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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을 잘못 들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그 소문만으로 자자하다. 익히 듣은 이야기이지만 읽지 않으니, 알 수가 없어 다른 여러 선입관을 지워버리고 책 읽기를 하였다. 하지만 난 끝내 이 책의 반을 펼치지 못하고, 서투른 서평을 할려고 머리를 정리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글이라는 것은,
아침 내 오는 이 없어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면 운다
고 인용하는 충지의 시처럼 자연스런 울림이 있어야 한다. 지은이도 분명히 이를 인지하고, "이 그리움은 설명적 언어의 탈을 쓰고 있지 않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렇다. 정말 아름다움은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보는 이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굳이 아름다움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의 시에 설명적 언어의 탈을 쓰지 않음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절실히 묻어나는 진한 삶의 회한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은이의 글쓰기는 이미 그가 느끼고 방어벽을 치듯이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는 나와 같은 어쭙다는 글쟁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려고,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라고 푸념한다. 나는 처절한 현실인식에 의한 정(情)겨운 글쓰기에 대한 동경을 갈구하지, 어설픈 현실논리로 그의 수사학을 조롱할 생각을 손톱만큼도 없음을 알립니다.
남해안 경작에서 쑥의 슬픔과 평화까지...
지은이는 남해안 경작지에서 느끼는 감정을 "밭들의 두렁은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체 공학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 밭들은 구불구불하다"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하지만 인체 공학의 리듬을 상상할 수 없는 내게 그의 수사학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밭두렁은 먹고 살기 위해, 한뙤기의 땅이라도 더 건지려는 억츠러움에 나온 피와 땀이지 무슨 인체 공학인지 리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본 밭두렁은 콩이며 깨를 심기 위해 여름내내 돌을 가려내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구부러진 허리가 겹쳐져 보일뿐입니다.
아울러 대책없이 3000포로 빠지는 글쓰기도 낯설기만 하다. 남해안의 경작지의 보리 이야기는 자연스레 냉이국, 달래, 쑥, 미나리에 대한 자유분방한 찬사와 악평으로 이어간다. 물론 아내 작은 제목을 달아 두었지만 난 이 글이 기행문인지 설명문이지 헷갈린다.
"쑥은 넟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을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의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38쪽)'
쑥=낯선 시간의 최전선, 겨우 존재함,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
시적인 미문도 아닌 이상, 위에 나타내는 말이 무엇인지 좀 더 쉽게 글쓰기를 함이 옳지 않을까? 내가 보는 쑥은 봄처녀 설레는 마음으로 논두렁밭두렁에 나가, 과일 깍는 칼로 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시로 다 나가버린 농촌은 우리의 어머니가 서울간 아들이나 딸이 오면 쑥국을 끌이기 위해 혹은 소도시에 사는 주부들이 소일 삼아 케는 일상뿐이다. 그것을 보면서 시간의 최전선이니 겨우 존재한다는 의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아울러 지은이가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면 혼자 무슨 꿈을 꾼 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 좀 더 자세히 풀어 "아, 하~'라며 동요 의식을 불러 일으킴이 옳지 않을까...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차라리 강아지 똥을 보고 이러다면 휠씬 더 이해가 쉬울텐데... 지은이는 무슨 연유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렵다...
"쑥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39쪽)"
--무슨 말인지? ㅜ.ㅜ
낙원, 그 경계의 애매모함이여...
지은이는 낙원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걸까? 난 그가 꿈꾸는 낙원이,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 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43쪽)"에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시를 지으며 좀 노는 곳"이 무성한 곳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지 노파심이 든다. 몇 몇의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시를 지으며 한 곳에서는 놀고, 한 곳에서는 인체 공학을 닮은 밭두렁에서 일하는 것이 과연 낙원이라 할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 문제는 지은이의 글쓰기가 너무 나오는데로 쓴다는 생각이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정치적 절정이었다. 조선 사대부들 중에서 아무도 조광조만큼 근본주의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45쪽)"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지은이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조광조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른체, 지은이가 말하는 말에 맹목적으로 수용을 하든가 잠시 보류를 해야 한다. 흑 아니면 백이다. 최소한 그가 어떤 인물로 지은이에게 보이는 근거를 말하지 못하고, 이런 인물이다라고 정의 내림에는 무서움마저 든다. 그는 그가 지닌 명예와 이름으로써 그의 말이 내가 하는 말과 다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터인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말을 한다.
