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힘으로 취직을 해보겠다고 잠시 용을 쓰던 날들이 있었다.
첫번째로 이력서를 넣은 곳은 무슨 회사 '사무직'.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사무직'이란 단어에 솔깃해 그 당장 이력서를 썼다.
그곳은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이 있다고 해서 나의 신뢰를 얻었다.
'서류전형에, 필기시험, 면접을 봐서 사람을 뽑을 정도면 최소한 꼭 필요한 사람을 뽑는다는 뜻이겠지!'
순진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류전형에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부모님께 취직이 거의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부터 치고 보았다.
긴가민가 수상한 눈빛을 교환하는 부모님을 보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믿음직하지 못한
딸이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분하지만 할 수 없는 일!

아무튼   다음날 아침 시험을 치러 갔더니 사무실 분위기도, 거기 모인 사람들도,
시험문제도 너무너무 수상했다.  수상하지 않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1번 문제 : '성공'을 영어로 써보시오!

그런 비슷한 문제가 열 개인가 스무 개 쭈루룩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100점 만점에 톱의 영광을 누렸다.
살다가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면접 때 양복과 얼굴이 따로 노는 아저씨가 내 손을 꼭 잡고 아래위로 힘차게 흔들었다.
정말정말 기대한다고!

면접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남녀 열댓 명인가가 남았는데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지독하게 내성적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여성이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자기의 좌우명은
'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가함)'이라고 말하는데  소름이 돋았다.
아니, 저렇게까지 말할 건 뭔가! 
나는 모르는 이들 앞에서 그런 어마무쌍한  말을 좌우명이라고 떠들고 싶지 않았다.
차례가 되어 앞으로 불려나간 나는 최대한 무심하고 껄렁껄렁한 표정으로 이름만 내뱉듯이 말하고
내 자리로 들어왔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한달에 1천만 원을 번다는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칠판 앞에 나가
내가 모르는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사무직으로 일하기 전에 반드시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그 일의 내용이 '상담'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3년 전 이 단계를 성실하게 밟아 지금 위치에 올랐다고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채용이 결정(!)된  나를 포함한 열댓 명은  네 개인가 다섯 개인가의 조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선배사원들이 한 명씩 각조에 따라붙었다.
한 시간여의 교육이 끝난 후 우리들 손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설문지가 든 파일 한 권씩이 들려졌다.
마지막으로 앗싸앗싸 무슨 구호를 외치라고 해서 따라 외치는데 왠지 다리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순식간에 어린이책 전집 외판원이 되어 있었다.
관건은  어디까지나 설문조사라고 대문 앞에서 설득하여 주인으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는 것.
세 번째인가 모르는 집 대문 앞에서 선배사원의 시범이랍시고 하는 떫은 짓을 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는 파일을 그의 품에 던져주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용모단정으로 보이려고 입었던 치마, 굽이 꽤 높은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다 까졌다.
절뚝거리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사는 일이 꽤 만만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실망하실 일이 걱정이었고,  인생의 좌우명이 '신독'이라고 부르짖던 아까 그 여성은
지금 어쩌고 있는지가 무지 궁금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이는 좀 없었지만 나는 그날 하루의 경험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나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혹시 뻔뻔스럽게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가,  그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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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플레져님의 페이퍼를 읽고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어 페이퍼를 쓰겠노라 댓글을 달았더니
마태우스님이 내가 그런 말을 열두 번인가 열세 번 하는 걸 봤다고 비웃으시는 거다.
나의 성실함을 입증하기 위해 페이퍼를 쓴다.
그런데 같은 취업분투기인데 어쩜 이리 글의 모양이 다른 것이냐!
추천수가 만족스러우면 다음 이바구도 털어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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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0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을 쓰던 날을 엿보는 저는 왤케 재밌게 느껴지는지.
고소한 땅콩을 한 소쿠리 가득 담아놓고 까먹으며
누군가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워올리는 것처럼 재밌어요.

다음 이바구를 보고 싶으니 당연히 추천을 해야죠! ㅎㅎ
근데, 웬만한(누가 교정 전문가 아니랄까봐! =3) 추천수에 로드무비님이 만족하실까... =3

urblue 2005-10-06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많은 로드무비님.
그간의 추천수가 부족해서!!
(뭐 당연히 추천 하고 갑니다. =3)

비로그인 2005-10-0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웃음이 마구 나오며 주책스런 수다가 떨고 싶어지는데 그냥 참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정성껏 추천만 하고 갑니다..
(사실은 막 시장을 봐와서 아직 짐도 풀지 않았거든요..^^)

로드무비 2005-10-0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블루님, 추천수에는 마음을 비웠는데요.
그런데 플레져님하고 너무 많이 비교되면 좀 거시기하잖아요.
같은 이야길 썼는데......(아닌가?)

노파님, '용을 쓰던 날들'이 제목 더 와닿죠?
님이 재미있다고 하시니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왠만한--웬만한 당장 고치세요!ㅎㅎ
(추천수 압박 넣지 마세요! 시치미 뚝!('' )(.. ))

Laika 2005-10-0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의 글은 늘 마음으로 읽어요....추천합니다.^^

라주미힌 2005-10-0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 보고 다단계인줄 알았는데... ㅎㅎㅎ
글이 너무 재밌어요. 아하하..

