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오셨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 사람 같지 않아요."
술잔을 비우고 스탠드의 여자를 향해
어설프게 미소 짓는다
서울이라고 말하기 싫다
아무데면 어떤가
나는 나머지 술을 비우고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건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때가 되면 지나온 생에
미소를 지어야 한다.
지금 나는 그저 술 마시는 남자
어떤 여자 앞에서도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다.
취해서 떠드는
이 숱한 남자들 속에서.
-'구미시 이번 도로1', 우영창 詩
몇 개월째 나란히 동네 스포츠센터에 함께 다니는 책장수님과 주하.
어제는 좀 멀리 운동을 하러 간다기에 그 시간에 나는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마침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극장에서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를 상영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어렵게 들어간 다이고는
거액의 빚을 얻어 첼로를 장만하는데 재정난으로 오케스트라가 해체된다.
아내와 상의, 작은 카페를 운영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집(그 카페)으로
내려오는데, 여행 도우미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사장왈, 그 신문광고에 실수로 중요한 단어가 빠졌다고 시치미를 뗀다.
알고보니 시신을 염하고 납관하는 영원한 여행(죽음) 도우미였던 것이다.
<씨네21>에 의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체 역할 배우 오디션장이
미어터졌단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배우들은 전혀 미동이 없어야 하는
어려운 연기를 잘도 해냈다고.
'하고많은 연기 중에 시체 연기를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스르르 의문이 풀렸다.
매일매일 장작불로 자신이 직접 끓여낸 물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졌던
목욕탕집 할머니는, 곱게 단장을 끝낸 관 속에서 초절정의 미를 보여준다.
카페('和'라는 이름의 문패도 떼지 않았다)를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30대 주인공 부부의 낡은 집도 좋았고,
어린 시절에 사용했던 작은 첼로로 어른이 된 다이고가 연주하는 곡들도
묵직하면서 따뜻했고,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그 대중목욕탕의
김이 서린 내부 풍경도 좋았다.
첼로 연주자에서 납관사 도우미가 된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첼로 연주는 물론 납관의 절차까지 직접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고.
(음악은 히사이시 조)
'죽음'을 너무 심각하게 다룬다거나 또 희화화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납득이 갈 만한 선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진솔하게 펼쳐보이다니......
오늘 아침, 책꽂이에서 문득 눈에 띈 <현대시세계>(1989년 겨울호)를
펼쳤더니 우영창의 시가 나왔다.
영화 이야기와 매치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페이퍼로 올린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
그는 사직권고를 받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차라리 이유 없는 편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빗속을 걷고 또 걸어
생전 다시는 들르지 않을 술집에서
못 마시는 술을 마셨다
머리 속에서 콸콸
빗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갑자기
모든 기억이 흐려져 갔다
잠이 깼을 때
그는 변두리 여관의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질척거리는 시장의 식당에서
국밥을 뜨며
국밥 속에 전혀 낯선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보았다
- 우영창 詩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