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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의 선택 - 생명공학의 위험과 비윤리성
박병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일단 기본적으로 녹색평론에서 나온 책들은 생명존중사상이 투철하다. 그 사상이 필요하다고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이 도시적 삶에 익숙해져 있어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계기는 '황우석'교수 사건 때문이다.
뭐랄까? 황우석교수 사건 황색저널리즘에 빠져들면서 매일 보여지는 기사는 여성지(여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지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빗대어서)에 나오는 기사 제목만큼이나 선정적이다. 이건 아닌데 말이다. 이 기회를 계기로 생명공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고,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건 영 아닌 듯 싶다.
'파우스트의 선택'은 생태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병상이라는 분이 쓴 생명공학에 대한 글이다. 황금빛 미래가 그려지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책임질 대표적인 학문인 생명공학. 그 생명공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드문 책이다. 저자는 과학적인 업적뒤에 버려진 실패의 가능성과 실패물들, 성과라는 과학자의 욕심속에 무시되는 생명윤리, 식량증산에 대한 오해, 생명공학이 갖는 남성주의 과학문화와 함께 자본에 결속된 생명공학의 폐해에 대해 종합적으로 짚어낸다.
도대체 태아는 언제부터 사람일까? 그 경위야 어찌되었건 지금 현재는 14일 이전의 배아는 생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곧 14일 이전의 배아는 실험대상이 될 수 있다. 생명공학이 갖고 있는 바로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언제부터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과학자는 윤리학자들과 교묘한 타협을 한다. 그래서 현재의 14일이 기준이 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과학적 성과가 장밋빛으로 보기 시작하면 완전한 성체의 모습을 갖기 전까지로 후퇴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14일 이전에 실험된 사용된 배아들은 어떨까? 14일 이전의 배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실험에 실패해도 상관없을까?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실험에 쓰이던 14일 이전의 배아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복제양 돌리가 나타났고, 우리나라에서도 복제소와 더불어 복제개 스너피까지 있다. 우리는 그 성공한 복제물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복제물을 위해 실패한 개체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나 실험이 잘못되어 돌연변이가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슈퍼호박, 슈퍼돼지들과 관련된 기사들을 읽었다. 어렸던 나에게 그런 거대한 식물, 동물이 나오면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은 어떤가? 여전히 제3세계의 아이들은 굶어죽고 있다. 식량생산은 거의 혁명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는데 왜 굶주리는 사람은 줄지 않는 것일까? 결론은 단순하다.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하는 연구비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서 나온다. 간혹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자본을 증식할 수단으로 볼 뿐. 식량혁명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자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제3세계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 굶주려 죽는 사람을 모두 배불리게 먹일 수 있는 곡물들이 사료로 변환되는 현실.. 생명공학은 장밋빛이 아니라 자본의 또 다른 얼굴뿐이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을 때 누구보다도 감격했던 것은 난치병 환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치의 병을 고쳐줄 그런 세상을 뒤흔들만한 사건. 하지만 생명공학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학의 발전은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했던 시대를 넘어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의학의 발전이 인류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지 않는다.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나는 곳에만 의학의 혜택이 돌아간다. 그런 상황은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불과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는 제약회사가 의료보험수가 인상을 요구하면 신장병환자들에게 필수적인 혈액투석제(?)의 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생명공학의 경우, 어려운 말들을 쓰며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지만, 사실 천박한 자본주의와 같다. 경제논리속에 인권이나 윤리가 배제되는 것처럼, 생명공학의 논리속에 생명에 대한 인식과 생명윤리가 쓰레기취급 받고 있다. 경제논리속에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처럼, 생명공학도 돈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된다. '파우스트의 선택'은 생명공학이 멤피스트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생명윤리, 생태환경에서 점점 멀어지는 생명공학은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기 보다는 사람다운 삶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한걸음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