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 [1799.5.20~1850.8.18]
프랑스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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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루아르강 유역의 도시 투르에서 출생. 원래의 성은 Balssa이지만, 아버지 때부터 귀족처럼 드 발자크라 참칭하였다. 어머니는 파리의 상인 집안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농민 출신이었는데, 프랑스혁명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관리로 출세하였으며, 투르는 그 임지였다. 발자크가 학령에 이르렀을 때는 나폴레옹이 전유럽에 군림하던 무렵이었다. 그가 16세 무렵에는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낭만주의 시대는 시인 ․소설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발자크도 나폴레옹의 대단한 숭배자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도처에 황제의 이름이 나온다. 그에게 있어서 나폴레옹은 유럽 통일의 위대한 조직자였으며, 나폴레옹이 칼로써 이룩하지 못한 것을 펜으로 이룩하겠다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17세 되던 해 가을부터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소르본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변호사와 공증인 사무소에서 법률실무를 3년간 배웠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문학자가 되는 것이었으며, 졸업 직전에 대학을 중퇴, 바스티유 광장에 가까운 초라한 변두리 다락방에 틀어박혀 습작생활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크롬웰》이라는 제목의 5막 운문 비극을 지었지만, 주변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소설로 전환한 그는 적어도 10편의 장편을 쓰고, 또 변변찮은 신문에 잡문을 써서 투고하였다. 또한 인쇄 ․출판 ․활자주조에도 손을 대었으나 크게 실패하였다. 이러한 역경에도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 준 사람은 20여 세나 연상인 헌신적인 애인 베르니 부인이었다. 소설 《골짜기의 백합》(1835)은 그와 같은 애정의 기념비로 쓴 작품이다. 베르니 부인이 죽은 후로는 폴란드의 귀족 한스카 부인이 발자크의 남은 반생을 지배하였으며, 그는 죽기 직전에 그녀와 결혼하였다.
1829년에 소설 《올빼미당원》과 《결혼의 생리학》으로 문단에 첫 걸음을 내디딘 직후에 옛 왕정이 무너지고 부르주아지가 지지하는 민주적 왕정(7월왕정)이 들어섰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귀족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승리였으며, 1830년의 7월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제패였다. 이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상승기였으며, 정권이 귀족의 손을 떠나 금융자본의 수중에 들어간 때였다.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부르주아란 속물의 별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발자크는 같은 시대에 속하면서도 부르주아의 왕성한 생활력과 실행력을 사랑하였고, 거기서 생긴 과학의 진보와 산업의 발달을 찬양하였다. 이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원리에 공명할 수 있었던 발자크는 그 원리에 입각하여 눈앞에 있는 사회의 모든 모습을 아름답게 그렸다. 그가 사실주의의 가장 훌륭한 선구자로 간주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올빼미당원》 이후의 모든 소설을 작중인물의 재등장이라는 수법으로 연쇄하였으며(이는 《고리오 영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전 작품에 대하여 《인간희극》이라는 종합적 제목을 붙였다. 이는 모두 70편 가량으로 등장인물이 2,000명에 이르며 대표작품으로는 《외제니 그랑데》(1833) 《절대의탐구》(1834) 《고리오 영감》(1834~35) 《골짜기의 백합》 《농민》(1844) 《종매 베트》(1846) 《종형 퐁스》(1847) 등이 있다. 《인간희극》은 그가 말했듯이 가공적 내용이지만, ‘하나의 완전한 사회’를 표현하는 것이며,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 관한 풍부하고 상세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이는 《인간희극》의 세계가 단순히 발자크의 눈앞에 전개되는 사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오히려 발자크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인간희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작중인물들의 백열적인 삶이다. 그 곳에는 욕구의 무한, 탐구의 무한, 사상의 무한, 감정의 무한을 추구하는 초현실적인 인물들이 북적거린다. 이 점에 있어서 발자크는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소설가 플로베르, 졸라와도 전혀 다르다.
르포르타주 [reportage]
보고기사(報告記事) 또는 기록문학
어원은 보고(報告:report)이며 ‘르포’로 줄여 쓰기도 하는데, 어떤 사회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보고자가 자신의 식견을 배경으로 하여 심층취재하고, 대상의 사이드 뉴스나 에피소드를 포함시켜 종합적인 기사로 완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J.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간》(1919), E.M.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와 E.P.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1938) 등은 대표적 기록문학으로 꼽히는데, 이로 볼 때 픽션을 배제하는 논픽션만이 기록문학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르포르타주는 신문의 보도기사와 기록문학 사이의 영역을 메우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에도 ‘기자(記者)의 르포’와 ‘소설가의 르포’가 독자적인 특색이 있음을 강조하는 설도 있어 그 한계가 명확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