "아이들은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싸구려 담요 한 장을 덮고 자며, 끼니는 스스로 지어 먹어야(162쪽)" 합니다. 또한 "병원으로 봉사 활동"을 하며, 때론 "구걸"을, "가까운 항구의 부두에서 배 청소부로, 나중에는 건설 현장에서 잡역부로 일(168쪽)"을 합니다. 이런 힘겨운 일들을 1년 동안 거치게 됩니다. 즉 어른들이 하는 말로 '고생을 사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고생을 하는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심정이 어더한지,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멸시하는지 체험하기 위해서(168쪽)"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체험 습득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힘겨움을 벗터내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사랑이 생기게 되며,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겸손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을 키워갑니다.

한 사람의 꿈이 이루어 낸, 아니 그의 꿈을 같이 꾸어온 사람들이 이뤄낸 이야기는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우리는 왜 저런 것을 꿈꾸지 못할까? 나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할까라는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부러움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아마도 그와 내가 다른 것은 난 꿈을 꾸려고만 하는데, 그는 꿈을 이룰려고 합니다.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나 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보리 편집부 엮음 / 보리 / 199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어제 일입니다.
토요일이라 공장은 오후 4시 20분에 끝납니다. 황금 같은 토요일, 하지만 4시 20분에 끝나니 아쉬움이 황금만큼 큽니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공장장님이 덥다며, 집에를 가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막내인 내가 공장장님을 남겨두고, "공장장님 저 먼저 가겠습니다. 공장문 다 닫았으니, 나가실 때 문 꼭 잠그고 가세요"라고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100분간 토론 아닌 토론을 했습니다.

평소에 공장장님한테 업무적인 일을 물어보는지라, 또 토요일이고 해서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교육까지 거미줄이 처 졌습니다. 실상은 한 15년 전에 사립대를 나와서 선생을 하려고 하니, 돈 천 만원 정도를 달라고 하는 거랍니다. 그 당시 집이 천오백만원 정도 했는데... 천만 원의 돈이 없어 공장장님은 선생은 포기하였는데... 그저께 만난 친구와의 자리에서 연봉이 족히, (상상하시길..), 된다는 소리에 그때 돈을 주고서라도 선생을 했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제가 잘 다니는 컴퓨터 가게가 있는데, 그 분도 수학 선생님을 몇 년 하다가 그만 두었답니다. 옛날에 청소년 드라마를 보면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무엇을 더 줄 것인가 고민을 하니, 학부모보다 선생님들의 경계 눈초리가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는 듯합니다. 공장장님의 동서(?)되시는 분의 철학이, 어떠한 선물도 학생으로부터 받지 않는다. 하지만 선물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 학교생활을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라면... 설마 설마라며, 꿈을 꾸지만...

다시 겹쳐지는 뉴스, 서울이나 수도권에는 교사임용시험의 경쟁률이 높은데 경기도나 다른 지방에는 미달이라는... 농어촌 초등교사 대도시유입 가속화 등은 경험하지 않은 경험들을 규정 사실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깐요.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이것은 책 제목만이 아닌 내 삶의 철학과 동일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보여 살면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조그마한 시골에는 누구네 집 숟가락 젓가락까지 알기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크거나 관심이 높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알 수가 없으며, 알 수가 없기에 믿음이 생기지가 않고 또는 저처럼 누군가가 누구네 집을 몰래 들어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고... 급기야 서로를 경계하는 모둠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닐테니지만..)

학교 역시 소담하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커지리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선생은 아이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과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시켜 줄 것입니다. 작은 도서관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생기듯이 학교도 마을마다 생겨야 하는 것이 제 아집이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감옥 없는 울타리나 내 꿈을 키우기 위해 내 유년을 옥좨는 곳이 아닌 즐거운 학교, 추억으로 가득한 학교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제 생각과는 정반대로, 시장의 논리에 얽매여, 늙은 교사 한 명을 퇴직시키면 젊은 교사 두 명을 새로 뽑을 수 있다는! 어느 정도의 아이가 없다면 거리와 교사와 선생간의 믿음관계는 아무런 상관없이 폐교를 시켜버리는! 이런 상황이 벌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고 당연시되는 사회!!

