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블랙잭 5
슈호 사토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헬로우 블랙잭, 조금의 눈치가 있다면 몇 장을 넘기고 나서 이 작품의 스토리를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스토리는 플롯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 잘난체 하면....
 포스터라는 사람이 이런 식의 말을 했습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이 죽었다 (스토리; 시간 흐름)
 왕이 죽었다. 이로인해 왕비가 너무 슬퍼서 죽었다(플롯; 인과관계)

 저는 플롯은 상당히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이 세상에 내더져서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인과 관계에 놓여져 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아직 전생까지 인과 관계를 설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숨쉬는 시간만 한정하여...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고사성어가 교토삼굴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헬로우 블랙잭을 몇 장 넘기면 금방 이 스토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암시하는 장면

이 작품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지은이의 가치관이 너무 많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금 넘치는 듯 한데... 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리고 일본의 의료 현실을 보면서 우리의 거울로 삼을 수가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줍니다. 우리나라의 의료현실이 어떠한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논의를 시작하여 봄이 어떨가 합니다.

이러한 장점이, 만화라는 작품에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무슨 목적 의식이 투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과하게, '내 말을 듣어라'라는 투의 표현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잔손택이 말했듯이 "철저히 억제된 정념(126쪽)"[해석에 반대한다]을 통해 스스로를 가장 낯추고, 정확성과 객관성을 함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 진부한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형식 논쟁을 통해 무엇이 먼저인가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주인공은 착하다. 그리고 주인공과 생각을 같이 하는 몇 몇 사람이 보이지만 그밖의 인물들은 모두 나쁜놈들이라는 인식이 깔려가 있습니다.  1권에서는 일본 의료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나가 좌절되는가 그들은 왜 꿈을 버렸는가에 대한 인간적인 탐구는 미약하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구속당하는가?
 
참고적으로 아래의 장면은 제1외과의 시라토리 다카히사와 주인공과의 설전입니다. 내일모레 저세상을 향하는 분을 두고 과연 어떻게 할 것인라고 열띤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입니다. 
 

 "제1외과의 시라토리 다카히사"라는 인물이 지닌 의미는 주인공의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지워져버린다. 이러한 주인공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목적의식적 글쓰기로 비춰져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맹목적 보여주기씩의 나열은 제 입맛과는 틀립니다.

하지만 ㉿해원㉿에서 그에게 반해 버린 난, 콩깍지가 씌여서 끝까지 다 읽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5권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해봅니다.


중언부언 : 하나마나한 소리 하나, 지은이의 두 작품을 읽고 느끼는 점은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해원이라는 먼저 작품에서 보여준-바다 건너 사람이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오다가 배가 침몰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주인공이 나타나 만화 전편에 흐르는 굳은 의지 "꼭 살려낸다", 이 집념을 통해 선(線)에 놓인 사람을 구해낸다. 밀항을 통해 들어오려는 바다 건너 사람은 조금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뜻뜻하게 그를 바라본다. 내가 보는 지은이의 눈은.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느낌. 이 느낌은 헬로우 블랙잭에 옮겨 져서도 빗나가지가 않는다. 돈에 의해 움직이는 의사가 아닌, 마음에 움직이는 의사. 그는 사람을 고치는 기술을 가진 것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인술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마나한 소리 둘, [여자들이 의사의 부당의료에 속고있다]라는 작품은 여자들이 의사들에게 해부당하고 마는 아픈 현실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 작품은 (일본이라는 나라이지만)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의사들과 환자들이 겪는 인물 의료체계의 구조적인 폐해를 드러낸 작품입니다. 물론 모든 것은 정부의 지도력 부재라고 어벌무리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지은이이의 시선은 간간히 여기에 머문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둘 다 가슴아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마한소리 셋, 의사들은 제약회사와 야합을 했을 지도 모른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암! 우리는 암을 치료하기 위해 환자들은 또다른 마루타로 만들어 항암제를 투여한다. 물론 살아날 가능성은 하늘 만이 알고 있을 뿐. 설령 운이 좋아 살아나게 되는 경우가 발생을 하며 제약회사는 임상실험을 공짜로 하고 특허를 얻어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제약회사와의 야합을 통해 뒷돈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암에 걸리게 되면, 돈이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하고 병원 밖에서 죽어갈 뿐... 제약회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임상실험을 한다면 도장 하나를 받아야 한다. 환자들은 요구해야 한다. 내 몸이 실험체가 되어 불치의 병을 낳게 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이로 인해 제약회사와 의사들은 특혜나 부당이득을 취하지 말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위해 약을 쓰도록... 물론 이것은 나의 어설픈 기대치이자 측은지심으로 무장한 오만함입니다.

