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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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황진이의 삶이 지은이의 상상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묻혀진 삶에 대한 진지한 복원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더욱이 지족선사나 벽계수를 홀린 여우로 비하했다면 … 수백년 앞서 살다가 사람을 복원한다는 것은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지은이의 노고를 밤하늘 은하수를 새기듯이 마음에 새기며 책읽기를 시작한다.

그의 삶은 나의 삶보다 더 고단한 삶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외로움, 새끼할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숙부의 비겁한 인상은 스스로를 가두게 하는 세계관인 것이다. 하지만 외숙부처럼, 어머니처럼 안주하지 않고 누리를 품으려 나아갔으며, 시기를 잘못 만난 새잎처럼 혹독한 북풍에 시달려야했다. 봄을 향한 그의 믿음 만큼은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스물의 청초함은 사라졌으나 삶의 곡진함과 변화무쌍함이 손끝에 저절로 묻어(225쪽)”는 황진이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에 대한 탐색은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정하는 것이 좋다. 지은이는 그가 다녀간 길을 따라가며, 흔적만 주워 모우고 있다. 험난한 세상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한 삶은 살아가는 황진이는 어쩌면 펜대에서 나오지가 않고 삶의 연륜에서 나오지 않을까?

이는, 책을 읽는 부분이 간간히 드러난다. 그가 너무 조숙한 인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외숙부에 의해 수많은 서책을 통해 읽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무슨 연유로 기생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서, 사내의 바지저고리를 평생 옥 쬔다고 아궁이에 던져넣는다(112쪽)와 이생과 두류에 올라서 느끼는 회포(212쪽)는 신비화하는 일화로 머무를 우려가 있다. 고뇌에 대한 삶의 성찰이 없으니, 어릴 때부터 읽었다는 서책이 그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짐작은 한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삶의 구현하지 않기에 왜 기생이 되었는가와 기생으로서의 느끼는 삶에 대한 회한, 그로인한 천하유수(周遊天下)등의 인과성이 나오지가 않는다. 어릴 때에 책을 많이 읽었기에 남보다 월등하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를 옥죄는 환경과 그의 사념을 통한 자아발견을 진국하게 끓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설익음에 대한 아쉬움은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세상의 모순을 가슴 아파하며, 초월하려는 이가 “압록강 너머 드넓은 고구려의 옛 땅과 산해관을 지나 중원까지 다녀온 거상들에게서 참 인간의 풍모(126쪽)”를 엿보면서 거액의 돈까지 챙긴다는 것은 두억시니를 닮은 욕심쟁이로만 보인다. 아울러 세상에 대한 울분이 들어서기 전에 풍류에 빠진 기생만 보인다.(158~162쪽) 이는 이사종를 말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170쪽). 그와 어울려 즐겁게 놀았다는 것은, 그와 동일화 되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 묻힌 한정된 사료 때문인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띄엄띄엄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안목에 의한 옮겨쓰기(중요순으로)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좀 더 살을 붙여야 할 것이다. 군데 군데 끊기는 이야기는 문체에 의해 미화 될 수 있어도, 삶에 의한 탐구는 숨기지 못한다.

지은이의 황진이에 대한 성찰은 남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지은이가 표현하는 황진이는 거름종이에 걸려진 체 나온다. 온갖 고뇌와 성찰은 지은이의 몫이며, 우리가 읽는 것은 고뇌 다음에 따르는 그의 일화일 뿐이다. 즉 얼마만큼의 고뇌가 황진이의 삶이 머물렀는가에 대한 탐색은 좋을지 몰라도, 험난한 세상을 지존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자기를 투영하고 싶다면 잠시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는 지은이에게 사적으로 묻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지은이의 황진이에 대한 성찰과 문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만큼은 내가 닮고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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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 창비아동문고 166
이상권 지음, 정수영 그림 / 창비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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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골에서 스무해를 넘게 자란 나이지만 이 책을 보면서 세상 풀꽃의 이름을 새긴다.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아이가 동네에서 뛰어놀다가 다쳤다고 몸에 알맞은 풀꽃을 찾아서 치료해줄 여력은 없었다. 손에 딱지가 안고나서 시간이 지나면 아물 듯이, 자연치유에 몸을 맞길 뿐 이였다. 이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긴 만큼, 내 아이가 뛰어 놀다가 다치면 다시 책을 펼치고서는 지은이가 들려주는 대로 정성스레 약을 다리듯이 치료해 주리라고 속으로 다짐을 한다.

