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교실
손창섭 지음 / 예옥 / 200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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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평하기란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다른 소설들을 두루 접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또렷한 당파성을 지닌 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당시 한국 사회가 6.25의 상흔을 여전히 씻어내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때를 오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자리 잡기 이전). 무너진 산업 재건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찾는 것이 당시 사회의 긴요한 문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충격을 준 것은 그런 상황에서 손창섭은 저 혼자 외떨어져 ‘가족 해체’라는, 당시로써 상상도 할 수 없는 작업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인가? 이 소설은 분명 내가 아는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 도촬과 훔쳐보기는 물론이고 동성애 그리고 일종의 계약 가족의 형태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내가 아는 갓 60년대에 접어든 한국의 모습은 이렇지 않다.


이 간극과 괴리감에서 오는 생경함이 책을 계속 붙들게 만든 듯하다. 여기서 손창섭은 몇 가지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고 해체하길 반복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실험적 요소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이 갖춰야 할 서사적 재미를 잃지 않는 점이 신통하게 다가온다. 내 기준에서 보건대 분명 미문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교실』은 소설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런 미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개에는 막힘이 없고 아슬아슬하게 갈마드는 수위의 강약 조절 또한 훌륭하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을 덮고 나니 문장의 치장에만 중점을 두고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별 게 없는 오늘 한국 문학의 분위기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으니 말 다했다.




남자의 방탕을 긍정한다면 여자의 방탕도 긍정해야 된다 그거요. 여자의 방탕을 긍정할 수 없다면 남자의 방탕도 절대로 긍정해선 안 된단 말요. 물론 이상을 말하자면, 남자고 여자고 방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겠지만, 역사가 있은 이래 남성 본위의 인간사회에서는 남자의 방탕만은 공공연히 활갯짓하며 성행해 오지 않았느냐 말요. 그러니 남녀동등권이요 인권이요를 걸핏하면 내세우는 요즘 세상에선 정숙이니 부도(婦道)니 하고 남자 쪽에만 편리한 보통명사를 만들어가지고 여잘 묶어놓는다는 건 당치않은 일이란 말요.


p.182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주인갑 씨의 ‘방탕론’이다. 나는 여기서 주인갑이 곧 손창섭 그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소설에서 손창섭은 주인갑 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자유로운 성관점과 페미니즘적 주장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한국 문단이 손창섭이라는 진보적 사상가를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홀대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이 나오고 약 40년 뒤 소설가 김훈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은 페미니즘 같은 못된 사조에는 물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려 40년이다. 40년이면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남을 세월 아닌가. 한국 문단에서 김훈이 가지는 상징성을 본다면 손창섭이 일본으로 떠난 이후 이 바닥이 이뤄낸 평등적 발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훗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손창섭의 작품들도 대개 사상적 성격이 덜한 초기작이라는 점 또한 고려한다면 어쩌면 손창섭 그는 한국 문단이 품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작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서사적 재미와 사상적 통찰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는 지금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단순 통속소설 범주에 묶이기에는 이야기가 지닌 날카로움이 예사롭지 않다. 요즘 세간이 페미니즘 담론으로 시끌벅적하지 않은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손창섭의 후기작들에 대한 사회적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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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앞선 천재입니다.

5DOKU 2016-02-06 22:49   좋아요 0 | URL
삼부녀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