하나마한소리 넷, 과연 끝을 어떻게 맺을것인지 계속 읽어나가겠습니다.

하나마한소리 다섯,  그림을 클릭하면 더 가까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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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을 잘못 들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그 소문만으로 자자하다. 익히 듣은 이야기이지만 읽지 않으니, 알 수가 없어 다른 여러 선입관을 지워버리고 책 읽기를 하였다. 하지만 난 끝내 이 책의 반을 펼치지 못하고, 서투른 서평을 할려고 머리를 정리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글이라는 것은,

아침 내 오는 이 없어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면 운다

고 인용하는 충지의 시처럼 자연스런 울림이 있어야 한다. 지은이도 분명히 이를 인지하고,  "이 그리움은 설명적 언어의 탈을 쓰고 있지 않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렇다. 정말 아름다움은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보는 이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굳이 아름다움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의 시에 설명적 언어의 탈을 쓰지 않음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절실히 묻어나는 진한 삶의 회한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은이의 글쓰기는 이미 그가 느끼고 방어벽을 치듯이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는 나와 같은 어쭙다는 글쟁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려고,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라고 푸념한다. 나는 처절한 현실인식에 의한 정(情)겨운 글쓰기에 대한 동경을 갈구하지, 어설픈 현실논리로 그의 수사학을 조롱할 생각을 손톱만큼도 없음을 알립니다.

남해안 경작에서 쑥의 슬픔과 평화까지...
지은이는 남해안 경작지에서  느끼는 감정을 "밭들의 두렁은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체 공학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 밭들은 구불구불하다"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하지만 인체 공학의 리듬을 상상할 수 없는 내게 그의 수사학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밭두렁은 먹고 살기 위해, 한뙤기의 땅이라도 더 건지려는 억츠러움에 나온 피와 땀이지 무슨 인체 공학인지 리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본 밭두렁은 콩이며 깨를 심기 위해 여름내내 돌을 가려내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구부러진 허리가 겹쳐져 보일뿐입니다.

아울러 대책없이 3000포로 빠지는 글쓰기도 낯설기만 하다. 남해안의 경작지의 보리 이야기는 자연스레 냉이국, 달래, 쑥, 미나리에 대한 자유분방한 찬사와 악평으로 이어간다. 물론 아내 작은 제목을 달아 두었지만 난 이 글이 기행문인지 설명문이지 헷갈린다.

"쑥은 넟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을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의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38쪽)'

쑥=낯선 시간의 최전선, 겨우 존재함,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

시적인 미문도 아닌 이상, 위에 나타내는 말이 무엇인지 좀 더 쉽게 글쓰기를 함이 옳지 않을까? 내가 보는 쑥은 봄처녀 설레는 마음으로 논두렁밭두렁에 나가, 과일 깍는 칼로 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시로 다 나가버린 농촌은 우리의 어머니가 서울간 아들이나 딸이 오면 쑥국을 끌이기 위해 혹은 소도시에 사는 주부들이 소일 삼아 케는 일상뿐이다. 그것을 보면서 시간의 최전선이니 겨우 존재한다는 의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아울러 지은이가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면 혼자 무슨 꿈을 꾼 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 좀 더 자세히 풀어 "아, 하~'라며 동요 의식을 불러 일으킴이 옳지 않을까...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차라리 강아지 똥을 보고 이러다면 휠씬 더 이해가 쉬울텐데... 지은이는 무슨 연유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렵다...

