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맛있는 여행
황교익 지음 / 터치아트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가 놀러갈 계획을 세울때면 먼저 확인해보는 블로그가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블로그와 네이버캐스트 연재물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맛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짧게 언급되어지는 지식과 역사가 살을 덧붙여 여행을 풍성하게 해준다. 반갑게도 그 기록물이 한권의 책으로 엮여져 나왔다. 아쉽게도 모든 내용이 담겨지진 않았지만 일년을 꼬박 채울 내용이 담겨져있다.

 

책을 받아보자 마자 가을편을 펼쳐보았다. "잣나무는 한반도가 원산지이다. 그래서 영어로 Korean Pine(한국 소나무)이라 하며, 학명도 Pinus Koraienis라 하여 한국 원산을 적시하고 있다"(178쪽)

"남당리에 대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애초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산지의 특산 음식을 현지에 가서 먹고자 하는 열망이 조성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천수만의 대하는 많은 양이 냉동으로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도시 소비자로 나오는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마이카 붐'이 일면서 현지까지 가서 특산 음식을 먹는 여유 계층이 생겼다. "(191쪽~192쪽)

 

이번 가을엔 대천에 한번 더 가야겠다. 남당리 대하맛을 보고 다음날 서산 우럭젓국 맛을 보고 올라와야 겠다.  

 

이책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그 맛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담스미스는 자본주의라는 말 한번도 쓰지 않아

개인의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 한계내에서 허용

국민이 대부분 가난하게 사는데 국가가 부유할 수는 없다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 .. 도덕감정론과 한 패

 

경제의 위기

 

지난 1000년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BBC조사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에 대해 고민한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밝혀낸 철학자

 

노동가치론 (리카르토 - 스미스), 분업론

 

착취하는자본주의의본질 발견 ...

자본가의이윤추구-기계-상품과다-실업증가-시장붕괴-공산주의

철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가난한노동자들에대한연민과 그들을 해방시킬 열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BS다큐프라임 자본주의가 이번주 월 (9.24) 부터 시작했다. 오늘은 3부 금융지능은 있는가 편이 방영되었다. 금융지능편에서는 금융사회의 여러문제를 밝힌 후에 금융이 커진 이 사회에 금융지능이 필수임을 설명한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말을 했다. "은행은 맑은 날 우산을 빌려줬다가 맑은 날 가져간다." 이 말은 은행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출을 아끼지 않다가도 정작 힘들어지는 회수해가는 은행들...

 

우리는 많은 연금, 보험, 펀드에 가입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몇 년 후 우리는 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언론에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그들의 이런 설명과는 달리 쪽박찬 내용을 많이 듣게 된다. 그때마다 금융기관은 새로운 상품을 들고 나와 다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금융에 있어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리스크 없는 수익은 없다는 것이다. 수익이 높을 수록 그만큼 손해볼 확률도 큰데 우리의 금융기관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판매하는 사람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펀드만 1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더 있다. 수수료, 사업비, 운용보수 등이다. 설사 펀드의 운용실적이 나쁘다고 해서 수수료를 깎아주거나 운용보수를 덜 받아가지는 않는다. 손해는 완전히 고객의 몫이다. 이런 문제를 이미 지적한 책이 있다.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금융상품이 금융회사의 돈벌이일 뿐 고객의 자산을 생각해주는 상품은 전혀 없다는 진실을 이야기해준다.

 

현대금융사회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파생상품이라고 하여 원래의 상품에서 파생된 금융상품이 거래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상품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역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일종의 파생상품에서 기인한 금융위기이다. 문제는 이러한 파생상품의 규모가 너무 커서 세계경제가 휘청된다는 점이다.  

 

            

 

방송에서 경제학자 라잔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에 손을 댔다가 손을 잘리는'일이라고 현대 금융사회에서 수익을 얻기 위한 활동을 비판했고, 니얼 퍼거슨은 금융인들도 의사처럼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금융인들이 양심없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터키문명전을 가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런 날짜를 잘못알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미 끝나버렸지만, 며칠 전 읽은 '오스만제국사'를 중심으로 책에서 소개된 음악에 대해 오스만 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살펴 보았다.

 

디킨스의 런던, 프루스트의 파리, 제임스 조이스에게 더블린이라면 이스탄불을 살려낸 이는 오르한 파묵이다.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파묵은 오스만제국을 소재로 한 몇 권의 소설을 썼다.

 

        

 

    

 

쿼터트의 '오스만제국사'에서는 오스만제국을 소재로 한 오페라와 음악을 소개한다. 오스만제국을 소개한 오페라로는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헨델의 '티메를라노',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알제의 이탈리아 소녀'가 대표적이다.