정말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26여일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담겨져 있어 여유가 없어 보인다.(책은 1,2부를 통해 두 번의 여름방학이 끼여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하루에 하나씩 사고를 쳐야만 하고, 그때에는 할머니나 큰어머님 등이 나타나셔셔, 무엇이 문제인고 묻는 산신령처럼 좋은 해답을 던져준다. 즉 책을 읽다가 보면, 삶 속에 들풀들이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이 아니라, 들풀의 효능을 알리기 위해 주인공의 삶을 억지로 집어 넣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곳곳에 들어있는 삽화는, 박재동씨가 오세영씨를 보고 소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 이 책을 보면 그 말의 위대함을 실감할 것이다. 지은이는 책상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머리로 그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최소한 농촌에 가서 실물을 보고 그렸으면 하는… 이런 바람은 지은이의 글쓰기에도 나타난다. 엉성한 사투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서울 사람들의 녹녹치 못한 사투리를 닮았다. 초등학생은 사투리를 쓰는데 반하여 할머니는 표준어나 “~해요”체를 쓴다는 것도 이상하다.

너무나 좋은 취지에 의해 글쓰기였지만 부분적으로 보이는 2%부족함이 읽기에 너무 힘들다. 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읽는다면 한쪽 눈을 감고 읽기를 바란다. 지은이가 들려주는 들풀에 대한 이야기에만…

아이들의 눈높이를 너무 낮게 잡거나, 아이들이 볼 책이기에라는 마음으로 혹시라도 글을 적는 사람들이 있다면… 잉크를 묻지 않길 바란다. 어른들은 최소한의 시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자연빛을 닮아 자연이 뿌려주는 빛을 그대로 흡수한다. 자칫 엉성한 글쓰기가 어린아이들에게 한 세상 만 보게 할까 두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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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
존 라이언 지음, 이상훈 옮김 / 그물코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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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 시절은 항상 춥고 배고팠지만 웃음이 곁들여 있었다. 그것은 슬픔 속에 눈물이 묻어나 듯, 둘은 붙어 다녔다. 특히 추운 겨울이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작은 뫼아래 자리잡은 궁핍한 시골 마을들은 하나같이 잘나고 못난 사람이 없이 낮게 드리운 지붕마냥 그렇게 살아가곤 했다. 먹을 것이 없기에, 밭에 심어 둔 홍당무를 뽑아 먹거나 가을날 캐낸 고구마를 꺼내 부뚜막에 앉아 구워먹곤 했다. 조금 배가 채워지면 썰매를 들고 마을 앞에 펼쳐진 저수지로 향한다. 계속되는 추위에 저수지는 얼어 붙어 있었으며, 하루 종일 썰매를 타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두껍게 얼어 있었다. 어른들은 누구네 아들딸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걱정이 되어, 그곳에서 썰매를 타지 말라고 호통을 치신다. 이런 일은 내 유년시절의 일상사였다. 고구마 하나로 배를 채우고도 부족함을 몰랐으며 난방이 되는 어떠한 시설이 없더라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한데에서 놀다가 덜 얼은 얼음에 빠져서 집에라도 들어오면 부모님은 군불을 떼어 방을 뜨겁게(?) 데워 놓으셨다.

한해를 보내고 나면 서른을 바라보는 나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핑계로 친구집에 있다가 주말이면 시골집으로 올라간다. 어린 시절, 30여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집까지는 매서운 바람은 얼음나라에서 나를 잡으로 온 무엇인 냥 매섭기만 했다. 손이 트서 등에서는 피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차에 의지하여 5분이면 집에 까지 닿는다. 아울러 저수지는 더 이상 얼지도 않을 뿐더러, 갈수록 찾아드는 고니나 청둥오리의 무리는 줄어들기만 한다.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뛰어놀던 내 유년시절의 모습을 어린아이에서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그들은 뛰어 놀면서 추위를 이기는 것이 아닌 문명의 기계로 추위를 이기는 편리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시골 마다, 군불을 놓던 자리에는 보일러가 들어가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간 상태이다. 어쩌면 내가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갈 때 부터 이런 일이 예견 되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문명의 이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꿀바른 사탕 같아서, 나름나름 먹는 사이에 이가 섞듯 우리의 환경도 오염되어 간다는 기우 때문이다. 더구나 자연에 대한 공존이 아닌 '정복'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현재에, 더불어 살기를 바라는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다. 지은이는 자전거, 콘돔, 선풍기 등등으로 지구를 지키자 한다. 하지만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 조차 너무나 낯설게 다가오기만 한다.