가슴 아프며, 조그마한 생각을 지니면 앞이 캄캄하여 어떠한 대안보다 숨이 먼저 막혀 옵니다. 차근차근 대안을 생각해보지만 위와 같은 꿈은 아직 꾸어야할 꿈일 뿐.

아직 총각이지만 제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혹은 조금 시간이 지난다면 기존 학교에 보내는 것에 당연하다는 생각은 버릴 것입니다. 내 아이가 학교 가서 즐거움보다 고통을 먼저 알게 된다면, 사람과의 소중함 보다는 약육강식에 의한 경쟁논리만 먼저 배운다면 저는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몇 개의 지식을 더 안다고 아이들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어 위압하거나 동물들이, 식물들이 어떻게 봄여름가을, 겨울을 나는가에 대한 지식보다 미국이나 자칭 선진국들이 들려주는 맹목적인 지식을 먼저 갈카 준다면 학교에 보내는 것을 당연시 생각만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저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한 말들이 어느 한 부분 틀린 곳이 없으며-이는 제 가치관가 동일하다는 표현입니다. 가만히 꿈을 꾸기만 했는데, 그들은 치열하게 현실과 싸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몇 글을 여기에 옮겨봅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배운 것과 어머니가 갖고 계신 지혜는 독특하고 뛰어난 것이었고, 나는 누구도 어머니보다 윗자리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서는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느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각이나 관념, 견해를 나에게 준 일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13쪽)

"학습과 노동의 분리는 또한 사회의 부정의를 낳는다. 어떤 사람들은 연구만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힘든 노동만 한다. 그러면 사회는 둘로 쪼개지고 만다. 육체노동으로 빵을 버는 사람들이 한 사회계급을 이루고,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이 또 다른 계급을 이룬다. 인도의 육체노동자는 하루에 1루피를 받고, 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25루피에서 30루피를 받는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그토록 달리 평가함으로써 엄청난 부정의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부정의를 뿌리 뽑는 것이어야 말로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34쪽)

"학교는 가정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고 친근하고 두려움이 없는 가정 말입니다."(19쪽)

"만약 올바른 교사라면 결코 어떤 방법에 매달리지 않고 한 아이 한 아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날 때 가장 명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마치 쉽게 고쳐지는 기계 장치처럼 다룰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풍부하고 생명력에 차 있으며 민감하고 두려워하며 다정다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크나큰 이해심, 곧 사랑하고 참는 힘을 지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우리는 흔히 손쉬운 교정 수단을 찾아서 기계적이고 기적 같은 어떤 결과가 나오기만 바라게 된다."(48쪽)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학교, 교사와 아이들이 신뢰관계로 맺어져 있는 학교, 아이들의 창의력과 호기심을 믿고 북돋우는 학교, 단편적인 지식을 주입시키지 않고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학교."(108쪽)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서글픈 현실은, 아직 까지 우리의 사회가 다음과 같다는 점입니다.  "시험을 칠 때면 우리를 감시하고, 어떤 학생도 다른 학생 답안을 베끼지 못하도록 지켜보기 위해 감독관이 지명된다. 이것은 매우 서글픈 광경이다. 우리가 학생으로서 도둑 혐의를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시험 쳐야 할 무엇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36쪽)" 즉 사회는 어떠한 힘(?)의 규율에 움직이고, 그 규율은 스스로와 남을 불신하게 되며, 이러한 불신으로 인해 적자생존의 길을 걷게 되는 악순환의 패러다임. 하지만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감시를 통한 시험 채점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격려일 것입니다.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고, 반평균을 잡아먹었다고 사람을 기준의 도구로서 대하는 것이 아닌,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우리는 왜, 잠재적 도둑으로 취급을 당하는데 분노하지 않고 당연시 하는가? 내 아이와 가족들이 가장 큰 믿음을 받고 사랑을 입어야 할 선생에게서 그와 상반되는 불신을 입는데도 아무렇지 않고 애써 외면하는가? 이러한 패러다임의 고리는 끊겨야 한다.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과 주의 깊은 관심, 그리고 조그마한 격려입니다.