"쑥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39쪽)"

--무슨 말인지? ㅜ.ㅜ

낙원, 그 경계의 애매모함이여...
지은이는 낙원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걸까? 난 그가 꿈꾸는 낙원이,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 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43쪽)"에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시를 지으며 좀 노는 곳"이 무성한 곳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지 노파심이 든다. 몇 몇의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시를 지으며 한 곳에서는 놀고, 한 곳에서는 인체 공학을 닮은 밭두렁에서 일하는 것이 과연 낙원이라 할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 문제는 지은이의 글쓰기가 너무 나오는데로 쓴다는 생각이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정치적 절정이었다. 조선 사대부들 중에서 아무도 조광조만큼 근본주의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45쪽)"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지은이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조광조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른체, 지은이가 말하는 말에 맹목적으로 수용을 하든가 잠시 보류를 해야 한다. 흑 아니면 백이다. 최소한 그가 어떤 인물로 지은이에게 보이는 근거를 말하지 못하고, 이런 인물이다라고 정의 내림에는 무서움마저 든다. 그는 그가 지닌 명예와 이름으로써 그의 말이 내가 하는 말과 다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터인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말을 한다.

아울러 조광조의 죽음으로 낙원의 문이 닫혔지만 조광조의 문하생 양산보가 고향으로 내려와 "또 다른 낙원을 건설(46쪽)"했다 한다. 그렇다면 양산보가 건설한 낙원은 무엇이며 조광조가 건설할려고 한 낙원은 무엇이며, 서로 동등한가 차이가 있는가? 분명한 것은 양산보가 건설한 낙원이 "소새원"이라는 것이다.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석영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불우한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46쪽)" 캬~ 얼마나 필치가 아이러니컬한가! 낙원은 낙원인데 불우하며, 지옥 속에 갇힌 낙원이니 구정 물 속의 정한수,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과 현실이 없다. 즉 현실 속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그의 모든 글쓰기는 관념에 불과하다.

내게 낙원은 느티나무 그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느티나무 옆을 지난 적이 있는가? 난 그곳에서 간혹 낙원을 본다네. 농촌에서 가장 바쁜 시기가 못자리를 만들고 모내기를 하는 때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한 시름을 놓는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일 하기 조차 힘들기에 늙으신 어른들은 다 떨어진 런닝셔츠를 입고, 그 사이로 새까맣게 탄 피부를 드러내며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서 장기며 부채질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냥 와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참으로 한가한 농촌이구나라는 짧은 감상에 젖겠지만 내 눈에는 피곤한 일상이 겹쳐져 차마 안타까움이 가슴 가득 메인다. 아들딸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에 시집장가 보내기 위해서 여름 내내 흘리는 땀방울을 스무해 이상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땀방울을 이제 잠시 여름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물이라도 들라치면 밤중에라도 일어나 삽을 하나 들고 들판으로 나가 물꼬를 튼다. 이것이 농촌의 삶이다. 이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한체, 단지 정자에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고 실낙원이라 하니, 가이 눈물 겹도록 안타깝다. 쉰이라면 지천명의 나이가 아닌가. 하늘은 진정 죽었는가?


솔직히 이 책은 몇 장 읽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정확성이 먼저라고 생각을 하는데, 지은이는 저와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아울러 너무 관념적인 냄새가 납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과학과 현실의 이름으로" 수사학을 조롱하지 마라하는 지은이의 부탁은 너무나 오만방자합니다. 그는 달나라 사람인가요? 왜 현실을 인식하지 않을려는 것인지, 그리고 저처럼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사람의 어떠한 비평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조롱"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의 글을 조롱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한한 안타까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 읽는이들에게도 안타까움을...

네게 너무 먼 일상
10여년 전에 "해적"이라는 소설을 적은 이는, 글을 쓰면서 온갖 협박을 받았다고 하던데...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삶을 이야기하려니 온갖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고 설명하는 글쓰기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인용했듯이,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라는 시인의 마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절로 저밉니다. 이는 그의 거짓없는, 관념적이지 않은 글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답답하여 숨이 막히다!

