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왜 하지? - 꼼꼼하게 들여다본 아홉 개의 수업 장면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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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여서, 손을 들고서는 '선생님 왜 공부를 해야하지요'라고 묻지는 못한체... 계속 가슴에 품어온체 살아왔습니다. 나름대로 몇 권의 책을 읽어오면서 정리된 내용이 아무래도-미셀 푸코의 추론-남의 이론을 무작정 수용한 것이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 읽어나갔습니다.

지은이는 여덟개의 수업 장면을 통해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덟개의 수업 장면을 통해 교사가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고뇌를 담담히 담아내며,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산골의 분교에서 수업의 이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24쪽)' 기대는 낭만적 환상이며, 교사가 교과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최소화하며(50쪽), 몸이 아파도 수업은 계속 진행되어여 합니다(112쪽). 아울러 '교사들이 [새교실]이나 [교육자료]를 베끼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은 저가를 베겨 오다시피(146쪽)'하면서 수업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교사들은 사전지식(85쪽)을 동원하여, 좀 더 다양한 접근을 할려고 합니다. 상급기관이 통제와 관리라는 관점에서 교사와 아이들을 본다면 교사들은 그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려고 합니다. 이런 여러 모습을 훓어 본 다음에 마지막장,

9장. 지은이는 자기의 글쓰기를 통해 근본적인 물음을 내놓습니다. 즉 지금까지 교사들이 다양한 시도는 자기에게 맞추어져 있지 학생의 눈높이에 가 있지가 않다, '나는 왜 아이들이 그처럼 사고하게 만들려고 애를 쓴 것일까? 언어로 표현된 타인의 사고를 이해하고, 자신의 사고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223쪽)'에 대해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한 때 현직 교사였던 이가 이상을 위해 몸부림 친 고뇌가 나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몇 몇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은이의 시선은 상급기관이 내어준 숙제를 좀 더 다양하게 푸는 문제이지, 왜 숙제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사들이 다양하고 자기가 꿈꾸는 이상적인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업무량 때문이라는 외부적인 변수로서만 한정합니다. 즉 지은이는 '교사와 학생들이 현재의 삶 또는 둘 사이의 관계는 무시되거나, 교과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고려되(208쪽)'는 수업을 계속 관찰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 대한 제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그가 들여다 본 교사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공기중에 28%는 산소이며 나머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한 아이가 물과 이산화탄소라고 대답을 하자, '이 교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92쪽)'은 조금은 권위적인 모습이 풍깁니다. 이런 장면은 실험 도중 풍선이 터지자, 놀라지 않았니 하는 걱정스러운 물음보다 실험을 촉구하는 대답(96쪽), 길건너 교회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이 듣는 가운데 '또 방해공작이 시작되었군(99쪽)'이라고 말하는 장면,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을 체벌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136쪽)'지만 지금은 체벌함으로써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에서는 말문이 막힙니다. 체벌에 대한 반성이 없으며,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밖에 없다고 한정하는 지은이의 모습은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꼼꼼히 들여다 본 모습은 조금 현실적이였을는지는 몰라도, 학생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없기에 방관자적 입장 밖에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안은 지은이의 사고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아쉬운 장면이 여럿 보이지만은 지은이의 진지한 고뇌(마지막 장면)가 새삼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더욱이 지은이의 의지대로 가르치다가 학부모와의 마찰. 하지만 학기말에는 거꾸로 그를 붙잡는 모습에 참 잘 가르친다는 착각으로 마무리 지었어도 되는데, 한 학생의 입을 통해, 선생과 학생간의 믿음에 대한 고뇌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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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별 2004-12-0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사회의적님에 리뷰는 언제나 장점과 단점 모든 면을 비추기 때문에, 책 선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열린사회의적 2004-12-0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아침에 들어와서..^^ 정말 설렁한 서재인데, 많은 리뷰를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하하~~ 한번 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답니다.

그리고 님께서도 얼릉 책을 읽고서 글을 올리시면 제가 종종 놀러가겠습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아쉬움이라도 있다면 훌훌털고 가시길 바랍니다.