저는 교육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무조건 일을 하였던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폭발한 386세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에 빠져서 깊은 생각은 저 장롱 밑 속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 노는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회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습니다. 내 배가 불러야 남을 돌봐줄 여유가 생긴다면 지금이 그때입니다.

조금은 넓은 시선을 가지고 새로운 세기를 우리가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에 선생님이 계셔야 합니다. 아직 까지 우리에게 선생은 존경과 감탄의 대상이며, 선생님이 하는 말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인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분명 선생님의 성찰이라면 좀더 쉽고, 차근차근 풀어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 옆에 앉은 아이는 오늘은 친구이지만 내일은 너를 짓밟고 올라갈 선의의 경쟁자다라는 사고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 내 옆의 짝지와 우리가 함께 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방법을...

선생님들의 반성 없는 주입식 사고와 선의의 경쟁(?)체제는 너무나 안이하고 쉬운 길을 걷는 교육자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존중 할 때에 비로소 교육이라는 가르침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생은 신(神)적인 존재가 아닌 먼저 난 사람(先生)이라는 겸손의 미덕을 누구보다 먼저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대한 짧은 비평
이 책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교육문제에 대한 고전적 지위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3부로 구성된 내용, 1부의 참다운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내용은 정말 감동적이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2부와 3부는 시간이 지난 내용과 제목과는 다른 내용 등이 겹쳐져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처음에 느껴지든 가슴 큰 울림이 책장을 넘길수록 차츰 잔잔해지는 안타까움이 계속 내 머리를 지배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혹은 바쁜 일상 속에서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시다면 1부 만이라도 꼭 필독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뒷심이 약하다는 생각에 별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있는 그림그리기 살아있는 교육 이호철 선생의 교실혁명 7
이호철 지음 / 보리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스런 눈을...."]




"열이 올라가는 모양을 다 같이 보고 똑같은 분위기에서 같은 시간에 함께 그렸는데도 같은 모양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95쪽)"

"생활 그림 그리기가 바로 자기 표현, 삶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실한 삶 자체가 아름다움이르모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릴 때는 멈추어 있는 자연을 (사실은 멈추어 있지 않지만) 그릴 때 보다 아이들의 개성이 휠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2쪽)"

나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엿볼 때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도 좋아하는 일이며,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서 글을 적고 차곡히 모아서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펼쳐 보여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단순히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산수나 체육 시간보다 좀 더 즐겁다는 의미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지난 아쉬움을 달래며 다가올 시간에는 나도 따라해야지라는욕심을 키웁니다.

나는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이야기인 듯 한 그림과 글을 보며 미소 짓습니다. 남들은 이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며, 마냥 행복에 빠져 듭니다. 침착하게 생기지 않은 듯한 데, 그의 눈에는 침착하게 생겼으며... (44쪽 ~48쪽) 철이 아닌 모든 것은 찝을 수 있어 편리하다(52쪽; 호츠키스)는 솔직한 표현, 어쩌면 내가 잊고 지낸 내 동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바다에 가면 항상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 책을 펼칠 때면 항상 내 동심과 꿈이 밀려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덧붙임" 지은이는 생활 그림 그리기는 자기 표현이라 합니다. 또한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 살은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냥 도시로 떠난 자리에는 늙으신 노부부와 세상 물정 모르는 누렁이가 파리를 날리고 있는 곳에는, 여름날 온동네 떠나갈 듯 뛰어노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고층 빌딩과 아스팔트 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그 삭막한 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모습을 가슴에 닿아, 어떻게 표현할까 걱정입니다. 잠시 도심을 벗어나 자연으로 스케치북과 4B 연필 한 자루 들고 마냥 떠나봄은 어떨가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맬서스를 넘어서
레스터 브라운 지음 / 따님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대안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뿐이다.