추신: 도저히 답답하여 책을 더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책 한 쪽을 넘기는데에 반 시간이 지체되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지은이의 글쓰기를 계속 읽어 갈 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외계인, 나와는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글쓰기를 수용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내가 세속에 너무 때를 묻거나 부귀영화로 명예를 쫓을 때가 아닐까합니다. 아직도 내게 정자는 거북스럽스며,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정겹습니다.

너무 아는 체를 하지 말고, 보고 느낀 그대로, 달면 달고 쓰면 쓰다고 솔직하게 글쓰기를 하였으면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마칩니다. 너무나 두서 없음은 마음이 정리 되지 않음이니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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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들매기 2004-11-0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티성 댓글이 될 듯 한데,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열린사회의적님의 평은 수필의 문학성을 너무 경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이 좋은 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누구나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향장'의 독자투고란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한 권의 책으로 펼 만한 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훈이 현실과 동떨어진 글쓰기를 한다고 단정하였는데, 274쪽에서 278쪽의 '노령산맥의 IMF'를 읽어 보셨는지요. 제가 아래에서 김훈의 글이 동시대성이 있다거나 "현대적 삶의 신산을 말하면서도 대상과의 거리감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위의 부분 등에 대한 느낌 때문입니다.

저도 김훈의 수사가 꽤 생경하지만, 그럼에도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수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230쪽에 있는 이러한 묘사를 보면 김훈이 여러 날 느릿하게 산을 보는 여행을 하였음을 보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수사이긴 하지만 사실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단지 사실을 되도록 숨기려 하기에 생경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능선은 겹겹으로 포개지면서 목측(目測)의 저편으로 소진하는데, 봉우리들의 북쪽 사면은 아직 흰 눈에 덮여 있고, 남쪽 사면은 이미 눈이 녹아서 백두대간의 능선들은 흑과 백의 경계를 따라가며 술렁거린다. 봄이 오는 산맥 속에서 그 경계는 날마다 조금씩 북쪽으로 밀려가고, 저녁마다 석양에 비낀 일몰의 설산들은 보랏빛으로 타오른다."

열린사회의적 2004-11-0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침에 님의 글을 읽고 아직까지 고민중입니다. 우선은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신 것에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글을 열어야 할까 다시한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님께서는 수필의 문학성을 너무 경신하신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든다하였고, 두번째는 현실과 동떨어진 글쓰기를 한다고 단정하였는데, 님께서는 "현대적 삶의 신산을 말하면서도 대상과의 거리감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씀을 하셧습니다. "사실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단지 사실을 되도록 숨기려 하기에 생경하게 느껴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선, 두 가지를 먼저 말씀을 드리면... 감정에 너무 치우쳐 앞부분만 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령산맥의 IMF'는 차마 아직 읽어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실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단지 사실을 되도록 숨기려 하기에 생경"하게 느껴지셨다는 점은 제가 차마 느끼지 못한 부분입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날을 새웠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차근히 마음을 잡고 읽어 보아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고 지금 저의 느낌을 여기에 변명처럼 몇 자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수필의 문학성을 너무 경시" 하지는 안는다고 생각합니다^^ 수필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현에 문체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숨기려 할 수도 있으며, 혹은 저처럼 어설플게 날을 새우는 격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말을 했듯이 아름답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아름다움이라 생각하는데... 그 표현에는 앞서서 말했듯이, 님의 말처럼 숨김으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지만 저 처럼 감정이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아름다움이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거름"에 비유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우리 아버지는 거름을 냅니다. 변소에 있는 똥을 밭에 뿌리거나 가을 걷이를 하고나서 벼짚을 그냥 둔다고 다 거름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운 열기에 싹혀야 거름이 됩니다. 된장의 진국이 끓일 수록 우러나는 것과 김장을 배추의 기운을 빼는 소금절이는 것이 모두 이와같다고 생각합니다.(무슨 소리인지^^;) 즉슨 김훈이 숨기려 하기에 생경하게 나에게 다가왔다면 그의 숨김이 아름답지 못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덜 영걸었다는 것이죠. 아울러 수필이라는 것은 문체로서 그 아름다움을 얻는 것이 아닌 삶의 진실성이라 생각을 합니다. 앞부분에 나타난 남해안의 경작지를 보면서 인체공학적 리듬을 읽어내는 그의 시선은, 솔직히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는 펜을 굴리며 이론으로 무장한 백면선생에서 나올 법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남해안의 경작지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은이가 글로써 드러낸다면 저는 감탄을 하며 수필의 아름다움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인체공학적 리듬이 남해안의 경작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억측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직 어렵고, 이러한 어려움을 외면한 이야기는 공허하며,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로 무늬를 입더라도 제게는 아직 낯설기만 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아직 읽어보지 못하여 무어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지만, 님께서 마지막에 인용한 글을 곱씹어 보는데... 조금은 생경하네요. 저의 지식이 부족함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만 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 아마도 제가 너무 사상적이거나 리얼리즘에 심취하여 원하는 모습만 보려는 듯합니다. 나름대로의 아집이 너무 짓기 때문에 쉽사리 양보하지는 않을 듯하지만... 님께서 보내주신 관심은 진심으로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참고적으로 리얼리즘에 심취한다고 했는데... 이를 간단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표현이 "'거미가 하는 일은 방직공의 일과 같고 건축가들은 거미의 집짓기를 보고 부끄러워하지만 건축가는 집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서 그것을 조립해보기 때문에 삼류 건축가라도 일류 꿀벌보다 나으며, 노동과정의 결과는 이미 노동자의 상상력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맑스의 말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상상력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고민을 첨가시킵니다. 난 김훈의 글쓰기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현실의 모순이나 삶을 외면한 행복은 크게 마음이 동動하지가 않네요.