님께서도 날씨가 추워지는데.. 항상 몸 건강하십시오. 진심으로 비손해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난 듯 합니다.*^^*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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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오래된 과거라고 하면 좀 이해하기 쉬울터인데, 지은이는 왜? 부제로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고 했습니다. 라다크로부터 배우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오래된 미래에 대한 제목이 암시하는 의미는 내겐 넘을 수 없는 뫼일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서야 지은이가 암시하는 말을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

이 책은 지은의 머릿말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에 모든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본인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좀 더 서술적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의 논의는 좁은 세계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본 세계만이 전부인냥 인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나이와 일정량의 경험이 축적이 되면 더욱 공공히 해져서 큰 벽을 만들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본 것 만 믿을려 하고, 다른 것을 보면 '속임수다'라고 함부로 내뱉습니다. 흔히 파블로프의 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세계를 들여다 보면, 파블로프의 개는 다름아닌 경직된 사고를 하는 우리 자신일런지도 모릅니다. 주인이 종을 치면 밥을 준다는 인식이 시간과 경험에 의해 축적된 나머지, 그를 맹신하듯. 어떠한 비판적인 사고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계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일방적인 (우월성)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이를 진리인냥 믿게하는 사회적인 흐름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큰 혼란을 느낍니다. '라다크로 가기 전에 나는 '진보'의 방향은 어쨌든 불가피하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공원 한가운데를 질러가는 새 도로, 200년 된 교회가 서있던 자리에 세워지는 철골과 유리로 된 은행 건물, 길모퉁이의 가게 대신 들어서는 수퍼마켓, 그리고 삶이 나날이 더 힘들고 빠르게 느껴지는 사실을 모두 수동적으로 받아들(7쪽)'였을 뿐입니다. 더욱이 그는 ' 나는 또 정말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좀더 협동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꿈에 불과하다(8쪽)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는 라다크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열린 다른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경의을 표하며, '일과 잔칙 하나(25쪽)'되는 곳입니다. 노동적 집약적인 일을 '부드러운 속도로 일을 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여가를 누(40쪽)'는 곳! 서구의 문화속에서는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으며, 내가 처한 현실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설령 이런 사회를 만들자고 한다면 사회운동가니, 이상주의자니하는 식의 비판만 받게 됨은 불을 뻔합니다. 하지만 이는 존재하지 않은 나라가 아니며, 존재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본 세계만 인식하는 닫힌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슴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은이는 라다크에 살면서 두 가지의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공동체적 삶이라면 다른 하나는 서구 산업문화가 침투하면서 물질자본주의를 낳게 한 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자집에 태어난 먹고 사는 문제에 고민을 하여 보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물질자본주의는 이상향입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시간에 날마다 쫓기게 되며, 내 아닌 다른 이웃이 하루 한끼 걱정을 하며,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같은 지구촌이라는 한 마을에 살지만 약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을 나와같이 아파하는 이라면... 지은이와 같은 큰 의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과연 진정 우리는 행복한가라고...

라다크로 배운다는 것은 지극히 지은이의 주관적인 냄새가 풍기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모든 논의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왜일런지... 오래된 미래라는 의미는, 우리가 같이 누리고 행복하게, 자연과 더불어 지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라다크에 대한 찬사가 아닐런지... 또한 서구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미래(이상향)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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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마을 이색기행 - 색다른 풍경과 풍물, 숨겨진 마을문화를 찾아서
이용한 글, 안홍범 사진 / 실천문학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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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동강과 서강이 있다. 서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혹은 물길이 세지 않아서 사람들이 찾지 않아 자연 그대로에 좀 더 친숙한 반면에, 동강은 많이 알려져 훼손이 적잖이 되어버렸다. 이런 동강에 대해 부러움을 갖고 있던 영월 군청에서 다리를 놓아 관광수익을 얻어 낸다는 계획이란다.(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자연의 훼손되지만 이에 따른 수익도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방 경제 자립은 언감생시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

사람이 찾는다고 무조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 자세부터가 바르지 않다면, 불을 보 듯 뻔한 이치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찬바람을 쌩쌩 맞으며 1시간 이상이라도 기다릴 수가 있으며, 하루가 걸리는 먼 길이라도 발이 불어 터져도 걸어갈 수는 있지만 사람에서 그 대상이 자연으로 바뀌면 마음도 변한다. 그곳에 대한 동경이 가슴 가득 채워지면 자동차를 몰고서 휭~~하니 한 두 시간에 달려가서는 사진을 찍고 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히 채운다. 정말 자연을 좋아한다면... 뫼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위에 한 분 계신다. 그 분은 뫼가 좋아서 주말 등등 시간을 내어서 종종 오르곤 하는데, 원칙 하나만은 가지고 계신다. 즉 절대 차로 뫼를 올라가는 것이 아닌, 두 발로 오르는 것이다. 뫼를 좋아하기에, 뫼와 같이 호흡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 한다. 이런 면에서 지은이의 성찰은 많이 부족하다.