간혹, 바다 건너 나라를 티비나 책으로 보면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산업화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로 설정하고서는 앞 만 보고 달립니다. 여기에는 "00님이 너희를 특별히 사랑하사"라는 우월의식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닌 뫼를 올라서 정복하듯(登頂), "자연을 정복하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든 그들이 하나둘씩 변화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연을 무시한 개발은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큰 변화는 아니지만 조금씩 자연에 대해 우월이 아닌 동등 의식을 지니고 같이 지낼려고 하는 듯 합니다.(하지만 그들이 진정 인간의 오만함을 벗고서 자연에 대한 동경을 지녔는지 아니면 소나기를 피하 듯 일시적인 돌파구로서 자연과의 동침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러한 동등의식은 기계의 난개발을 막으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모색을 하게 합니다. 아스팔트 위에 돌을 깨고서 나무를 심는가 하면, 베란다에 화분을 놓아두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수고를 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극적인 반전"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즉 기계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한 일 백 년 전의 기계파괴운동이 일시적인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있다면, 지금 기계를 보는 눈은 나라에 큰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제가 아닌 질의 문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중,후진국들은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 기계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선진국들이 던져준 사탕에 길들여저 그것을 쫓을려 합니다. 분명 사탕을 받아 먹을 수 있는 나라가 몇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은 받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선진국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 내 안의 금덩어리는 반으로 나누어 가질려고 하지 않기에, 인류는 극을 향해 무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계만이 인류에게 문제인가? 지은이는 기계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인류의 증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인류는 기하급수적을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은 현재에 많이 부정됩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텍스트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즉 지은이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에 대한 식량의 산술급수적 문제만이 아닌, 인구의 증가로 통한 19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식량생산, 수자원, 생물다양성, 에너지, 해양 어획량... 등등 이러한 문제는 맬서스가 제기한 텍스트에 갇혀진 것이 아닌 좀더 광의의 의미를 지닙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맬서스의 관점에서 다시 문제제기하여, 확장된 사고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한 우려를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꼭 기하급수적 증가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비교하며 현시점의 문제를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분석을 내어놓습니다. 이렇게 내어 놓는 분석이 어느것 하나 장미빛 미래가 없으니, 걱정일뿐입니다. 이런 걱정과 더불어 책을 읽는 내내 제 머리를 무겁게 한 것이 흔히 말하는 개도국에 관한 점입니다.

"국가들이 물공급 한계에 다가섬에 따라서 분야간의 물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농업 분야는 물사용의 효율이 떨어진다. 값어치는 200달러에 불과한 1톤의 밀을 생산하려면 1,000톤의 물이 소비되는데, 그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하면 생산고를 1만 4,000달러 늘릴 수 있다. 이러한 70:1의 비율은 공업과 농업이 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할 때 왜 공업용수가 우선권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증가하는 수요가 공급한계에 부닥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농업용수를 전용하여 늘어나는 생활용수 수요를 만족시킨다. 그리고는 농업용수의 부족으로 감소된 식량생산을 벌충하기 위해 곡물을 수입한다. 1톤의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0톤의 물이 필요하므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은 곧 물을 수입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인구증가가 매우 빠르고 나라마다 물부족에 직면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1990년대에 곡물수입이 가장 빨리 늘어난 지역이다.(34쪽)"