곤들매기 2004-11-0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님이 쓰신 글에 '성의'가 없었다면 제가 댓글을 달지는 않았을리라는 것입니다.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김훈의 글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하나는 님이 비판한 어떤 사물로부터 낯선 감정을 끌어내는 부류, 둘은 노령산맥의 IMF 등처럼 삶의 신산을 간결, 건조하게 쓰는 부류, 셋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부류.



이 중 첫번째는 분명 낯선 점이 많습니다. 저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읽어보면 꽤 정성들여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하셨던,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을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의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를 예로 들면, '쑥은 이른 봄에, 아주 미약한 모습으로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이 작고 약한 것(먹이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식물과 소시민)의 존재방식이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각각의 단어는 적합한 의미로 적합한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하셨던 다른 부분, "밭들의 두렁은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체 공학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 밭들은 구불구불하다."은 '밭두렁이 직선(기하학에서만 존재할 뿐 자연에는 없습니다.)이 아닌 곡선(자연의 선)으로 되어 있으며, 이 곡선은 사람 내면의 자연스러운 리듬(춤사위에서 드러나는)을 반영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 됩니다. 인체공학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김훈의 글 중 두번째 부류는 사람의 삶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님은 이런 부분을 읽지 않고 성급하게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하셨으니, 성급한 일반화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훈의 세번째 부류는 그야말로 묘사에 해당하는 곳이라서, 구태여 사람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똥에 대해서 쓸 때, 그 외형을 잘 묘사한 것만으로도 문학적 가치는 충분하며, 꼭 거름(사람과의 관계)을 얘기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소 거친 댓글일지는 모르겠지만, 표현된 모든 것, 특히 매스미디어(이 홈페이지 역시 그렇습니다.)로 표현된 모든 것은 비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례를 무릅쓰고 댓글을 남깁니다.

열린사회의적 2004-11-1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답글을 적는다는게...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님께서는 김훈의 문체를 좋게 보시는 듯하였습니다. 완벽하게라는 말을 쓸 정도로 김훈의 문체를 좋게, 하지만 저는 문체보다는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볼려고 합니다. 물론 님께서 내용의 진실성을 보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보는 방법에 조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솔직히 저는 문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훈이라는 이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한다면, 공기만 마시고 풍경을 이야기 하지 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냄새를 이야기 해 주었으면...