이누아 2005-10-0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로드무비 2005-10-0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추천 고맙습니다.^^

라주미힌님, 다단계 성격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으시다니 다행이어요! 헤헤~

라이카님, 앗!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무지 기분이 좋은데요?^^

chika 2005-10-0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말없이 추천만 하는 것이 맘에 안드셨었는지도 몰라요. 추천했다는 댓글이라도 달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ㅎㅎㅎ
- 근데 이러고 보니 글이 좋아 추천인데 괜히 추천하는 댓글 같쟎아요! ㅠ.ㅠ
그거 아닌거 말 안해도 아시겠지만 내가 워낙에 소심해서리~ =3=3=3

날개 2005-10-0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저런 시절도 있었군요..^^ 잘 때려치웠어요..ㅎㅎ

mong 2005-10-0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님이 순수하셨던 마음이려니 합니다
젊은 날의 분투기 잘 읽었습니다 ^^

어룸 2005-10-0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편이 너무 기다려딥니다!!!! ^^

라주미힌 2005-10-0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편까지 준비되어 있는 거 같은데, 어서 풀어보셔용.. ㅎㅎㅎ

플레져 2005-10-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사회의 발자국에는 꼭 그노무 신발이 말썽이에요.
그날 이후로 하이힐 신고 뛰는 연습 했어요. 9cm 힐을 신고 빙판을 뛰어다니던 나날들이 스르르 지나가는군요...ㅎㅎ (지금은 절대로 못해요. 뜀박질엔 운동화!)
추천수가 언넝 맘에 드시길 ^^

플레져 2005-10-06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님! 추천수에서 저는 님을 못 따라잡는다구요....ㅠㅠ

검둥개 2005-10-06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담 이야기도 해주세요. 추천했어용 ^^

페일레스 2005-10-0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_^

로드무비 2005-10-0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저도 처음 뵙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분 좋은데요?^^

검둥개님, 으흐흐 다음 이야기는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어요.^^

플레져님, 뭔들 제가 님을 따라잡겠습니까!
우린 서로의 팬 아닌가요?ㅎㅎ
그노무 신발......정말 문제였죠.
(추천수 괜히 말했다 싶어요. 아니, 잘한 건가?ㅎㅎ)

라주미힌님, 저 페이퍼 거리 13편까지 준비돼 있는 것 어찌 아셨어요?^^
(조금만 지둘리세요!^^)

투풀님, 님의 기대에 꼭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불끈!=3

mong님, 뭐 분투기랄 것까진 없고요.(한 게 없으니...)
가벼운 경험담 정도!^^

날개님, 저 그때 바로 때려치우기 잘했죠?ㅎㅎ
안 그랬으면 3년 뒤 그 본부장급이 되었을지도.....^^

치카님 저는 말 없는 추천보다 한마디 뭐라고 남겨주시는 게
더 좋습니다.^^

사야님, 흑=3 지금 보니 님의 메모를 놓쳤어요.
시장은 많이 봐오셨나요?
님이 웃으며 읽으셨다니 저도 덩달아 기분 좋아요!^^

2005-10-06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07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피드림~ 2005-10-07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일 많았어요. 뭐, 그러면서 배우는 거죠. (그런 덕분에 어떤 일에건 쓸데없이 의심이 많아지긴 했지만서도 ^^;;)

혜덕화 2005-10-0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취업의 기회를 가진 것과 그런 경험을 부러워한다면 얄미운 소리가 될까요? 재미있어요. 다음 이야기 기대할게요.

로드무비 2005-10-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저는 두 군데의 직장 경험밖에 없어요.
한 달 다닌 것도 쳐야 하나?ㅎㅎ
다음 이야기 빨리 쓰도록 할게요.^^

펑크님, 사실 저거이 무슨 대단한 경험이겠습니까!
모두 한두 번씩은 이상한 공간에 잠시 몸을 담아보지 않았을까요?^^

두 번 속삭이신 님, 아이코, 고맙습니다!
기쁜 소식이네요.
그런데 왜 제가 생각났을까요?^^


비로그인 2005-10-0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제가 왜 일케 재밌는 글을 못 봤당가요. 추천, 추천! 다음 이바구도 후딱 깨작거려 주시죠! 아, 근데 '신독'이 무슨 뜻인가요? 나만 모르고 있는 건가..ㅡㅡa

로드무비 2005-10-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님 기다리느라고 내가 여적 서재에 있었수.ㅎㅎ
글고보니 한자를 다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 전 달았어요.
서비스 차원!ㅎㅎ
(다음 이바구 좀 있다 쓸게요.)

2005-10-07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ndcat 2005-10-0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어요. 퇴근 전까지 올라올래나 어쩔래나...

로드무비 2005-10-0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과 그 위 속삭이신 님의 요청으로 급히 반쪽짜리 페이퍼라도
써서 올렸습니다.
사실은 저의 페이퍼 주가를 올리기 위한?ㅎㅎㅎ

인터라겐 2005-10-08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업직은 구호가 너무 거창해요...흐흐... 로드무비님!!!!! 지금도 열심히 살고 계시잖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사실 것 같은 1순위십니다..

로드무비 2005-10-0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님도 그런 구호 한 번 외쳐보신 적 있나요?
어, 그런데 열심히 사는 것하곤 정말 거리가 먼 인간인데요, 저는.
말씀은 고맙지만...^^

니르바나 2005-10-11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로드무비님께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셨군요.
우리 기쁜 젊은 날인가, 우리 젊은 기쁜날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감동을 주는 글이 어찌 저와 우정을 나누는 그분을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로드무비 2005-10-1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아니랍니다. 자서전.
저같은 사람이 자서전 써서 뭐하게요.
그냥 생각난 재밌는 일화 써본 거예요.
반응이 하도 좋아서 이어지는 글도 써본 거고.
그 정도예요, 니르바나님.
재밌게 읽으셨다면 혹 모를까, 감동은 터무니없습니다요.
니르바나님과 우정을 나눈다는 그분 제게도 소개 좀 해주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