지은이는 '오늘날 서강이 이만큼이나마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엄한 물굽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서강은 300~400미터 마다 여울목을 끼고 있어 자체 정화늘역이 뛰어난 편이다. 물론 동강에 비해 찾는 이가 드물었던 것도 서강을 온전한 모습으로 남게 한 커다란 요인(15쪽)'이라는 점을 안다. 그러면서도 여행수첩(22쪽)을 통해 승용차로 들러보러 오는 길을 자세히 알려준다. 사람과 차가 모이는 곳에 자연 그대로를 꿈 꿀 수가 있는가?

나는 커다란 어지저움증에 휩쌓인다. 지은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걸까? 내가 아는-뫼를 좋아하는 이는 두 발로 오르는데...자연을 아끼는 이가 왜 자동차로 움직일까? 혹시 그는 자연을 좋아는 것이 아니라 차로 여행을 하는 그 안락함과 쉽게 자연을 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명의 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겨울이 계곡물 사이로 물러나고 그 빈자리에 개나리나 강아지풀이 피면 꽁고 얼어던 땅도 마음을 풀고 진흙을 잉태한다. 이런 들판을 한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신발보다 더 무거운 진흙을 한웅큼이 떨어지지 않는 경험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다음도 신발에 붙은 흙은 해마다 반복될 것이며,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선물-봄이 다가오는 암시-이라는 것을 알게도 될 것이다. 진흙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자연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이 작품은 아쉬운 점을 몇 몇 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한 쪽을 동물원 구경가듯 한다는 점과 문명의 이기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 자연의 깊이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고,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보다 운치에 대해 더 안타까워 하는 점(78쪽) 등은 아무래도, 인간적 성찰이 덜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글과 어울리는 사진, 사람과의 친숙한 만남과 이야기, 다양한 시선을 통한 길라잡이 등으로 세계관을 넓히고, 아스팔트 위에서 여유를 선사하는 장점이 뭉친 책이다.

언젠가 떠날 날이 있다면 이 책을 들고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본 눈으로 누리를 담지만은 않을 것이다.

추신: 이 책에는 부안과 위도의 이야기도 나온다. 과연 물질적인 풍요앞에 정신적인 풍요를 저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은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외국에서는 동아시아 최고의 풍어제(114쪽)'라며 찾아오는 곳을 정부는 없애버릴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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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대담 시리즈 2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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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라는 호기심이 책을 들게 했다. 아울러 e-mail이라는 영어는 다른 두 곳에 사는 사람이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 가면서 하나 둘 씩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배움을 얻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의 어설픈 착각이라는 것을!! 이 책은 세계관을 넓혀 준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기획의도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았다.

김용석 교수는 서양의 다양한 세계관을 들려 주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무엇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계속 이어갈려고 하는데 이승환 교수는 김교수의 말꼬리를 잡으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런 구조가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감이 없고, 127일 동안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사회현상에 대해 하나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책을 덮고도 풀리지가 않았다. 기획 의도 자체가 명확한 논거를 던지지 않은 점도 있지만(-이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가 있다. 즉 책 제목이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두리뭉실하게 풀어 쓴 것이리라.)

이 책은 김교수와 이교수가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열어간다. 김교수는 아픔에 대해서 고민(26쪽)을 가졌고, 이교수는 존재론적 탐구(20쪽)에서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미시적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거시적으로 보는데, 이는 책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교수가 사회에 대한 본질론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파헤치고 대안을 찾는 반면에 이교수는 공자曰, 맹자曰 하면서, 인용구를 늘어 놓는다. 그리고 수 천 년 전의 이론이 절대 진리인냥 내놓지만 좀더 세부적인 대안으로서는 많이 부족하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는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자학 내지 피해의식에 빠진 즉,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동양의 우수성에 대한 논의를 쭉 늘어놓지만 그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은 서구의 이론가와 중국의 몇 몇 사상가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우리의 사상이 없는가?(또한 이교수의 대담이 논점을 비켜나거나 핵심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한(159쪽) 부분 등이 자주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과의 대화이다 보니, 나와의 눈높이에 대한 배려는 없다. 보기로 이교수가 '프랑스의 철학담론은 문화 산업 담당자들에 의해 수입되기 시작(72쪽)'했다고 하는데, 문화산업 담당자의 존재여부와 실체에 드는 의구심은 다른 책을 통해 증명을 해야 할 뿐이다. 즉 두 교수 사이에서 묵시적 동의가 이루어지면 읽는 나와는 상관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나는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읽어가는 길을 택하고... 이런 순환구조를 띄고 있다. 아울러 책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진발이 너무 많다. 두 교수의 얼굴 사진이 무슨 이미지와 함축, 혹은 암시성이 있는지... 조금 다양한 시선으로 다양한 모습을 담았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김교수는 대담중의 '오늘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총체성 없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유로운 만남의 시대, 즉 '엶'의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열겠다는 것이지요. 열림과 담힘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처음에는 닫힘이었고, 두 번째는 확장으로서의 열림이었고, 세번째는 주체적인 엶이라는 것입니다.(181쪽)를 가슴에 새기며...