분명 김훈의 문체는 낯섭니다. 그것이 제 눈에는 옳다 그르다 보다는 진실성이 없게 비쳐졌다는 것입니다. 쑥에서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읽어내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조금 오만한가요^^) 하지만 왜 낯선 시간의 최전선인가를 눈을 바닥에 낯추고 귀를 기울이고 글쓰기를 하였는가라는 점입니다. 밭들의 두렁에서 인체공학적 리듬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 부터는 생각이 기울어집니다. 님께서는 사람 내면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그리시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자연스레 나온 감상이시진요? 어느 책을 통하거나 t.v를 보고 남은 잔상이 겹쳐지지 않았나요? 인체공학적 리듬이 낯설기에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은 제 삶을 통해 밭두렁을 보았을 때, 그런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나에게 관념적인 글쓰기로 비쳐질까요?



님께서는 "사람의 삶이 너무도 잘 드런 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 판단은 관념적인 글쓰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글을 잘 적는다는 것은 문체를 아름답게만 꾸미는 것이 아님을 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정말로 님의 글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제 글쓰기가 분명 낯쓴 글쓰기이기에 몇 몇의 방문객이 있는줄 압니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글을 비판하는 것은 속이 후련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시선이기에 감탄을 자아낼 수가 있지만 "나에게"도 이런 비판이 가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지요. 그 조심스러움의 표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것이고- 하지만 글쓰기는 이렇게 해도 가슴에는 연탄 한 장이 타고 있는데.... -조용히 스쳐지나간다고 생각됩니다. 소리소문 없음에 늘 가슴시렸는데, 님께서 똑똑 문을 두드려 주시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몇 번이고 글을 읽으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곰곰히 글을 되십으면서 내린 결론이, 님께서는 김훈의 문체를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앞서서 말한 텍스트에 갇히지 않았나 생각을 했는데.. 님께서는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텍스트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그려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보고 배워야 부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님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듯합니다. 님께서는 김훈의 글쓰기에 사람의 삶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는 부분에는 고개가 가우뚱그려지며, 내가 본 그의 글쓰기는 관념을 넘지 못한 현실이라 생각을 합니다.



님께서 쓰신 댓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미디어는 마사지다
마샬 맥루한.꽹땡 피오르 지음, 김진홍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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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너무 길다.          <르나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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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맛사지다는 넘 어렵다                 <열린사회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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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여자와 남자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어릴 때 손이 트지 하기 않기 위해, 손등에 화장품을 바른 것 이외에는 아직 화장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내게 지은이는 "남자도 화장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은이에 대한 명성을 어깨 너머로 앎음앎을 인지 해 온 터이고, 출판사도 내가 나쁘게 보지 않는터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책을 오늘에서야 읽었습니다.

