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해보겠답시고 딱 하루 용을 써보고 얻은 나의 결론은 이랬다.
'나란 인간은 세일즈와 맞지 않는다!'
삐딱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딴지를 걸었다.
'그럼 니는 뭐 해갖고 묵고살낀데? 뭐 딴 사람들은 세일즈가 적성에 맞아서 직업으로 택했다 카더나?'
그런데 세일즈는 일단 그 사람의 집 대문이든 마음의 빗장이든 지갑이든 열게 하기 위해
나름껏 적절한 장광설을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우선 남의 마음이든 지갑이든 대문이든
열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나의 재능(!)을 살리는 일, 역시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글솜씨(!)를
뽐내는 일이었다.
동광동의 K기획. 광고회사라기엔 상호가 너무 꾸졌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허영심 없고 내실 있는 기업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광동 인쇄골목의 한 허름한 건물 2층.
직원이라곤 내 또래의 경리와 30대 초반의 젊은 실장 겸 사장이 다였다.
유능한 카피라이터를 한 명 뽑아 침체된 회사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부담과 희미한 저항을 느꼈지만 어쩌면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역시 카피라이터로 일하기 전의 그 단계라는 것이 필요했다.
망할 놈의 단계. 역시 그것이 직장생활의 관건이었다.
아무튼 카피라이터라고 떠억하니 명함도 박고 아침마다 얼굴에 좀 찍어바르고 출근이라는 걸 했다.
부모님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처음에 내가 맡은 일은 마산의 한 공원묘원의 '찌라시' 광고문안.
--산책로의 끝에서 만나는 그리운 이의 묘원!
이것을 헤드카피로 뭐라고 뭐라고 그 공원묘원의 장점들을 몇 가지 열거하면 되었다.
무덤을 유치하는 일이라니 맥이 좀 풀렸고, 겨우 몇만 원짜리 '찌라시'라니 나의 첫 일치고는
너무 초라했지만 그러면 어떤가! 나는 나의 성실과 유능을 입증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계속)
그런데 이곳에서도 곤란한 일이 자꾸 생겨났다.
사장이 "약속이 다 되어 있다!"며 어디에 가서 계약서에 도장만 받아오면 된다고 해서 가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길길이 뛰는 것이었다.
"거, 사람 참! 한번 만나달라 통사정해서 만나줬더니만 어디서 덤테기를 씌우려 들어!"
사장이란 인간이 주로 계약을 뚫어보려고 한 건 부두 뒤편의 해운회사들이었다.
동광동에서 부둣가까지는 위치상 어중간해서 걸어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봄이어서
갈 때는 진땀이, 올 때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점심시간은 꽤 즐거웠다.
근처 식당에 밥을 대놓고 먹었는데 주인의 음식솜씨가 썩 괜찮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경리직원이 그곳에서 밥을 먹지 않고 약속이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자꾸 빠지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 나를 대하는 주인부부의 태도도 점점 험악해졌다.
밥을 소리가 나게 탁 내려놓질 않나, 다 먹기도 전에 식탁을 치웠다.
왜 그러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봤더니 K기획이 외상으로 밥을 먹는데 한달 보름치가 밀렸다고 했다.
어느 날부턴가 사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전화는 슬슬 피하고......
내가 주인이라도 부아가 났겠다.
할 수 없이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한달 월급은 받아봐야 할 것이 아닌가!
궁리 끝에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쳐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K기획(정확하게는 나 같은 인재)이(가)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정성껏 문안을 써서 부산 시내의 그럴만한 중소기업이나 괜찮은 레스토랑 몇 곳에 안내문을 보냈다.
부산 지역에서 꽤 알려진 화장지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그곳은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 두루마리 휴지와 티슈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만나보니
사장님이란 분이 너무 좋았다.
라디오 광고의 문안과 카탈로그 제작을 맡기로 했는데 70만 원에 계약했다.
사장님은 부탁한다며 나에게 두루마리 화장지와 티슈를 몇 덩이나 안겨주었다.
짐이 많다고 집에까지 태워다 주기까지 했으니 그날 내가 얼마나 부모님 앞에서 으시댔겠는가!
몇 개의 '찌라시'와 xx화장지의 일이 끝났을 때 딱 한달이 되었고 나는 비전이 없다고 판단,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장이 깜짝 놀라며 치마꼬리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선선히 그러라고 해서 얼마나 무안했던지......
동광동 산꼭대기 그 허름한 골목을 한달 동안 드나들며 나는 인생에 대해 확실한 감을 잡았다.
인생에는 별것이 없다는 것을.
산다는 건 한없이 초라하고 지루하고 비루할 뿐이라는 걸.
그런데 인생에 대한 환상을 싹 걷어가 준 건 좋은데 이놈 봐라, 그 알량한 월급을 주지 않고
차일피일 자꾸 미루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