김교수와 나와의 눈높이는 일치하는데, 김교수와 이교수, 나와 이교수와는 상당한 차이를 느낀다. 이교수가 조금더 열린 생각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담을 하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상당히 남는다.

추신;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의 세계관을 하나씩 메모하며, 어떤 이야기가 이루어지는지 정리하며 읽는 것이 좀 더 유익할 것이다. 눈높이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색했지만 김교수의 대담은 가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감히, 학생이 교수한테 점수를 매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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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지배 - 부는 지식이 결정한다, 반양장
레스터 서로우 지음, 한기찬 옮김 / 생각의나무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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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그것은 '지식'이라는 그물이다.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네트워크가 가속화되고, 정보가 바다와 하늘, 땅 만큼 많아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지식에 대해 몰라라하는지 모른다.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이길레 사람들은 여기에서 노다지를 찾을려고 하는 것인가?

지은이가 보기에 '교육받은 종업원이 문맹자와 함께 일할 때보다 교육받은 다른 종업원과 함께 일할 때 생산성이 더 높(179쪽)'일 수 있는 요건이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세계 시장은 값싼 노동자를 찾아 나서듯, 지식인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서 기업화한다. 아니 이를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기업이며, 나라라는 경계선을 허물어버린다.

'이제 세계는 세계 정부가 없는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집행력이나 협의된 일련의 규범이나 규제가 없고, 용인할 수 있는 행동 규약을 강제할 보완관도 없으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호소할 판사와 배심원도 없는 세계 경제를 의미하는 것이다.(28쪽)'

즉 미국이 유럽(119~127쪽)이나 일본, 중국보다 앞서는 이유. '인종 정책(42쪽)'-'물리적인 손상은 복구될 수 있으나 인적 손실은 복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 아인슈타인, 페르미 일가, 그리고 지적 후계자는 선진국으로 이끄는 탁월한 인적자원이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현대에 이르서는 빌 게이츠를 추가하며, 그를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는냐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미국은 새 사업을 시작하는 데 아주 탁월한 여건을가지고 있다(82쪽)' 즉 창의성을 통한 다양한 실험을 적극 지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뒷받침은 인적 자원 형성에 커다란 토대가 된다.

아직까지 주입식과 콩나물 시루 처럼 한 교실에 우러러 모아놓고 하는 교육이 얼마만큼의 부의 가치를 창출할지는 미지수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것 처럼 '맨손으로 가시덤불을 뽑아 내는 일(90쪽)을 하지 않는다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논의는 지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너무 광범위적으로 풀어가기에 원론적인 깊이에 머물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耳懸鈴 鼻懸鈴)라는 식의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한 철저히 보완이나 대비책이 없으며,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무력에 의한 지배가 아닌 지식의 창출로써 부(富)라는 것을 합리화하는 단편적인 논의를 이끌어간다. 지구촌이라는 세계적 한나라가 선의의 경쟁에 의한 지식 우의의 경영을 이루내는 것 만이 아님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더구나 앞서서 말했지만 전략없는 개론적 수준으로 인하여, 벤치마킹이나 타당한 전략을 세우기가 힘겹다.

지식을 통한 부의 형성이 되라는 짐작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식을 어떻게 잘 버무려서 고가의 상품이나 컨텐츠를 개발하여, 수익모델을 내세우는가라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 수록 개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책은 그 효용가치를 떨어트릴 뿐이다. 번역서 초판본이 나온지가 4~5년이 흘렀으니...

부가 지식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믿음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건너 뛰어도 된다. 하지만 지식이 어떻게 부를 형성할 수 있는가는 의구심이 든다면 개론적 수준으로 읽어 볼 수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난점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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