여성의 세기가 온다.
"나는 이 책에서 여성의 세기가 왜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가,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그렇다면 그 새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분석(5쪽)"을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세기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다. 자칫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뭔가 다른 분석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아울러 그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그리며, 우리에게 준비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세기"에 대한 확신이 자칫 환상으로 보여지는 듯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우려 보았습니다. 지은이는 분명 "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여성의 세기" 도래설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분석이라는 정의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전공은 사회생물학으로, 처음 그가 발을 들여놓는 시기에는 페니미스트들에게 혼되게 당한 듯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페니미스트에 대한 경계와 사회생물학에 대한 옹호가 간혹 보입니다. "유전자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사회생물학자는 유전과 환경 모두를 본다(8쪽)" 즉 그가 말하는 생물학적 분석은 사회생물학 개념이며, 사회생물학은 유전자의 중요성도 인지하지만 환경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지은이는 "유전자 + 환경"을 통해 여성의 세기가 옮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4가지 시선
이러한 논증은 우선 괄목할 만 한 성장을 듣어보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금녀 구역으로 닫힌 공간이 서서히 붕괴되며, 몇 몇의 여성들이 수석을 하며 여성의 자리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여성시대가 그리 멀리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심어줍니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환상은 남성 못지 않은 우월성이 있다는 극단적 대치로 나아갑니다. "x염색체들처럼 서로 바람막이를 해줄 수 있는 유전자 짝이 없다 보니 남성들은 색맹이나 혈우병 등 각종 유전적 장애에 훨씬 더 많이 시달린다. 남성이 어쩌다 이렇게 '쭉정이' 염색체를 갖게 되엇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현대 진화생물학자들은 유전자들간의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63쪽)"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를 비교하면서, "여성의 투자는 이처럼 매 단계에서 엄청나게 신중하다. 값싼 정자를 가능하면 많이 생산해 보다 여러 곳에 투자하려는 남성의 전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68쪽)" 언어적인 문제에 대해서,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언어감각이 월등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태여 과학적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으리라(77쪽)" 앞에서 보듯이 그의 논의는 이분법 구조로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정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러한 우월성은 당연히 여성의 세기가 도래할 증거로써 차용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1980년 대에 한창 민주화의 열망이 불꽃같이 타오르던 시기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내가 이 세상에서 직접 만나본 사람 중에서 그처럼 명석한 사람은 없었다(46쪽)"라고 회고하는 우월감(그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윌슨 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르원틴 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민벌레 연구를 통해 "졸지에 내가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된 것이다(56쪽)"라는 자부심. 이국 땅에서 임신을 하여,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 "금값에 가까울 정도로 비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스턴 시내를 죄다 뒤져도 도무지 구 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 특별주문을 한 뒤 들어왔다는 통보를 받기만 하면 번개같이 달려가 싹쓸이를 하곤 했다. 배를 사러 뉴욕의 한인 가게들로 왕복 10시간 차를 몰기도 몇 차례씩(133쪽)" 한 그는 지극히 가정적이며 애처가이다.

세번째,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지는 부분입니다. 지은이는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사회생물학"을 통해 여성의 세기가 도래함을 풀어간다고... 하지만  즉 그는 여성시대가 옴을 무엇으로 관찰하는가 하면 동물들을 보며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물들의 이러한 변화가 세기의 변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년 전 부터 있어왔는데, 지금에서야 이야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과연 동물들의 행동을 보고 사람, 그 중에서도 절반인 여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나요? 확신하고 계신다면 참으로 순진하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천둥이 치면 소나기가 오고 방귀가 잦으면 뒷간을 가고 싶은 것은 절대명제이지만 몇 백 년 동안 쌓여온 동물의 행동을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여성시대가 오고 있음의 증거입니다"라고 던지는 화두는 온당하지 못합니다. 동물을 통해 여성의 시대가 도래함을 논증함에 있어서, 그의 글쓰기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일방적 글쓰기가 이루어집니다.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은 언어 문제에 대한 천착이 없이는 철학적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언어가 인식의 수단인 동시에 인식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짓는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84쪽)"이라는 점을 인지하며서도 교묘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씩의 글쓰기를 합니다. "세번째"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회생물학"을 통해 여성의 세기를 말한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익숙함에 낯설음입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역할 분담이나 여성 우위에 있는 관점만 가지고 와서 필요한 부분에 반창고 붙이 듯 붙이고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벤치마킹이나 타산비석을 말함이라면, 벌써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질 징조가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연계에 대한 환상과는 반대로, 여성의 세기가 옮을 앞서서 말했듯이 금녀의 구역에 여자들이 입성한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과연 금녀의 구역이 지니는 의미가 "성역할의 분담 혹은 파괴"일까요? 여기에는 많은 관점의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남성 권력 집단에 소수의 여성 권력 집단이 들어갔다는 의미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말에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수의 지적 여성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 금녀의 벽을 넘었다는 것은 쉽게 모둠에 동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여성 몇 몇이 금녀의 벽을 허문 이유와 자연계의 동물들이 지니는 행동간에 어떠한 유사점이나 비교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안없는 글쓰기, 누구를 위함인가?
이런 추론적인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은, 대안없는 글쓰기를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은이는 "호주제는 생물학적 모순"이라는 소주제에서 호주제 폐지를 찬성합니다. 하지만 대안은 없습니다. 아울러 한 마디 덧 붙이자면 페미니스트나 호주제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나 호주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이 있겠지만 저는 가방끈이 짧아서인지 과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호주제가 한국에서 지니는 당위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도 이해하지 못함은 마찬가지인데, 지은이는 무조건 좋지 않으니 내 말을 듣으라 하는 듯합니다. "언어가 인식의 수단인 인식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짓는 수단"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왜 외면했을까요?