ㅜ.ㅜ
단순히 무역을 통해 물물교환의 발달형식으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 농촌에는 나돕니다. 불과 20~30년 전 만 하더라도 똥을 밭에 뿌리고, 벼 짚단을 논에 갈아업고 하여 농사를 짓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똥은 돈주고 버리고, 벼 짚단을 불살라 버리고 그 자리에 농약과 비료를 줍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농촌은 농약과 비료 아니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사고의 전환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약과 비료는 아주 쪼끔 아주 쪼끔의 문제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식량난과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얻어지는 막대한 부를 거머지고 위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중동 국가는 선진국들이 흘리고 간 고철에 입맛이 길들여져 다시한번 농사를 포기할 것이고, 그때에는 식량 주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추석이 다가오기전 벌초를 하러가곤 하면, 뫼 마다 오동나무가 많은 이유를 아버지는 지겹지도 않은 듯이 해마다 들려 주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사람들이 오동나무를 많이 사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은 순진해서인지 일본사람들이 정말 오동나무가 많이 필요하여 사가는 줄 알고, 일본에 팔려간 오동나무(묘목)를 비싼 돈 주고 사오는 것이다. 너도나도 오동나무가 돈이 되는 줄 알고, 일본사람들이 파는 오동나무 묘목을 사왔지요.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급급하여 일본의 상술을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순간 오동나무를 많이 사는 것처럼 보여, 오동나무 묘목으로 우리나라에 되팔은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에 팔아서 부자가 되려는 환상에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빚만 지게 되고, 오동나무를 사 가져 안으니 뫼 마다 오동나무일 수 밖에요. 오동잎 하나 떨어지면 온 천지에 가을이 옴을 느낀다 했든가요? 하지만 내게 오동나무는 순진한 우리 어머니아버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난 그 환상을 지금도 보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는 선진국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산업국가와 개도국을 가릴 것 없이 결핵.이질.HIV/AIDS를 포함한 많은 전염병의 발병률은 빈곤과 나쁜 건강상태에 시달리는 도시 빈민가에서 매우 높게 나타(55쪽)"나지만 남을 침략하기 위해 살상 무기를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단순히 인구 증가에 따른 문제가 인류의 총체적인 문제를 낳을 수도 있지만 가장 피해를 보는 곳이 선진국을 제외한 우리라는 점입니다. 낯은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선진국을 견제하고 새로운 대안을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쪽 수에서 짐작할 수가 있듯이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2~3장에 하나의 문제제기를 하다보니, 이미 정해진 답을 쫓는 듯합니다. 이런 점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다른 문제와의 상관관계는 어떻는가에 대한 분석은 없습니다.

두번째, 앞서서 말했지만 단편적인 편린은 19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하나 때어놓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씩 나열된 문제는 우리는 너무 어두운 구석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물에 빠진이는 어떻게든 살려고 하지 "아이고 나 이제 그냥 죽는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아직 우리는 물에 빠졌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너무나 한 곳 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되기를 단정짓는다고 해야할까요, 미래라는 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회이며 우리가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제게, 너무나 굳은 사고를 보여줍니다.

세번째. 과연 이 모든 문제가 인구의 증가로 인한 문제인가라는 점입니다. 인구가 증가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제 생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진국들의 기계문명에 대한 환상, 개도국을 인류의 공존문제로 보는 것이 아닌 약탈 내지 신식민지화하려는 사고에 기인한다고 보여집니다.

지은이들의 인구 문제에 대한 제기를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선진국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점은, 시선이 다름을 느낍니다. 아울러 어떤 지은이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믿으며, "신좌파의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연대가 결성되 인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것이라 믿습니다.

작은 책이지만, 그 문제제기와 시선, 그리고 생각의 다양성은 감히 쉽게 깊이를 논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또한 조금의 시선이 다른 점은 새로운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것이라 생각을 가집니다.