책을 읽으가면서 이런 물건들로 지구를 지킴에 동참하자는 호소는 100% 공감을 하지만 시선이 조금 엇나가 많은 아쉬움을 가진다.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지은이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즉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국민들이 조금 덜 누린다면 지구의 환경을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대신에 자전거를, 대책없는 성관계 대신에 콘돔을, 에어컨 대신에 선풍기를, 빨래 건조기 대신에 빨랫줄 등등을 표현한다. 지은이가 말하는 것은 친환경적인 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한 진지한 사색이 아닌,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에서 차선의 무엇을 찾고자 하는 실험이라는 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누리는 것을 180도로 바꾼다는 것은 억측이 있을 수가 있겠지만, 이러한 사고는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내 이견이 자칫 망상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내세우면서 현실에 만족하는 자기합리화일지라도 지은이의 사색은 조금 엉성하다. 다만 그가 내세우는 실천적인 운동은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공기가 항상 우리 곁에 있기에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른다. 무작정 지구를 지키자고 말하지 말고, 자연체험을 통해 느끼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공기가 없는 곳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백배 낳다고 생각한다. 내가 환경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내 유년시절의 추억에 의한 회귀본능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우러진 것이라…

아울러 지은이의 표현대로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보고, 환경 지킴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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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일은 재미있나? - 하룻밤 만에 인생을 180도 바꾸는 변화의 메시지
데일 도튼 지음, 손원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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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우리가 추구해야할 근본적인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내용이 실린 작품이라도 재미가 없다면 읽지 않겠죠. 그렇다면 그 책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의 목표도 좀 더 낳은 효율이라고 볼 때에, 일이 재미가 있어야 효율이 오른다고 생각을 합니다.

즉, 무릇 모든 효율성은 '재미'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지은이가 말하듯이, 호손효과(112쪽)에 처럼 우연의 복합적인 산물이 일의 능률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좀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고, 회사 간부나 연구자에게도 스스럼없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117쪽)'를 할 수 있기에 능률이 오른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은 유치합니다! 그 유치함은 나에게 고역일뿐입니다. 이렇게 고역인 책을, 어떻게 읽을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표중독증(48쪽)에 걸린 나는 서평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서평을 써야 한다는 목표가 이 책의 재미를 조금 살렸을 뿐이지, 다양한 실험' 때문은 아니랍니다.

아래에는 그의 책에 대한 나의 서평입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그는 자꾸 실험을 하라고 권하기만 합니다. 우선은 목표를 정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실험을, 두번째는 회사를 들어가거나 사업을 차렸다면 안주하지 말고 다시 실험을 하라는 것이다. 즉 실험을 통한 다양한 변화를 꽤 함을 나타냅니다. 실험이 실험으로 끝나면...? 실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지 제자리에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마나입니다.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에 대한 성찰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아울러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 다양한 실험이, ‘목표지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근시안적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무릎이 깨어지면서도 장농이나 문고리를 잡고 일어나려는 실험을 합니다.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양한 실험이죠. 그치만 어린아이는 그냥 일어나려는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을 외면하는 듯합니다. 걷기 위한 목표지향점이 있는 것이죠. 한 곳에 안주하지 마라는 표현을 찾기가 힘든지, 실험과 목표지향을 나누어 말을 하다보니 뭔가 새로운 듯하게 보이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어설프 보입니다.