이런 점은 의도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밖에 보여지지가 않습니다. 언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진 지은이는 간간히, 자기 자랑을 엮어 가면서-(46/56/133쪽), "겨우 열네 살이 된 우리 꼬마는 어려서 우리가 읽어준 그림책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적어도 몇천 권의 책을 읽었다(185쪽)"-그의 논의를 합리화-여성의 거짓말이 언어감각의 우월성 드러내는 기준(77쪽)-한다. 또한 자기 기준적 글쓰기-내가 하면 연애도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씩의 논의, "우리는 가끔 평생 동안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노부부를 본다(59쪽)" 하지만 그는 부부싸움을 쫌 해서인지 "부부싸움의 정의를 달리"내린다. "두루 자연계를 둘러봐도 새끼를 돌보는 것은 대개 암컷이다(151쪽)"라는 정의는 "자연계에도 암수가 함께 자식을 키우는 동물들이 있다(156쪽)"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한다.  의도적을 남성 혹은 수컷을 비하하기 위한 글쓰기-"골 빈 수컷(57쪽)", "'쭉정이' 염색체(63쪽)", (반복해서)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를 비교하면서 "여성의 투자는 이처럼 매 단계에서 엄청나게 신중하다. 값싼 정자를 가능하면 많이 생산해 보다 여러 곳에 투자하려는 남성의 전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68쪽)"등은 솔직히 보기에 흉하다.

뫼 높은 자리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다 보았다 한다.
이 책은 어렵지도 않습니다. 회사를 갔다와서 저녁 시간에 다 읽었습니다. 편집이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빈 쪽 수가 몇 몇 넘어가고, 아름다움 그림이 텍스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마 이 모든 편집의 깔끔함에 불구하고 지은이의 글쓰기는 읽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좀 더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하나요? 그는 이미 여성의 세기가 온다는 마르크스적 환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의 논의는 깊이가 없습니다. 언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지닌 그가, 사회생물학적 징조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동물학적 생태를 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아쉬움만 보였습니다. 더욱이 불편한 것은 그의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 나만 옳다는 글쓰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심심할까봐 나오는 자기 자랑은 차마 지우고 싶은 장면입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 아닌, 니가 우리를 억압했으니 이제는 니가 당해바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씩의 투쟁이 과연 여성의 세기에 필요한가라는 점이 듭니다.

그리고 상아탑에 머물러 계시지 마시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서 현실을 직시하시길 바랍니다. 몇 몇의 고지식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였다 하여 여성의 세기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세기, 여성이 지니는 의미를 재설정하여,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몇 몇의 동물을 관찰하고, 현실을 무시한체 여성의 세기아 온다느니, "우리 교육이 그 동안 지나치게 주입식이었으며 경쟁만을 강조하여 흥미를 유발하는데 실패한 것은 사실(178쪽)"이라면서 서울대가 지니는 특권은 교묘히 숨기는 술책은 보기에 정말 부끄러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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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온단다. 내가 스물여덟해를 기다리는 비는 아니오고, 애궂은 비가 와서 내 앞길을 막을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비가 오면 난, 강물이 넘치더라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내 가슴과 마음을 적시는 비가 그립다. 전생(前生)에서 우리는 그렇게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어디가서 무얼하며, 얼마만큼의 고생을 하고 있을런지...

비가 온다는데, 옷은 젖지 않을런지..

 

창밖에 흩날리는 비가 오늘따라 애꿎다. 오라는 비는 안오고...씨~~ 오지 마라는 비는 억지로 온다.

                           

추신 : 혹시라도 우리가 전생에 단란하게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메일 주세요~~

. .           총각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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