덧붙임:..위의 책은 절반 정도 밖에 읽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내용적 깊이가 앞의 연장 선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겸허히 수용합니다. 아울러 다 읽지 못하고 성급하게 올렸다고 비판을 하시더라도, 존중합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땅 큰 나라 네덜란드 엿보기
최란아 지음 / 학민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교과서에서 풍차의 나라라고 몇 번 들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옆의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에 내 마음은 가 있었지,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멜이 이 곳 출신이고, 어떤 이가 둑을 막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큰 선입관을 차지한 나라. 실로 나는 네덜란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교과서에 나온 몇 줄로 그 나라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러한 일이 얼마나 좁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확연하게 느꼈습니다.

 

지은이의 말처럼, 그의 눈을 통해 네덜란드를 엿보면서 전 또다시 그 나라를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하려고 안간힘을 섰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행동 모습을 보면서, 근원적인 공통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제가 품었던 호기심입니다. 책은 하루 만에 읽혀지지가 않았고, 띄엄띄엄 읽은 지라 몇 번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정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 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네덜란드가 지니는 이미지를 찾으려고 한 노력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참으로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미지로서 자기를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어내므로써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옷의 유행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나, 집의 창문을 크게 해 놓은 것 등을 보면 충분히 공감(共感)하시라 생각을 가집니다. 거실이 원히 내다보이는 창문을 내놓고, 커튼을 치지 않는 집!! 아울러 이는 읽는 동안 얼굴을 붉히게도 하면서, 한번쯤 꼭 가보고 싶다는 동경을 불러 일으키는 성(성)에 대한 개방성-티비의 프로와 해수욕장에서 윗가슴을 드러내 놓은 모습-등은 숨김이 없는 선상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자연스러움은 포용력이라는 쌍둥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같지 않다고 하여,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다름의 인정! 그들은 어떠한 선을 그어 놓고 "너희는 이 선 밖에 있으니, 나와는 다르다"라는 이러한 규정이 없기에 사람을 대함에 거짓이나 동정이 없으며, 다양한 생각과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같이 숨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숨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나와 같지 않다고 선밖에 두는 것이 아닌, 다름을 차별이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는 그들에 큰 동경을 가집니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은 사람들로 보인다고 말하면 과장일까요?

 

자연스러움과 포용력은 회사나 사회 등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모습이 간혹 낯뜨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부러움으로도 다가오기도 합니다(회사에서 회의하는 모습-120쪽)

 

서로의 다른 입장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힘이 강한 나라. 이는 엄격한 규율 속에 자라기만 한 사람에게는 자칫 위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엄격한 규율 속에 갇힌 이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네덜란드는 성과 마약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이지만 범죄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는 아닙니다.(네덜란드 마약 범죄율-"오늘날 네덜란드 교도소 수감자의 17%가 마약사범이다. 마약 접속이 이렇게 쉬움에도 불구하고 1997년 암스테르담 대학 마약조사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마리화나 사용량은 오히려 미국이 2배 높다166쪽") 이는 문화와 하나씩, 차근히 쌓아올린 자유가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지은이는 네덜란드에 대해 환상 만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의 다양한 이면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에게, 이성은 어느 하나 이쁘지 않은 모습이 있겠습니까! 지은이는 분명 네덜란드를 살기 좋은 나라, 아름다운 나라로 봅니다. (이는 간혹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모습에서도 우리나라의 아쉬움을 단적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의 장단점으로 네덜란드를 보지는 않습니다. 8할 이상이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또한 네덜란드의 정책이나 깊이 있는 분석은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기준으로 네덜란드를 엿보고 있는가에 대한 관점에서도 비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를 알고 싶다면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안에서 정책이나 정치, 생활을 평가하지 말고 넓은 눈으로 세계를 보면서 정말 우리가 보고 담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열린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동안의 네덜란드 엿보기를 했지만 제 세계관은 커다란 충격에 휩쌓여 넓은 세계로 항해해 나아갑니다.

 

추신: 네덜란드를 3가지 단어로 규정한다며, 자연스러움, 포용력(자유), 절약이라 생각을 가집니다. 즉 절약이 가장 밑 바탕이 되고 그 속에 자연스러움과 포용력이 녹아 있다고 생각을 가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