둘째, 우연찮게 코카콜라나 리바이스가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들의 비율이 얼마인가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팔백만 분의 1로 한명이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모두에게 복권을 사라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연에 의해 성공한 사람이 있다하여 일반화하는 것은 단순 논리입니다. 얼마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우연으로, 그리고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표중독증 환자'들과의 통계를 통해 누가 더 높은 자리(성공, 돈을 많이 벌었나)에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실질적인 자료를 첨부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을 것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성 구성을 통해 몇 명을 끌고 와서 전부인 냥 말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셋째, 출판사의 책 편집에 상당한 실망감을 느낍니다. 세종서적은 꽤나 좋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데, 요즘은 돈에 눈이 멀었다는 생각을 지녀봅니다. 양장본의 편집, 스무여덟 바닥의 빈공간 넣기, 큼직한 활자?(19가로 * 24세로)...

즉 지은이는 요지는 상당히 단순하며, 그렇기 때문에 원론에 머물렀습니다.

'꾸준한 실험은 한 지점의 목표가 아니라 목표 그 이상을 나타낸다. 아울러 어떠한 위험 상황에서도 기회를 만들어 내는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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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2007-05-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인생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실험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가치는 소멸됩니다. 유일하게 의미있는 가치 평가자인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모든 실험에는 목적(목표)이 있다는 님의 말씀이 저에겐 더 유치하게 들립니다.
 
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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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모든 강물을 포용하며 어떠한 풍랑에도 거친 숨소리를 쉬지 않는다. 하늘은 높은 곳을 지향하며 모든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싼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다. 그 분은 예순이 된 아들이 집을 나갈때 여든 먹은 노파가 문 밖에 까지 나와서 '애야 길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님들이시다. 어머님의 사랑이 바다와 하늘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내 어머니이 아닌 우리의 어머님을 만나다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어머님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누리는 더 풍요롭게 행복한 웃음소리가 펴질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내 어머니만이 존재한다. 내 어머니는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만이 자식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자기 자삭을 헤치거나 방해하려는 대상을 파악하여, 항상 우위에 서도록 경쟁심만 부추긴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맹목적인 요구에 길들여지며, 어릴적 동무는 나이가 들면 적대적 경쟁 상대가 된다. 어릴 적에 해맑게 뛰어놀던 수많은 동무들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릴적 수 많은 동무들이 그리운 사람은 엠마뉘엘 수녀가 들려주는 고언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지은이는 물질적 문명이 가져다 주는 인간 소외에 대해 충고를 하며, 더불어 사는 인류를 위해 몸소 행동하며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풍요로운 가난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몸서리치게도 싫은 것이 가난이 아닐까? 그런 가난이 어떻게 풍요로움을 동반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런 나의 마음은 고스란히 지은이의 고뇌이다.(24쪽)

지구상은 풍요로운 우주가 아니다. 지은이가 보기에는 엄청난 모순 덩어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30쪽, 31쪽, 37쪽, 38쪽) 이러한 가난을 누군가가 조장하고 있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지은이는 '이해하기(52쪽~ 70쪽)'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야에 대해, 수녀님으로서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섯부른 판단은 빙산의 일각이였을 뿐이다.

엠마누엘 수녀는 '한 어린아이가 자기 입에서 사탕을 꺼내더니 아빠 입에서 집어넣고는 유리창이 떨릴 정도로 깔깔거린다(121쪽)'를 묘사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잊던 자화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때 동안 우리들은 남들보다 하나 더 가지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기며 쫓아왔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자기 것을 나누고 기쁨을 얻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눈을 통하여 누리를 이야기하는 지은이는 낯설은 수녀님이 아니라 내 머리맡을 무릎이 안히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이다.

진정 풍요로운 가난의 낯설음에서 난 ,책을 덮을 때에는 그 이상향의 실현을 꿈꾼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이라도 '희망(102쪽)'을 버리지 않는 할머니의 자상함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행복의 사다리(142쪽)'는 지은이의 가치관을 일목요연(一目了然) 표현한 부분이다. 아울러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지표로 삼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꿈꾼다. 내 어머니과 우리의 어머님이 되기를... 그리고 큰바위 얼굴을 마냥 기다리는 어니스트처럼, 아직도 자기가 큰바위가 되기를 주저하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되기를 비손한다.

추신: 이 책은 너무나 많은 질 좋은 양을 담고 있다. 하나씩 메모(정리)를 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마음으로 새기고 행동을 새기지 못한다면, 읽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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