 

     

 

이외 오스만제국의 예니체리군악대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과 로시니의 빌헬름텔 서곡, 바그너의 탄호이저 행진곡, 브람스 교향곡 41번, 하이든의 군대교향곡과 투르크풍 론도가 쓰인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 k.331과 재즈로 발전시킨 Dave Brubeck, Ahmad Jamal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스만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제국중의 하나이고 지중해 전체를 손에 넣었던 나라임에도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역사속에서 홀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대표적인 오스만역사가인 도널드 쿼터트의 이 책 '오스만제국사'를 보면 본인도 오스만제국사를 강의할만한 개설서가 없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오스만 역사가 이렇게 홀대받는 것은 아마도 서양사, 동양사로 구분되는 역사 구분속에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중동의 역사는 어느 쪽에도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게다가 상당기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무슬림의 기억을 유럽은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스만제국이 번영하고, 문명화가 더디었던 16~18세기에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모범이었다. 안정된 정치체계 및 효율적인 국가관리를 본받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커피, 튤립 등 문화생활과 천연두 접종과 같은 획기적인 의학적 혜택을 모두 오스만제국에서 얻어왔다. 현재의 군악대 미국 미식축가 경기시 고적대 등의 문화역시 오스만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오스만의 상황이 역전이 되고 나서 서구 유럽은 오스만을 야만스럽고 방탕한 존재로 왜곡하였다. 그러한 인식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동서양사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오스만제국은 서아나톨리아 지방에서 1300년대에 모습을 갖추며 다른 투르크 국가들과의 경쟁을 거치면서 점차 터키지역의 패권을 차지한다. 마호메드 2세기 제위시절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비로소 터기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비잔틴제국을 1453년에 정복하긴 했지만 사실 비잔틴은 1200년 초 부터 그 힘을 갖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플 역시 제대로된 수도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1024년의 제4차 십자군전쟁당시 십자군에 의한 약탈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제4차 십자군원정은 이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비잔틴제국에 대한 침략이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계속적으로 영토를 넓혀가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450년대 오스만 제국의 영토

 

지중해 전반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당시 주변지역에 강한 제국이 없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정복한 국가와 가신의 관계를 맺으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속국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오히려 오스만제국에 편입되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가 함께 공존하여 상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재를 활용하기에도 유리했다. (오스만정부의 이슬람법은 강제로 개종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데브시르메라는 소년 공납제도 있었다. 농촌의 사내아이 중 훌륭한 아이들을 선발해 수도 혹은 중심도시에서 교육을 받게 해 이들이 오스만제국의 행정을 관장하거나 군대의 핵심인재가 되었다. 데브시르메라는 제도를 통해 훌륭한 인재들이 등용되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런 오스만제국은 1683년 합스부르크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이후 유럽과 지중해의 패권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1683년의 패전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후로 오스만 제국은 예전만큼 강성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유럽세계가 절대왕정기를 거쳐 중앙집권화되면서 국력이 급작스럽게 강력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오스만제국은 뒤쳐진 국가체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전쟁에서의 방어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전처럼 쉽게 함락할 수 있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공격에 엄청난 전비가 소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역시 오스만제국의 힘을 약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국제정세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흑해 대부분의 권리를 상실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불안을 느낀 서구 유럽의 개입으로 러시아에 빼앗긴 땅의 상당부분이 독립 혹은 나눠먹기식 분리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세계제1차대전시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던 오스만제국은 전후 거의 대부분의 땅을 잃어버린다. 승전국인 영국은 이라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얻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했다. 그리고 1922년 오스만제국은 터키 공화국이 된다.

 

오스만제국과 더불어 생각해 볼 몇가지가 있다.

오스만제국이 힘이 최고조에 달한 16세기 말 17세기 초 오히려 오스만제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감소하는데 이는 서유럽의 신대륙 정복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지중해 중심의 경제가 오스만제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가져가면서 대서양으로 경제의 축이 옮기는 자극이 되었다.

 

최근에 있었던 코소보학살과 관련하여 배경이 되기도 한다. (원인이 아니라) 17세기~18세기에 있었던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전쟁과정에서 세르비아 정교회신도들은 코소보를 떠나 보스니아 동부로 이주하고, 그 자리에 알바니아인들이 들어서게 된다. 민족적 갈등의 배경이 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쿼터트의 오스만제국사에서는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1915~6년에 수도 이스탄불에서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이다. (최소 50만) 이에 대해 저자는 비단 오스만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님을 주장한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아메리카, 유럽에서 그러한 국가에 의한 탄압이 부지기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굉장히 악화되었음을 반증한다고 설명한다.

 

후기의 오스만제국의 통치방식은 그다지 반갑지 않지만 서양의 역사를 바꾼 오스만제국과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동양과 서양의 가교역할을 한 오스만제국은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스만제국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스만 제국을 연구하고, 그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야 하는 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그 역사의 거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관용적인 통치 모범 때문이다. ... 오스만제국은 수세기 동안 피지배자들을 크게 압박하지 않고 통치해왔다. 오스만 정치 체제에서는 위정자들과 군사령관들이 피지배자들의 종교활동을 - 순니파, 시아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카톨릭 등 어떤 형태의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이는간에- 보호하도록 규정해놓았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경전의 사람들',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