아울러 조광조의 죽음으로 낙원의 문이 닫혔지만 조광조의 문하생 양산보가 고향으로 내려와 "또 다른 낙원을 건설(46쪽)"했다 한다. 그렇다면 양산보가 건설한 낙원은 무엇이며 조광조가 건설할려고 한 낙원은 무엇이며, 서로 동등한가 차이가 있는가? 분명한 것은 양산보가 건설한 낙원이 "소새원"이라는 것이다.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석영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불우한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46쪽)" 캬~ 얼마나 필치가 아이러니컬한가! 낙원은 낙원인데 불우하며, 지옥 속에 갇힌 낙원이니 구정 물 속의 정한수,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과 현실이 없다. 즉 현실 속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그의 모든 글쓰기는 관념에 불과하다.
내게 낙원은 느티나무 그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느티나무 옆을 지난 적이 있는가? 난 그곳에서 간혹 낙원을 본다네. 농촌에서 가장 바쁜 시기가 못자리를 만들고 모내기를 하는 때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한 시름을 놓는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일 하기 조차 힘들기에 늙으신 어른들은 다 떨어진 런닝셔츠를 입고, 그 사이로 새까맣게 탄 피부를 드러내며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서 장기며 부채질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냥 와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참으로 한가한 농촌이구나라는 짧은 감상에 젖겠지만 내 눈에는 피곤한 일상이 겹쳐져 차마 안타까움이 가슴 가득 메인다. 아들딸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에 시집장가 보내기 위해서 여름 내내 흘리는 땀방울을 스무해 이상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땀방울을 이제 잠시 여름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물이라도 들라치면 밤중에라도 일어나 삽을 하나 들고 들판으로 나가 물꼬를 튼다. 이것이 농촌의 삶이다. 이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한체, 단지 정자에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고 실낙원이라 하니, 가이 눈물 겹도록 안타깝다. 쉰이라면 지천명의 나이가 아닌가. 하늘은 진정 죽었는가?
솔직히 이 책은 몇 장 읽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정확성이 먼저라고 생각을 하는데, 지은이는 저와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아울러 너무 관념적인 냄새가 납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과학과 현실의 이름으로" 수사학을 조롱하지 마라하는 지은이의 부탁은 너무나 오만방자합니다. 그는 달나라 사람인가요? 왜 현실을 인식하지 않을려는 것인지, 그리고 저처럼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사람의 어떠한 비평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조롱"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의 글을 조롱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한한 안타까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 읽는이들에게도 안타까움을...
네게 너무 먼 일상
10여년 전에 "해적"이라는 소설을 적은 이는, 글을 쓰면서 온갖 협박을 받았다고 하던데...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삶을 이야기하려니 온갖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고 설명하는 글쓰기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인용했듯이,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라는 시인의 마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절로 저밉니다. 이는 그의 거짓없는, 관념적이지 않은 글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답답하여 숨이 막히다!
추신: 도저히 답답하여 책을 더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책 한 쪽을 넘기는데에 반 시간이 지체되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지은이의 글쓰기를 계속 읽어 갈 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외계인, 나와는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글쓰기를 수용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내가 세속에 너무 때를 묻거나 부귀영화로 명예를 쫓을 때가 아닐까합니다. 아직도 내게 정자는 거북스럽스며,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정겹습니다.
너무 아는 체를 하지 말고, 보고 느낀 그대로, 달면 달고 쓰면 쓰다고 솔직하게 글쓰기를 하였으면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마칩니다. 너무나 두서 없음은 마음이 정리 되지 않음이니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